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아나: “옳은 말씀입니다. 주께서 저를 위해 피흘리셨음을 생각할 때 제 마음은 터질 것만 같아요. 아, 사랑의 주여!, 복되신 주여!, 당신이 저를 사셨으니, 저는 당신의 소유입니다. 당신이 제 몸값의 만 배도 더 되는 값을 치러 주셨으니 제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니 제 남편이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 험한 길을 재빨리 달려간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는 나에게 자기와 함께 가자고 설득했지만, 나는 마음이 약하고 삐둘어져 그를 혼자 보냈습니다. 아, 자비심양, 당신의 부모님도 여기 계셨더라면, 그리고 겁쟁이 부인과 바람둥이 마님도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랬으면 틀림없이 그들의 마음도 변화를 받아 겁쟁이 부인의 두려움이 아무리 클지라도 또 바람둥이 마님의 정욕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들이 좋은 순례가자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을 텐데요.”
담대: “당신은 지금 따뜻한 사랑의 감정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지만, 그 감정이 늘 식지 않으리라고 여기십니까? 그리고 이러한 감격은 예수의 피흘리심을 본다고 해서 누구나 다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흘리시는 피가 심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질때, 곁에 서서 이를 보는 사람들 중에는 애곡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를 조롱하는 사람도 있어Ttqmsl다. 그들은 제자가 되는 대신 주님에 대해 마음을 완악하게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딸들이여, 당신들이 이 모든 은혜를 받게 된 원인은 내 말을 진지하게 받고 묵상함으로써 특별한 인상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암탉이 일반적인 부름을 부를 때는 병아리들에게 아무런 먹이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당신들이 감격을 느끼는 것은, 주님의 특별한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
해석자의 집에서 일곱 가지의 가르침을 받은 후에 곧 바로 이르게 되는 곳이 바로 구원의 언덕입니다. 이 사실 자체가 일곱가지 가르침이 구원의 언덕에서 일어나는 일과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천로역정해설자들이 이런 점에 주목하지 못하는 것은 참 이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원의 언덕에서 주인공 크리스챤이 체험하게 되는 일에 대해서도 오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100번이나 천로역정을 읽었다고 하는 스펄존목사 같은 이도 존 번연이 좁은 문을 통과한 후에 구원의 언덕에 이르러서야 죄의 짐이 굴러가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구원경험을 잘못 기술하고 있다고 합니다.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고, 또한 텍스트 자체에서 묘사하고 있는 강조점이나 부연설명들을 참고해야 합니다. 스펄존목사가 천로역정의 2부를 1부와 비교하면서 읽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쉽기만 합니다[2부를 읽고 참고했으면서도 그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면, 존 번연의 신학적 구조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반대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스펄존목사는 존 번연의 전체적인 신학적 구조에 대해서 찬동합니다. 그러니, 의식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해했다고 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존 번연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좁은 문에서 문을 열어준 ‘도움’이란 인물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이 점도 분명히 강조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챤은 좁은 문에서 분명히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구원의 언덕에서도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 만남의 의미가 다릅니다. 천로역정에는 그 두 가지 만남의 차이를 용서의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곧, 좁은 문에서의 용서는 ‘말(약속)에 의한 용서’입니다. 곧 죄사함을 약속하겠다는 말씀으로 용서를 미리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법적 선언으로서의 용서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가 없다는 선언이지요. 곧 칭의의 선언을 말합니다[주인공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이런 칭의사건은 장망성을 떠난 직후 ‘크리스챤’이라고 이름지워진 순간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좁은 문’에 들어섬으로 인하여, 그 칭의가 확증적으로 선포됩니다. 이런 면에서 크리스챤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경험했고 맛보았습니다].

