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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천로역정강해(19):잠자고 있는 세 사람(잠23:34)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1122
잠자고 있는 세 사람
잠23:34
[1부: 크리스챤-깊이 잠든 천박, 나태, 거만과 만나다]
꿈에서 보니 그는 이렇듯 노래를 부르며 계속 걸어가다가 한 언덕 밑에 이르러 세 명의 사나이가 발목에 쇠고랑을 찬 채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 잠자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이름은 ‘천박’(Simple)과 ‘나태’(Sloth)와 ‘거만’(Presumption)이었다.
크리스챤은 그러한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는 세 사람을 깨워야겠다고 마음 먹고는 가까이 다가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여보시오. 밑도 끝도 없는 죽음의 바다 언저리에서 그렇게 자고 있는 것은 마치 배의 돛대 위에서 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잠23:34). 그러니 위험을 피하려거든 어서 일어나 이리로 오시오. 만일 원하신다면 내가 당신들의 쇠고랑을 풀어 드리겠소. 그렇게 잠만 자고 있다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는 자’(벧전5:8)가 오는 날에는 틀림없이 당신들은 그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먹이가 되고 말 것이오.”
이 말을 듣고 잠자던 세 사람은 제각기 크리스챤을 바라보면서 한 마디씩 대꾸하기 시작했다. “난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고 천박이 말하자, 나태는 “난 조금 더 자야 되겠소” 하고 말했고, 거만은 “사람들은 다 제 각각 사는 거요. 공연히 남의 일에 참견 말고 자기 일이나 잘 알아서 하시오”하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그들은 제 각기 도로 누워 잠자기 시작했고 할 수 없이 크리스챤은 가던 길로 다시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위험한 곳에서 자고 있음을 깨우쳐 주려고 일부러 깨워 일으켜 충고해 주고 발목에 단 쇠고랑을 풀어주겠다고까지 하면서 친절을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맙게 생각하기는 커녕 그토록 무뚝뚝하게 반응한 것을 생각하면서 크리스챤은 마음이 평온치가 못했다.
[2부: 크리스티아나일행- 천박, 나태, 거만이 목이 매달려 죽은 것을 보다]
그 다음에 내가 꿈에서 보니, 크리스티아나 일행은 예전에 크리스챤이 여행할 때 천박과 나태와 거만 세 사나이가 누워 자던 곳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세 사람은 철사로 목을 맨 채 길 맞은 편에 매달려 있었다.
이를 본 자비양은 보호자 겸 안내자인 담대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은 누군데 저기 목매달려 있나요?”
담대: “이 세 사람은 질이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순례자가 될 마음이 본디 없었을 뿐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다른 순례자들을 방해하려 했지요. 게으르고 어리석었던 그들은 누구든지 만나는 자마다 꾀어서 자기네들처럼 만들려고 애썼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결국에는 잘 살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지요. 크리스챤이 여기를 지나갈 때 이 사람들은 잠을 자고 있었는데, 당신들이 지나가는 지금에는 목매달려 있군요.”
자비양: “저들의 꾀임에 넘어간 사람들이 있었나요?”
담대: “예, 여러 사람들이 이들로 인해 다른 길로 들어갔지요. 그 중에는 ‘늘보’(Slow-pace)라는 사람이 있지요. 이 외에도, ‘촐랑’(Short-wind), ‘무심’(No-heart), ‘정욕행’(Linger-after-lust), ‘멍청’(Sleepy-head), 그리고 ‘둔녀’(Dull)란 이름의 젊은 여자 한 명도 자기 길에서 벗어나 이들과 한 패가 되었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은 우리 주님을 악평하여 사람들에게 그가 일을 혹독하게 시키는 주인이라고 중상모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대한 악선전도 늘어 놓아 거기가 사람들 말처럼 그리 좋은 곳은 못된다고 떠들어댔지요. 또한 그들은 주님의 종들을 욕하면서, 지극히 훌륭한 종들을 가리켜 바쁜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참견하여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비방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하나님의 떡을 ‘꽁깍지’라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평안을 ‘헛된 환상’이라 하여 순례자들의 여행과 노고를 쓸모없는 짓이라고 말합니다.”
