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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천로역정강해(10): 좁은 문(마7:7-14)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1237
 
좁은 문
마태복음7:7~14
오늘 함께 봉독한 “좁은 문”에 대한 교훈은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교훈(7~12절) 다음에 나옵니다.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두드려야 한다는 것입니까? “좁은 문”과 “좁은 길”입니다. 이 교훈 바로 뒤에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는 것입니다(15절). 왜 그럴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지 않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같이 이런 “좁은 문”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고, 대신 은근히 “넓은 문”을 가르키면서 유혹하는 가르침들이 많은 시대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어떤 문을 통과하였습니까?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바로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이요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좁은 문”을 통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입니까?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우리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정확한 답변을 우리들에게 해주기 때문입니다(천로역정본문 읽기).
천로역정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도 우리가 쉽게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장망성을 떠나서 반드시 ‘실망의 수렁’이나 ‘도덕의 마을’을 거쳐야만, 이 ‘좁은 문’에 이르게 된다는 식의 오해 말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존번연이 의도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장망성을 떠나서 어떤 사람들은 ‘실망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고, 또한 도덕마을로 가려는 길을 거칠 필요도 없습니다. 천로역정의 2부에서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더 간단히 말씀드리면, 장망성을 떠나자마다 곧 “좁은 문”에 이르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상, 가족과 친지, 친구들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좁은 문”입니다. 그런데, 천로역정에서 이런 사건들(실망의 수렁, 도덕마을등)을 구성해 놓은 것은, 겉으로는 장망성을 떠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는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되돌아 가 버리거나, 세상과 타협해서 복음을 변질시키버립니다. 이들은 장망성을 떠났지만, 실상은 여전히 장망성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외양은 종교적이지만, 진정한 순례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주인공 크리스챤은, 겉으로만 장망성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 마음도 장망성을 떠났습니다. 실망의 수렁에 빠졌을 때도, 허우적거리면서도 좁은 문쪽을 향해서 허우적거렸습니다. 장망성에는 안돌아가겠다는 것이 그 마음 속 깊은 곳에까지 심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세속현자의 유혹을 받아서 다른 길로 갔을 때 그것을 지적해 주는 사람에 대해서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솔직한 심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이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약속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미 회심한 사람이요, 중생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외적인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것, “좁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원리적으로는 “좁은 문”을 들어온 사람이지만, 장망성을 떠났다면, 그 장망성을 떠났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실망 가운데서도 낙망치 않고, 또한 복음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복음대로 믿고 따라 살아가겠노라는 그 마음의 결심이 진정한 것이라면 그것이 진정한 것임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우리가 두드려야 합니까? 바로 좁은 문, 이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관념적으로,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실제 생활 속에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훈뒤에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오게 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못된 나무도 열매를 맺기는 합니다. 하지만,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넓은 길로 다니면서 맺는 인간의 열매인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지 생각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오늘 천로역정을 보면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불루온이 쏘아대는 화살입니다. 2부에서는 아불루온집의 개가 험상궂게 짖어대는 소리 때문에 크리스챤의 아내, 크리스티아나와 자녀들이 겁을 먹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마귀의 장난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이미 이런 방해와 유혹을 끊어버리고 이미 “좁은 문”을 통과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직 들어서지 못하신 분 계십니까? 실은, 자신의 힘으로만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좁은 문을 지키는 “선의씨”라는 분이 획 당겨서 좁은 문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좁은 문까지 인도하셨고, 주저할 때에 잡아 당겨서 좁은 문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들어가야 할 좁은 문은 무엇이겠습니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만, 주일성수를 예를 들어 봅시다. 구약의 안식일은 율법이니까 신약시대에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아도 신약시대에는 융통성을 가지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법을 창조시에 주셨고, 십계명에 포함시켜 놓으셨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물론 이 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그 구원의 의미를 가장 잘 압축해놓은 것이 안식의 날, 우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 모든 일을 내려놓고,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면서 쉬는 날입니다.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날에 무엇을 해도 된다 안된다고 결의론적으로 말하면(예를 들어서, 주일예배 후에 식당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티브이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 등) 율법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 시대에도 좁은 문을 들어가는 교회로서 유명해지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인공 크리스챤의 죄의 짐이 어디에서 벗겨지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왜 “좁은 문”을 들어서자마자 벗겨지지 않을까요? 이것도 비유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면 만나게 되는 순간에 바로 죄의 짐이 벗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지금 신앙생활의 초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더 배워야 했습니다. 특별히 죄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크리스챤의 삶에 대해서 더 배워야 했습니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이 단계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만났지만,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서는 아직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의 저주와 죄책에서 면제는 되어도, 죄의 능력과 권능에서는 놓여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체험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은, 그래서, “해석자의 집”에 들어가서 복음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이해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죄들을 씻음받는 것만 아니라, 죄 자체에 대해서 알아야 했고, 그리하여 죄책으로부터의 용서만 아니라, 죄의 능력에서 해방되는 것도 체험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아직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좁은 문을 통과하셨습니까? 그리고 나선 또한 “구원의 동산”에 이르셔서 죄의 짐이 벗겨지셨습니까? 이제 몇 주간 이 문제에 집중해서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죄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시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