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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천로역정강해(15):해석자의 집(5)-용감한 사나이(제자도)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1086
용감한 사나이-제자도
마태복음11:12
해석자가 또 다시 크리스챤의 손을 잡고 아주 웅장한 궁전이 서 있는, 보기에도 아름답고 즐거운 장소로 그를 안내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것을 본 크리스챤은 매우 기뻐하였고 그는 또한 멋진 궁전 안에서 금빛 옷을 걸친 사람들이 거닐고 있는 것을 보았다. 크리스챤이 “우리도 저 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해석자는 크리스챤을 데리고 그 궁전의 문간까지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그 문간에는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으나 아무도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문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책상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앞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책 한 권과 잉크병을 놓고 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입구에는 또한 갑옷을 입은 병정들이 지켜 서서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될 수 있는 대로 해치고 방해하려고 단단히 결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크리스챤은 뜻밖의 광경에 매우 놀랐으나 말없이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장하고 있는 병정들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질린 대부분의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고 있을 때 결심을 단단히 한 듯한 사나이 하나가 성큼성큼 명단을 적는 사람에게도 걸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 이름을 적어주시오.” 말을 마치자 그는 검을 빼어들고 머리 위에 투구를 쓰고는 무장한 병정들이 지키고 있는 문간을 향해 용감하게 달려갔다.
문가에 서 있던 병정들은 맹렬한 힘으로 달려 들었으나 그 사나이는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고 용감하게 달려들어 마구 칼을 휘두르며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얼마 후 그 사나이 자신이나 밀어내려는 병사들이나 모두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 사나이는 계속 길을 트며 앞으로 나아가 마침내 궁전 앞에 다다르게 되자 궁전 안에서 혹은 궁전 위에서 거닐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즐거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어오라, 들어오라.
영원한 영광을 그대에게 주리라.
그리하여 그 사나이가 궁전 안으로 들어서자 그에게도 역시 금빛 옷을 입혀 주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크리스챤은 미소를 지으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이제 다시 길을 떠났으면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해석자는 “아닙니다. 내가 좀 더 보여 드릴 것이 있으니 마저 보시고 길을 떠나십시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해석자의 집에서 가르쳐지는 교훈들을 살펴보는 중에 우리가 반드시 잊어버리지 않아야 할 시각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교훈들이 우리 주인공 크리스챤의 등에 있는 “죄의 짐”이 벗겨지는데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교훈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곧 이르게 될 “구원의 동산”에서 있는 부활의 십자가 앞에서 죄의 짐이 굴러가는 것과 관계시켜 묵상하면 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앞의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교리였습니다. 은혜를 주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고, 마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베푸신 자들을 세상끝날까지 보존하시는 분도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마귀는 이 은혜의 불길을 많은 물을 부어서 끄고자 하나 꺼지지 않습니다. 그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이고, 다른 말로 하자면, “은혜”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과 공로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이것을 강조하게 되면 반드시 따라오게 되는 질문이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잠잠히 있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해석자의 집에서의 다섯 번째 교훈은 바로 이런 질문과 관계됩니다. 곧,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은혜로 우리의 죄짐이 전적으로 해결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책임과 노력이 전적으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이해하기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언듯 보면, 로마천주교회에서 주장하는 신인협동설(synergism)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존번연의 칼빈주의에서는 철저하게 신단독설(monergism)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책임과 노력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노력과 행위 자체가 바로 신 곧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인하여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광과 찬양에 인간에게 전혀 돌려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했던 종이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했다고 그 한 것에 대한 보상이나 상급을 전혀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배경으로 해서, 존 번연의 천로역정 이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해석자가 주인공 크리스챤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아주 웅장한 궁전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국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궁전의 바로 문앞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대고 있습니다.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책상이 하나 있고 들어가려는 사람의 이름을 적으려고 하는데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갑옷을 입은 병정들이 못들어가게 단단히 방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주저주저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한 사람이 선뜻 나서서 자기 이름을 적어달라고 하고는, 그의 검을 빼어들고서 그 갑옷으로 무장한 병정들과 대결해서 치열하게 싸웁니다. 상호간에 큰 상처가 날 정도였지만 이 사람은 그래도 물러나지 않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제치면서 왕궁의 문간에까지 도달하지요. 궁전문 앞에 다다르자 궁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성안의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들어오라, 들어오라.영원한 영광을 그대에게 주리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궁전 안에 들어서자 그 사람에게 금빛 옷을 입혀줍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주인공 크리스챤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다고 합니다.