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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천로역정강해(20): 담을 뛰어넘어 오는 사람들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1731
담을 뛰어넘어오는 사람들
요10:1~3
[1부:담을 뛰어넘어 오는 사람들]
이렇듯 불쾌한 생각을 하면서 가고 있을 때 크리스챤은 좁은 길 저쪽에서 왼편의 담을 뛰어넘어 오는 두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크리스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허례”(Formalist)요, 다른 사람의 이름은 “위선”(Hypocrisy)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크리스챤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크리스챤: “여보시오, 신사 양반들. 당신들은 어디서 오는 길이며 또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허례와 위선: “우리는 ‘헛된 영광’(Vain-Glory)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인데, 영예를 찾으려고 시온산으로 가는 길입니다”(시9:2).
크리스챤: “이 길 어귀에 문이 하나 서 있는데 왜 그리로 들어오지 않고 담을 넘어오는 것입니까?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성경에 있는 것을 모르십니까?”(요10:1)
허례와 위선: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 고장 사람들은 모두 입구에 있는 문을 통해서 시온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고 힘들다고 생각하여 지름길을 택하려고 우리처럼 담을 넘어오는 것이 예사지요.”
크리스챤: “그러나 그처럼 불법으로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하늘나라의 주님께서 밝히신 뜻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한 죄로 간주되지 않을까요?”
허례와 위선: “그런 일에 대해서 당신이 공연히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은 다만 오랫동안 내려온 관습 때문이며 만일 필요하시다면 천 년 이상 계속 되어온 관습임을 증명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챤: “그렇다면 당신네들의 행동이 법정에서도 관습이 인정될 수 있을까요?”
허례와 위선: “천년이 넘도록 당연하게 여겨온 관습이니까 공정한 재판관이라면 틀림없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단 우리가 이 길로 들어선 이상 우리가 어떤 경로를 밟았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디까지나 이 길로 들어선 건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가 보건대 당신은 입구의 대문을 지나서 이 길로 들어섰고 우리는 담을 뛰어 넘어 이 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의 상황이 우리보다 더 나을게 뭐가 있습니까?”
크리스챤: “나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행하고 있지만 당신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지요. 당신들은 이미 이 길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의해 도둑으로 규정지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설령 목적지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을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이 길에 들었기 때문에 목적지에 이르거서 하나님의 자비를 얻지 못하고 스스로 도망치듯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하여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단지 크리스챤에게 자신의 일이나 신경쓰라고 한 마디 쏘아 붙였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서로간에 별다른 대화도 없이 제각기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꿈 속에서 볼 수 있었다. 조금 뒤에 두 사람이 크리스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걸었다.
허례와 위선: “율법이나 규례에 대해서는 우리도 당신 못지 않게 양심적으로 잘 따르고 있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당신이나 우리나 다를 것이 없고, 다만 우리가 보기에 당신이 지금 걸치고 있는 겉옷만이 우리 것과 다른 것 같은데 아마도 그것은 당신의 이웃들이 벌거벗고 다니는 당신의 부끄러움을 가려주기 위하여 당신에게 준 옷 같구려!”
