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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천로역정강해(13):해석자의 집(3): 욕망과 인내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1248
욕망과 인내
고후4:18
그때 나는 꿈 속에서 해석자가 크리스챤의 손을 잡고 어떤 작은 방으로 인도해 가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는 두 소년이 각기 의자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 중 나이가 많은 소년의 이름은 욕망이고 나이 어린 소년의 이름은 인내였다. 욕망은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으나 인내는 매우 조용하고 침착한 표정이었다. “욕망이 불만을 품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하고 크리스챤이 묻자, 해석자는 “그 소년들의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선물들을 그들에게 갖다 줄테니 내년 초까지만 기다리라고 했지요. 그런데 욕망은 지금 당장 달라고 하고 인내는 기꺼이 기다리고 있느 중입니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보물 한 자루를 짊어지고 욕망에게로 다가와서 그의 발 아래 쏟아놓는 것을 나는 보았다. 욕망은 그것을 집어들어 제멋대로 낭비하고 즐기면서 인내를 비웃고 조롱했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 얼마되지 않아서 욕망은 모든 것을 낭비해 버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 조각들뿐이었다.
크리스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해석자: “이 두 소년은 상징적인 인물들입니다. 욕망은 현세의 인간들을 상징하고 인내는 내세의 인간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방금 본 것처럼 욕망은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모든 것들을 갖고자 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사람들도 지금 당장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고자 하며, 내년까지, 즉 미래의 세상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손에 잡은 한 마리의 새가 숲에 있는 두 마리의 새보다 낫다”는 속담이 장차 다가올 세상의 복락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보다 그들에게는 더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도 보다시피 욕망은 모든 것을 순식간에 낭비해 버리고 겨우 누더기 조각들 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의 물질에만 눈이 어두운 모든 사람들이 현세의 종말이 다가왔을 때 결국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크리스챤: “여러 가지 이유로 인내가 가장 훌륭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 깨달았습니다. 첫째로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기다릴 줄 아는 태도가 지혜로우며, 둘째로 욕망이 누더기 밖에는 남은 게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니까요.”
해석자: “아니,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습니다. 즉 다가올 세상의 영광은 영원불멸의 것이지만 현세의 허황한 영광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욕망이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먼저 가졌다고 해서 인내를 비웃을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나중에 좋은 것들을 차지하게 되는 인내가 욕망을 비웃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좋은 것을 차지하는 사라은 결국 나중에 올 사람에게 자리를 남겨 주어야만 하지만, 나중에 차지할 사람은 다가올 좋은 것들에 대한 희망이 있고 마침내 차지하게 되었을 때는 뒤에 올 사람이 없으므로 아무에게도 넘겨 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처음에 자기 몫을 차지하는 사람은 그것을 소비할 시간이 많아서 결국 남는게 하나도 없게 되지만 나중에 차지하는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보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어느 부자에게 하신 말씀이 있지요. ‘너는 살았을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16:25).
크리스챤: “이제 저는 눈 앞에 보이는 이승의 것들을 탐내는 것보다는 다가올 세상의 복락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해석자: “당신은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목전에 보이는 것들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고후4:18)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현세의 욕망과 육욕은 서로 지극히 가까운 사이이므로 인간은 금세 친밀하게 되지만 저승의 복락과 육욕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늘 서먹서먹하고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앞 부분에서는 해석자가 율법과 복음을 청소하는 두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을 들을 때에 잊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두 우리의 주인공의 등에 있는 “죄의 짐”을 어떻게 하면 벗어버리게 되느냐와 관계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천로역정의 이 부분에서 가르쳐지는 교훈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죄의 짐을 어떻게 벗어버릴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앞에서 가르쳐진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가르침과 오늘 이 부분에서 가르쳐지는 “욕망과 인내”에 대한 교훈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신학적으로 너무나도 탁월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의 핵심이 바로 욕망이요,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인내라는 것입니다. 첫눈에는 이것이 엉뚱하다고 여겨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율법의 핵심은, 바로 십계명이고,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에는 바로 욕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욕망의 문제가 율법의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바로 이 욕망의 문제에서 내가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 대한 강조는 칼빈이나 청교도들의 십계명 강해를 살펴보게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강조점입니다. 이 점을 존 번연이 분명히 의식한 것 같습니다. 특별히 죄의 짐을 어떻게 벗겨버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욕망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번연은 이 욕망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욕망”이라고 불려지는 어린아이는 불만에 가득차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내년초까지 기다리라고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내년초까지 참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을 가득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욕망의 현실입니다.