크리스티아나: “어머, 그런 줄 알았으면 저들을 위해 슬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을, 저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군요. 내 생각에 저들의 시체가 이렇게 한 길 가까이에 달려 있어 다른 사람들이 보고 경고를 얻을 수 있으니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들의 죄악상을 쇠기둥이나 놋기둥에 새겨 그들이 나쁜 짓을 하던 여기에 세워 두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다른 악한 자들에게 경고가 되게요.”
담대: “그런게 세워져 있지요. 저 벽으로 좀 더 가까이 가면 보일 것입니다.”
자비양: “가까이 갈 필요는 없어요. 저들은 그냥 매달아 두고 저들의 이름도 썩게 하세요. 그리고 저들의 죄는 영원토록 살아남아 그들을 괴롭히게 하세요. 우리가 여기까지 오기 전에 저들이 목매 달린 것은 큰 은총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들이 우리처럼 연약한 여인들에게 무슨 짓을 했을런지 누가 압니까?”
그리고 나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이제 너희 세 사람은 거기 매달린 채로
작당하여 진리를 거스르는 모든 자들에게
경고의 표가 될지라.
그리고 혹 뒤에 오는 자들 중에
순례자들을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는 자 있거든
이 종말을 보고 두려워하게 하라.
내 영혼아, 저러한 자들을 주의하라
거룩함을 거스르는 자는 다 이러하리라.”
우리는 지금 우리의 주인공이 “장망성”을 떠난 이후의 천로역정 중에서, 두 번째 중요한 단계를 통과했습니다. 첫 번째는 “좁은 문”을 통과한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구원의 언덕”을 통과한 것입니다. “죄의 짐”이 저절로 굴러가 버렸습니다. 이제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가는데, 그 목표는, 바로 “아름다움의 궁전”(the Palace Beautiful)입니다. 천로역정을 읽어갈 때 이 방향과 목표를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이런 저런 사건들과 만나는 사람들의 의미가 중구난방으로 뒤섞여 혼동스러워 집니다. 이러한 방향과 목표를 잘 이해하면, 천로역정 이야기가 보다 저 조직화되어 있고, 질서정연한 신학적 체계가 우화로서 꾸며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두 번째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개인적인 구원와 그 구원의 확신에 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춰 오다가, 이제부터는 그 초점이 개인에게서 공동체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집”은 바로 그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말합니다. 이 공동체에서 그 다음 단계(네번째 단계)로의 순례의 길에도 방향과 목표가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열락의 산”(Delectable Mountains)입니다[“임마누엘의 땅"(Immanuel's Land이라고도 함). 성숙의 단계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시험이 몇가지 남아있는 경지입니다. 이 "열락의 산"에서는 다섯번째 목표인, “쁄라”(Beulah)의 땅을 목표로 삼게 됩니다. 이곳은 지상이긴 하지만 천국인 시온성을 지척에서 볼 수 있으면서 시온성에서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지고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바로 “시온성”인 천국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순례의 과정이나 목표가 아니라, 바로 크리스챤의 삶의 성숙의 정도에 따라서 이르게 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놓고, 천로역정을 읽어가면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이제부터는 그 세 번째 목표인 “아름다운” 교회공동체를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의 길을 쫓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에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잠자고 있는 세 사람들입니다. “천박”(Simple),“나태”(Sloth), “거만”(Presumption) 이들 세 명이었습니다. 구원의 언덕에서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아름다운 궁전”을 향해서 걸어가는 우리의 젊은 주인공 크리스챤은 왜 이런 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아름다운” 교회를 이뤄가는 일에 있어서 첫 번째 부딪히게 되는 사명이 있다면, 이렇게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는 것이요, 둘째는, 이 세 사람들의 특징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뤄가는 일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특징들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고 구원의 언덕에서 죄의 짐을 벗어버리게 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사명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 안에서는 구원의 은혜의 불을 심령 속에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물론, 해석자의 집에서 배웠던 것처럼, 벽 뒤에서 그리스도께서 기름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위험에 처한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그들을 깨워서 위험한 상태에 있음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곧 영혼구령과 전도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이런 영적 부담을 갖게 되고, 그 부담을 덜기 위해서 실제로 전도를 합니다. 물론, 이것은 길거리에 나가서 하는 노방전도나, 멀리 외국으로 가는 선교활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어진 상황과 형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서, 때로는, 입술로, 때로는 선행으로, 때로는 행동으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도인으로서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잠자고 있는 것을 알면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이 각성되기를 바라고 깨어 일어나서 함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뤄가고자 합니다. 만일, 이런 열심히 그 속에 없다면, 자신이 좁은 문을 통과했는가? 곧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하고 의문을 가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도 죄의 짐을 벗어버린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영혼구령의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힘쓰게 됩니다. 이런 태도야 말로, 구원받은 자의 표인 셈입니다.