크리스챤: “올바른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당신들이 율법과 규례에 의하여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걸치고 있는 이 겉옷은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천국의 주님께서 당신들이 말한 대로 내 벗은 몸을 가려주시기 위해 내게 주신 것입니다. 전에는 누더기 밖에 입어본 적이 없는 나에게 이렇게 좋은 옷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증거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더구나 천국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곳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내 누더기를 벗기시던 날 아낌없이 주셨던 겉옷을 계속 걸치고 있는 나를 보시고 영원히 날 기억해 주실 것을 생각할 때 스스로 커다란 위안을 느끼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당신들이 아마 부주의해서 알아차리지 못했을런지 모르지만 내 이마에는 표지가 찍혀 있는데, 그것은 내 등에 지워졌던 무거운 짐이 어깨로부터 떨어져 내리던 날, 주님과 가장 가까운 분들 중의 한 분이 내게 봉인된 두루마리 하나를 주셨는데 길을 가면서 그것을 읽으면 커다란 위안을 얻을 뿐만 아니라 천국 문앞에 도착했을 때 그것을 증거물로 제시하면 틀림없이 문 안으로 들여보내 줄 것이라는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문을 통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증거물들을 얻지 못했으니 증거물 없이도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이러한 설명을 다 듣고 나서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다만 서로 쳐다 보며 웃을 뿐이었다. 허례와 위선이 함께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고 그들보다 약간 앞서서 크리스챤이 걷고 있었는데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혼자 한숨을 내쉬거나 때때로 위안을 느끼면서 걷고 있었다. 그는 또한 빛을 발하던 분들이 주신 두루마리를 자주 읽으면서 새로운 기운을 얻는 것 같았다.
그들은 쉬지 않고 계속 걸어가서 마침내 “곤고산”(Hill Difficulty)이란 산의 기슭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밑에서는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좁은 문으로부터 곧장 반듯하게 뻗어있는 길 이외에도 산기슭에도 두 갈래의 길이 더 있었는데, 하나는 왼편으로 굽어 있었고 또 하나는 오른 편으로 굽어 있었다. 산꼭대기까지 반듯하게 곧장 뚫려 있는 길의 이름은 “고난의 길”이었으며 샘으로 가서 물을 마시고 새로운 기운을 얻은 크리스챤은 산꼭대기까지 뻗어있는 고난의 길을 택하여 걸어 올라가면서 이렇게 흥얼거렸다.
“산이 아무리 높다고 한들 내 어이 올라가지 못할까 보냐
험난하고 피곤할지라도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못할지니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내 깨달았기 때문이로다
자 힘을 내고 용기를 돋우어 나약한 마음, 두려운 마음, 모두 물리치고
가기는 험난하나 평안으로 인도하는 옳은 길을 택함이 더 낫지 않겠는가!”
잠시 후에 두 사람이 산기슭에 도착했다. 그러나 산꼭대기로 곧장 뻗은 길이 너무 험난하고 가파른데 비해서 좌우의 양쪽 길은 평탄하므로 그 길을 택해 돌아서 가더라도 산을 넘어서면 크리스챤이 택한 길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각각 하나씩 택해서 가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두 길의 이름은 각각 “위험”(Danger)“멸망”(Destruction)이었다. “위험”이라는 길을 택한 사람은 얼마 가지도 못해서 매우 무성한 가시덤불 숲으로 들어가 버렸고, “멸망”의 길로 가던 사람은 어두운 골짜기들로 가득 찬 벌판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넘어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릇된 길로 출발한 사람들이 올바른 결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참된 벗들이 있겠는가?
아! 그렇지 못하나니 제멋대로 택해서 길을 떠난 자들은
제 고집 때문에 마침내 멸망함을 의심할 여지가 없도다
[2부:곤고산 기슭에서]
계속 길을 가던 그들은 마침내 곤고산 기슭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들의 착한 친구인 담대는 예전에 크리스챤이 이곳을 지나갈 때 겪은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줄 기회를 가졌다. 그래서 그는 우선 일행을 샘터로 인도한 후 말했다. “자, 보세요. 이것이 크리스챤이 산을 오르기 전에 물을 마셨던 샘입니다. 당시만 해도 물이 깨끗하고 좋았지만, 지금은 순례자들이 마른 목을 축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악한 자들이 발로 물을 더럽혀 놓았지요(겔34:18).
이에 자비심이 말했다. “왜 그렇게 시기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안내자가 말했다. “하지만 염려할 것 없어요. 물을 떠서 깨끗하고 좋은 그릇에 담아두면 더러운 흙은 바닥에 가라않고 물은 자연히 맑아질테니까요.”