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쉬운 내용인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과 관련해서 하신 말씀 중에,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침노”라는 말이 좀 어감이 그렇습니다만, 이 어감이 강하게 한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천국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힘쓰고 애써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못하도록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원에 이르고, 또한 구원의 확신이나 성화의 모든 과정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시작하신 사람의 마음 속에 소원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일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소원을 주시지 않으면 죽은 사람의 마음 속에 소원이란 것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먼저 깨어 일어나고 그 일어난 자의 마음 속에 죄가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일어나게 되고 그 관심으로 열심히 구원을 추구하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도 그렇고, 성화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시고 반응을 일으키시지만, 그 반응이 일어나는 자의 마음 속에서는 스스로 자원하는 영과 심령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반응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천국의 궁전에 들어가게 될 때 일어나는 일, 곧 “침노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일은 구원의 시작단계에서만 아니라,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곧 구원을 받은 사람의 제자로서의 삶 가운데에 계속 이렇게 제자의 마음 속에 소원이 일어나고 그 소원을 열심히 이루고자 하는 열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표이고, 증거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가를 살펴보고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구나, 하나님의 자녀임과 백성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런 확신 속에서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죄의 짐이 굴러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고 하신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자의 삶의 증거, 삶을 통한 열매야말로 가장 분명한 구원받은 자의 표시입니다.
이와 대조되는 사람들의 특징이 어떠합니까? 궁전으로 들어가고 싶어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웅성웅성합니다. 하지만, 주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갑옷으로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서 상처를 당하고 혹시 죽을지 모르겠다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곧 희생하고 손해보려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혹시 그런 생각까지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지 못합니다. 생각은 있어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생각은, 솔직히 구원받고자 하는 소원이라고 할 수 없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니고, 단순한 종교적 관심이나 소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그 마음을 주셨다면, 반드시, 용감하게 궁전 문을 향해서 돌진하게 됩니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그 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사람 안에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이름을 명부에 올립니다. 단호하게 자신의 결심을 표명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기를 단호하게 결심합니다. 제자의 삶은 이런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침노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이런 삶의 열매를 통해서, “죄의 짐”이 굴러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죄의 능력을 이기는 예수생명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또한 그 결심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거룩한 열심히 있습니다. 피를 흘리기까지 하면서 싸우는 싸움에도 지치지 않습니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미리 맛본 사람, 이 사람은 좁은 문을 이미 통과하면서 천국의 기쁨을 조금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용감한 사람이 군사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을 통해서, 제자의 삶은, 일종의 전투임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실은, “구원의 언덕”에서 “죄의 짐”이 굴러간 이후, “아름다운 집”을 들러서는 우리의 주인공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서의 옷을 받아서 무장한 군병이 됩니다. 그리고, 사탄과의 싸움, 세상과의 싸움, 그리고 육신과의 싸움,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싸움을 치루게 됩니다. 그 싸움을 위해서라도 어깨 위의 죄의 짐은 벗겨져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해석자의 집에서, 아직 배워야 할 교훈이 두 가지 더 남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참 놀라운 훈이 남았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챤이 이제는 되었구나 하고 길을 떠날려고 하는데 해석자가 붙잡고 더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바로 그 교훈들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의 짐을 결정적으로 벗어버리게 할 것들입니다.
토론문제
1) 오늘날 제자에 대해서 성경에서 벗어난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11장26절과 고린도전서1장2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 제자, 성도가 같은 의미의 말들입니다. 그런데 제자와 성도를 은혜의 등급이 다른 것처럼 나누어서 성도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의미로 사용하고, 제자는 훈련을 받아서 더 높은 은혜의 단계에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를 제자로 만든다”라는 표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부류는 웨슬리안의 완전주의신학에 상당히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며, 때로는 구원의 은혜가 없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를 위험성이 있습니다. 존 번연은 이 부분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성도이고 제자임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이들은 어떤 상태에 있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까?(계19:8~9)
3) 문 앞에서 서성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눅14:25)
4) 이렇게 용감한 사람이 희생이 따르더라도 돌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마13:45~46; 마11:12)
5) 그에게 있는 은혜는 어떤 종류입니까?(눅14:26~35)
6) 그렇다면 용감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입니까?(약2:14, 22; 요일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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