실은,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이 지금 이렇게 잠자고 있는 세 사람들 중의 한 부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챤이 이들을 만나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이런 사람들의 특징들을 잘 알고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발목에 쇠고랑을 찬 채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 잠자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금 정로인 “좁은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잠자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너무나도 태연하게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 잠입니다. 이들은 세상적인 면에서 본다면, 아주 부지런하고 열심히 생활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 감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잠자고 있는 자들입니다. 죄와 사탄의 족쇄에 매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각각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천박”에 대해서입니다. “천박”은 주인공 크리스챤이 경계하는 말에 “난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습니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마도 세상일에 대해서, 예를 들자면, 주식의 동향, 정치적 향방, 물가의 변동 등에 대해서는 너무나 깊은 지식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일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릅니다. 그래서, “천박”(Simple)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지식이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피상적인 것이고 표피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 내에 있거나 힘을 행사하게 되면, 교회공동체는 세속화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복음사업을 평가하고 세상의 관점에서 교회의 부흥을 평가합니다. 죄와 사탄의 족쇄에 대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영적으로 잠을 자면서 “아름다운” 공동체에 대한 비젼이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있다면, 세상적 공동체에 대한 꿈일 뿐입니다.
둘째는, “나태”에 대해서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합니다. 하지만, “난 조금 더 자야 되겠소”라고 반응합니다. 위험을 절박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어떤 조치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예상하고 기대하지만, 게으릅니다. 내일로 미루고 지금은 좀 더 자야겠다고 합니다. 좀 더 자자고 청합니다. “나태”(Sloth)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은, 구원의 초청을 받고도 차일피일 미루는 사람이요, 믿음이 있는데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아직 죄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한 채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혹은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또한 깨달으면서도 게을러서 미루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워가는데 있어서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일들을 핑계대면서 교회공동체의 사업과 역사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부흥되어야 한다는 필요는 알면서도 자신이 나서서 그 부흥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은 차일피일 미룹니다. 지금 자신의 가정과 자녀의 문제, 사업문제가 바빠서, 영적인 사업과 개선을 위해서는 “난 조금 더 자야 되겠소”라면서 미뤄버립니다.
셋째, “거만”에 대해서입니다. 주인공 크리스챤의 경계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 제각각 사는 거요. 공연히 남의 일에 참견 말고 자기 일이나 잘 알아서 하시오” 합니다. 자기 일이나 잘 하자는 말에는 상당히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의 마음 속에는 자기에게는 문제가 없으니 참견하지 말라는 “거만”(Presumption)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존 번연의 시대보다도 현대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고 안정이 되어 있으니, 그 안정된 생활을 흔들어 놓으려고 하는 어떤 메시지에 대해서 저항감을 갖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공동체에 대한 비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이 없습니다. 자신의 생활에 자족하고,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아주 건강하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묵시가 없어서 방자히 행하”(잠29:18)잠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공동체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궁전”에 이르기 전에 바로 이런 문제점들을 우리 가운데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이 세 사람들의 결국은 2부에서 모두 철사로 목매어 죽임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도 참고해야 할 사항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실체가 다음 사건에서 더욱 분명해 집니다. 과연 어떤 일을 우리의 주인공 크리스챤은 겪게 되는 것일까요?
토론문제
1) 세 사람은 무엇에 매여 있습니까?(잠5:22)
2) 크리스챤이 잠자는 자들을 깨우치고자 했다는 것은 그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을 증거합니까?(행9:20)
3) 종교적으로 무관심한 세 종류의 사람들이 게으른 원인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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