그리하여 크리스티아나 일행은 그의 말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물을 떠서 질그릇에 담아 두었다가 흙이 밑으로 다 가라앚은 뒤에 그들은 물을 마셨다.
그 다음 담대는 산기슭에 있는 두 갈래의 샛길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 길은 예전에 “허례”와 “위선”이 잘못 들었던 길이다. 담대가 말했다. “이 두 길은 위험한 길입니다. 크리스챤이 지나칠 즈음에 두 사람이 잘못 들어갔다가 망하고 말았지요. 보다시피 지금은 쇠사슬과 기둥과 개천으로 길들을 막아 놓았지만, 아직도 산을 오르는 고생이 싫은 모험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요.”
크리스티아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는 말씀과 같군요(잠13:15). 이러한 길을 가면서도 목이 부러지는 위험을 겪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지요.”
담대: “그래도 저들은 모험을 감행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곁길로 가는 것을 왕의 종들이 보고 위험하다고 일러주면, 그들은 도리어 반발하여 이렇게 말하지요.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 실행하리라’(렘44:16,17).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저 길은 쇠사슬과 기둥과 개천으로 막혀 있을 뿐 아니라, 울타리로도 막혀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굳이 저 길로 가려고 한답니다.”
크리스티아나: “그들은 게으르고, 고통을 좋아하지 않는 겁니다. 산길은 그들에게 별로 탐탁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저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이 응했어요.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9잠15:19). 예, 그들은 이 산에 올라 천성으로 가기 보다는 덫이 깔려 있는 길을 걷고자 합니다.”
주인공 크리스챤은 1단계(좁은 문),2단계(구원의 언덕)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거친 뒤 이제는 3단계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3단계는 「아름다운 궁전」에서 하나님의 전사로서 거듭나는 단계입니다. 아름다운 궁전은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바로 “성경적으로 개혁된 교회”를 말합니다. 존 번연 그 당시로 치자면, 영국국교(혹은 성공회)의 불완전한 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경대로 개혁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비동조자들”(Nonconformists)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궁전」은 바로 이 사람들의 교회의 모습을 그려놓고 있습니다(국가교회와 이런 개혁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존 번연의 아름다운 비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3단계에로 향하는 순례의 여정은, 어떻게 하면, 이런 성경적으로 개혁된 교회를 이뤄가느냐 하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해석의 관점을 가지는 것은 천로역정을 이해해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얽히고 섥히 단순이야기들의 묶음일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담을 뛰어넘어오는 사람들입니다. 「헛된 영광」(Vain-Glory)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란, “허례”(Formalist)“위선”(Hypocrisy)이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생활에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좁은 문」을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진실되고 참된 신앙고백을 거치지 않고, 형식상의 절차만을 거치면서 교회내에 들어온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천로역정 당시로서는 바로 영국국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그 당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가 그렇게 한 것(담을 뛰어넘어 온 것)은 다만 오랫동안 내려온 관습 때문이며 만일 필요하시다면 천 년 이상 계속 되어온 관습임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존 번연 이전에도 천년 이상 내려왔고, 그 이후 4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의 부담이라든지 죄의 질책, 성령의 역사로 인한 회심과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같은 것에 관심이 없고 그런 것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게 여깁니다. 반드시 통과해야 할 “좁은 문”을 무시하고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십자가의 체험도 없습니다. 죄의 짐이 굴러가는 체험이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죄(의 짐)가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에 관심도 없기 때문에, 해결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말씀 앞에서 겸손한 것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도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그 입술에만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특별히 현대교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인본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기법들이 동원되어서 사람들을 교회나 집회로 끌어모으고 일단은 교회에 호감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들에 근거한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교회들 속에서 진정한 크리스챤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진정한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정적이고 일시적인 흥분이나 전율, 즉각적인 결심들에 기초해서, 그것이 일시적인 변화인지 아닌지를 검토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은 채로, 세례를 베풀고, 성찬에 참여시키고 또한 교회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특별히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일 때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교회생활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본질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보다는, 그 용어들의 쓰임새에 대해서 너무나 익숙합니다. 