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도 모르고, 언제나 남을 향해서 비난을 퍼붓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욕망이 당장 이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기 탓이 아니라, 남의 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자연인은 욕망적 존재입니다. 무언가를 항상 탐하고 살아갑니다. 남의 손에 떡이 더 커보이고, 이웃집의 잔디가 더 푸르게 보입니다. 남의 것이 항상 내 것보다 좋고,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합니다. 이 탐욕, 이 욕망은, 첫여자가 뱀의 유혹에 빠졌던 원인이기도 하고, 그 이후 모든 인류의 존재의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금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금령으로 인하여 그 욕망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고 더 불일 듯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욕망의 실체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모든 것을 자기 안에다 집어 넣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자신의 소유물이 되게 합니다. “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자칫 이 하나님을 하나의 소유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탐욕의 정체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죄의 짐이 벗겨지려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겠습니까? 놀랍게도, 존 번연은 이 다음에 주어지는 해석자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다음 번에 살펴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곧 “인내”라는 아이의 행동과 그 성품에 대해서입니다. 이것은 “죄의 짐”을 벗어버린 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욕망의 문제가 해결된 모습입니다. 욕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제시하기 전에, 그 해결된 모습이 어떠하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곧, 아버지가 내년초까지 참으라고 하였을 때 그것을 기다리고 인내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죄의 짐”이 벗겨진 자의 가장 일차적인 특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내년”이라는 것이 단순히 올해 다음에 오게 될 내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석자가 설명하는 것은, 이 “내년”은 “다음 세상”, 곧 “내세”를 말합니다. 이것은 죄의 짐을 해결한 자가 해결하지 못한 자보다 인내심이 더 강하다 하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실상, 이 세상에서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인내심”이 너무나 강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강한 인내심으로 “이 세상의 것”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욕망의 변형된 모습”일 뿐인 것입니다. 참된 인내는 단순히 이 세상의 것을 “내년”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세”에 주어질 줄 알고 참고 인내하는 그런 인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인내는, 이 세상의 것을 사용하는데도 낭비하지 않고 절제할 줄 알게 합니다. “죄의 짐”을 벗겨버린 자는, 인내하여 기어이 얻게 된 것으로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내는 또 다시 탐욕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겠습니까? 이웃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가난한 자들, 자신보다 더 연약한 자들, 교회와 하나님의 선한 사업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래서, 비난과 조롱을 받습니다. 이때에 인내라는 아이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잠잠히 그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짐을 벗어버린 자의 여유이고 또한 담대함입니다. 여기에서 “인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라 함이 분명히 확인될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다른 여러 용어들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죄의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곧 “욕망”으로 인한 “죄의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바로 이런 “인내”의 성품들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죄의 짐”을 벗어버리기 힘듭니다.
우리는 “욕망”의 모습을 통해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마침내 자신의 욕망하던 것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물 한 자루를 이 아이 앞에서 가져다 붓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모든 것을 순식간에 낭비해 버리고 겨우 누더기 조각들 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순간적인 만족, 이 세상의 것에 대한 만족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 사람의 결국이 어떠합니까? “겨우 누더기 조각들 밖에 남은 것이 없”게 됩니다. 이것은 멸망에 이르게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존 번연이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 강하게 표현하셨습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막9:49). 또한 그런 불길 가운데서 영원토록 이를 갈리라고도 하셨습니다. 후회하여도 어쩔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지금까지의 교훈들을 우리의 주인공 크리스챤과 해석자가 함께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기다릴 줄 아는 태도가 지혜로우며, 둘째로 욕망이 누더기 밖에는 남은 게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이런 말을 받아서 해석자가 말합니다. “아니,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습니다. 즉 다가올 세상의 영광은 영원불멸의 것이지만 현세의 허황한 영광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욕망이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먼저 가졌다고 해서 인내를 비웃을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나중에 좋은 것들을 차지하게 되는 인내가 욕망을 비웃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웃고 즐기는 것보다, 오는 세상에서 웃고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
토론문제
1) 정욕의 외적 모습은 어떠합니까?(빌4:11)
2) 조급함은 어떤 영적 상태를 말합니까?(딤후3:4)
3) 모든 것을 낭비하는 것은 어떤 삶을 의미합니까?(눅15:13)
4) 이 세상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영적 상태입니까?(사5:8~12)
5) 인내가 복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 갈5:22~23, 나. 히10:36~39; 12:16)
6) 참된 백성은 나중에 어떤 것들을 받습니까?(룻3:10;욥8:7; 마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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