두 번째 용서는 어떤 것입니까? 2부에서 문지기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께서는 크리스티아나에게 설명하기를, “두번 째 용서는 곧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동산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구원의 동산에서 담대의 입을 통해서, 존 번연이 설명하는 것은, “행위를 통한 용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해석자(성령)의 집에서 가르치고 있는 일곱 가지 교훈의 핵심입니다. 그 핵심을 2부에서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행위로 인하여 주어지는 용서인데, 칭의적인 용서만 아니라, 보다 더 본질적인 온전한 실제적인 용서입니다. 칭의적 용서는 법정적입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행위는, 법정적이고 선언적인 것이 아니라, 그런 용서를 받는 사람 안에서 실제의 변화가 일어나는 그런 용서입니다[이런 용서의 차이들을 Haslam 같은 이는, 좁은 문에서의 용서는 sins를 용서하는 것이고, 이곳에서의 용서는 Sin 자체에 대한 용서라고 설명합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주님을 만나는 것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의 차이로도 설명이 가능하겠습니다. 물론 이런 차이는 개념적인 차이이지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상의 차이를 두고 이런 것들을 경험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차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많은 경우 현실입니다]. 이런 차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존 번연은, 2부의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한 person 이심과 두 개의 natures를 가지심으로 인하여, 의를 행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신데도 완벽하게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를 완성하신 분이심을 설명하고, 그래서, 죄인들에게 당신의 의를 나눠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짓는 존재이고 넘어지고 실패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행함과 공로로 인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의로움(칭의적인 것만 아니라, 실제적인 의)을 깨닫고 또한 받아들이게 될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죄와 허물로부터의 참된 해방과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인 구원의 동산에서 경험하게 되는 죄의 짐이 굴러가게 되는 체험인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을 따라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우리의 주인공은 곧 바로 “구원의 언덕”에 이르게 됩니다. 그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양 옆으로는 “높은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이 언덕에서의 체험은, 제 삼자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언덕에 오르면서 크리스챤은, “무척 고통스러워 하는 것 같”습니다. 이 결정적인 사건을 바로 눈앞에 두고 힘쓰고 애쓰는 모습입니다. 아직 무엇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십자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본질, 그 핵심, 그 정곡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고, 하나님의 계시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또한 바로 내가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그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챤은 “쉬지 않고 계속 뛰어가서” 마침내 하나의 십자가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의 십자가가 아니고, “그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보고 그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막 올라가려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기도한 것도 아닙니다. 실은 “쉬지 않고 계속 뛰어가”는 순간에도 기도했을 것입니다. 죄를 내려 놓으려고 힘쓰지도 않았습니다. 실은, 순간순간마다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존 번연은, 이 순간에 주인공 크리스챤이 특별하게 무슨 일을 하였다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단지, “막 올라가려는 순간 그의 어깨로부터 짐이 풀어져 등에서 벗겨지더니 계속 미끄러져 내려와 마침내 무덤의 입구에서 그 속으로 굴러 떨어져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순간”입니다. 십자가를 참으로 이해하고 깨닫게 되는 “순간”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영혼 속에 환하게 비춰지는 “순간”, 그 한 순간에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그 죄의 짐이 어디로 굴러들어갔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묻히셨던 그 무덤인데, 빈무덤입니다. 그 빈무덤이 죄의 짐을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집어 삼키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생명이 왕노릇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소망하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스가랴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우리가 찌른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슥12:10). 그리하여 진정으로 애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위적인 애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심령에 부어주시는 애통으로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분명하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죄의 저주만 아니라(이것은 좁은 문에서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이제는 죄의 능력까지도 이기게 되는 생명의 왕노릇을 체험하게 됩니다(롬5:17). 이러할 때에 우리는 이제 유용한(useful) 일꾼이 됩니다. 자신의 무익함(unprofitableness) 을 인정하면서도 유용하게 쓰임받는 일꾼이 됩니다. 천로역정의 이제부터의 순례의 길은 바로 이런 삶을 위해서 구비되는 길입니다. 유용한 일꾼으로의 구비됨은 바로 “아름다움의 집”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움의 집”에서 구비되기 위해서 어떤 훈련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이 집에 이르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일들을 통해서 존 번연은 우리들에게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유용한 일꾼으로 구비되기를 기원합니다.
죄사함의 은혜에 감격하여 울고 또한 기뻐하고 있는 주인공 크리스챤에게 하늘로부터 광채를 발하는 세 사람이 나타나서는, 첫째 사람은, 사죄를 확신시켜주고, 둘째 사람은, 누더기옷을 벗겨주고 깨끗한 새 옷을 갈아입혀 주고, 세번째 사람은, 이마에 표를 달아 주면서 봉인된 두루마리 한 개를 크리스챤에게 줍니다. 이것들은 앞으로 순례길에 너무나도 유용하게 사용될 것들입니다. 어떻게 사용될까요?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토론문제
1) 왕의 대로는 누가 가는 길인가? (영어원문에는 highway라고 되어 있는데, 김홍만목사는 이것을 ‘왕의 대로’라고 번역한다. 유성덕씨는 ‘올라가고자 하는 길’이라고 번역하였다)
2) 왕의 대로에 울타리가 쳐져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사26:1)
3) 크리스챤이 달려 올라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십자가 체험은 어떤 체험입니까? 왜 우리에게 중요합니까?(딛2:14)
5) 크리스챤의 눈물은 어떤 눈물입니까?(슥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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