그래서 찬양을 한다거나, 기도한다거나 할 때 너무나도 잘 합니다. 일종의 종교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 냅니다. 그리고 그런 활동 속에서 어떤 류의 종교적 감정들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 담을 뛰어넘어 왔습니다. 본질적인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회심과 중생도 없고, 그것을 확증하는 순간과 체험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종교인이지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영국국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이들 모두가 중생하지 못한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 없음을 존 번연은 곧 강조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강력히 호소하였습니다(요10:1~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면서,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오지 아니하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문”은 예수님 당신을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9절에서 분명히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좁은 문」을 통과하는 크리스챤의 비유로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와 부활의)를 통과하지 않고는 진정한 순례자가 아니요 천국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천로역정의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보다는, 성경적인 공동체로서의 개혁교회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과 「구원의 동산」을 지난 후에 「아름다운 궁전」을 향하여 가는 중에 만나게 되는 일들 중의 하나로서 이 담을 뛰어넘어 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례”와 “위선”은, 좁은 문을 통과하고 들어온 크리스챤과 자기들이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순례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고백을 했느냐 안했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느냐고 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크리스챤이 입고 있는 겉옷이 약간 자기들과 차이가 난다고 하기는 하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 겉옷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혀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혀진 크리스챤의 옷과 자기들의 의로 옷입고 있는 것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점에 대해서 주인공 크리스챤은, 겉옷만 아니라, 이마의 표와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인침과 하나님의 백성이 지니고 있는 언약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별반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 종교적 형식에는 능할지 모르고 또한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라도 그 본질과 그 능력에 대해서는 까막눈인 이들인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적이라면, 이런 형식주의자들과 위선자들이 발붙이지 못합니다. 만일 교회가 느슨하고 오류에 민감하지 못하면, 이와 같은 사람들이 번성하고 존경을 받습니다. 중직자들 가운데에 이런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교회가 교회다와지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해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다른 종교단체들과의 차별성을 갖지 못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어두워질 때에, 세상도 함께 어두워지고 불법이 횡횡하게 됩니다. 의인들은 오히려 잠잠하게 되고,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책망하는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종교개혁의 선조들과 청교도들은 교회가 이렇게 변질되는 것을 참으로 우려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회원으로 어떤 사람을 받을 때에 그 신앙을 철저하게 점검하고자 하였습니다. 성경을 따라서 권징도 실시하였습니다. 교인들에게 자기점검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의 교회가 사회의 귀감이 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주체가 된 소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우리들의 지도자들 중에는, 이런 형식주의자들과 위선자들이 많지는 않습니까? 이들의 결국이 어떠하다고 천로역정은 경고하고 있습니까?

토론문제
1) 이 두 사람이 순례길에 들어선 목적이 무엇입니까(갈5:26)?
2)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 이 곳에 들어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눅13:3)?
3) 지름길로 들어왔다는 것은 편법(위법)을 의미합니다. 이것의 위험성은 무엇입니까(사30:21)?
4) 지름길을 택한 그들의 죄는 무엇입니까(마10:39)?
5) 담을 넘어오는 것이 오래된 관습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어디에 속한 사람들입니까(눅9:23)?
6) 거꾸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유행하는 실용주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방법(불법을 포함)도 정당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목회와 신앙의 길에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어떤 것에 해당됩니까(마7:21~23)?
7) 자신들의 신앙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마23:35)?
8) 종교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에 해당됩니까(갈1:16)?
9) 크리스챤이 자신의 옷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무엇을 깨닫고 있으며, 무엇을 인정하는 것입니까(히2:3)?
10) 크리스챤은 설명하면서 구원과 함께 오는 은덕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1) 결국 형식주의자와 위선자에게는 무엇의 증거가 없습니까? 이들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벧후1:8~9)?
12) 크리스챤의 말을 비웃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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