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자는 말을 마치자 자신이 한 말의 진실성을 증명해 달라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호소했다. 그러자 크리스챤이 그 밑에 서 있던 산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서 커다란 불길이 솟아올라 크리스챤의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온 몸이 쭈뼛해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이제 죽을 수 밖에 구원받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크리스챤은 슬픈 목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는 세속 현자와 만났던 때를 저주하면서 그의 거짓된 충고에 쉽사리 넘어가 버린 자기 자신을 바보들 중에 바보라고 수천 번 외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망에서 우리 나오는 그 현자의 충고에 현혹되어 바른 길을 저버린 자신의 행동에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소 진정이 되었을 때 크리스챤은 다시 전도자에게로 다가가서 다음과 같이 간절한 호소를 하였다.
크리스챤: “전도자님,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게도 아직 희망이 남아 있습니까? 지금이라도 다시 바른 길로 되돌아가서 그 좁은 문으로 갈 수는 없을까요? 아니면 이 어리석은 실수로 인하여 구원의 희망을 잃은 채 부끄러운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가야만 하나요? 나는 지금 그 세속 현자의 거짓된 충고에 현혹되어 버린 것을 몹시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저의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전도자: “당신은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실로 당신의 죄는 매우 큽니다. 바르고 선한 길을 저버린 것이 그 하나요, 금지된 길로 걸어간 것이 또 하나의 죄입니다. 그러나 그 문지기는 사람들에게 선의와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므로 당신을 받아줄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옆길로 빗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하십시오. 만일 주의 진노가 조금이라도 발한다면 당신이 길에서 망할까 두렵습니다”(시2:12).
그러자 크리스챤은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했고 전도자는 그에게 키스를 해 주며 어서 서둘러 하나님을 향해 떠나라고 미소로써 격려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크리스챤은 서둘러 다기 걷기 시작했다. 도중에 만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고 혹 누가 그에게 말을 걸어와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금지된 구역을 걷고 있는 사람처럼 서둘러 걸었으며 세속 현자의 꾀임에 빠져 쉽사리 팽개쳐 버렸던 바른 길로 다시 들어서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유성덕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2009
실망의 수렁을 빠져나와서 좁은 문을 향해서 가던 크리스챤이 그만 또 다른 유혹에 빠진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세속현자(이세현씨)의 꾀임에 넘어가, 당장 등의 짐을 벗겨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에 구미가 당겼던 것입니다. 복음의 좁은 문을 버리고 세상의 넓은 문으로 유혹하는 것은, 좁은 문을 향해 가다가 실망을 한 두 번 겪으면서 쉬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생활한다는 것이 꼭 그렇게 편협하게 할 것 있나? 불편한 것보다는 좀 더 합리적이고 보다 세상사람들에게 설득력있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주장은 귀에 솔깃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 일리에 귀담아 듣는 것도 필요합니다. 좁은 문을 들어간다는 것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 편협한 주장을 고집하고, 일부러 불가능할 것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향해서 가는 것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그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인이 자신을 보면서, 세상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그 눈치에 따라서, 복음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경향은 언제나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갈라디아사람들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도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망하는 모습은, 우리 현대교회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낯섭니다. 하지만, 천로역정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익숙한 모습입니다. 바울사도의 모습과 오늘 천로역정의 본문에 나오는 전도자의 모습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냉정하게 우리의 주인공 크리스챤의 잘못을 하나 하나 집어주면서 책망과 경계를 하고, 그리고 회개의 증거를 분명히 보여준다고 여겨질 때에 강력하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들의 모델이 되는 바울사도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교회의 목회자들과 전도인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지적하기를 두려워하고, 혹은 잘못한 것을 알고 상담하러 온 사람에게 위로와 평안을 말하기에 급급한 상황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만도, 천로역정과 비교하면, 현대교회는 분명히 성경에서 더 멀어져 있음에 분명합니다.

(이런 점을 유의하시면서 천로역정 오늘 본문을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본문 자체가 하나의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챤이 세속현자를 통해서 받은 잘못된 교훈을 몇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까?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한 점입니다. 바른 길이 어떤 길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13:24)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길입니다. 이 바른 길, 좁은 문을 향해 가는 길을 벗어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 곧 십자가의 짐을 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둘째의 잘못이지요. 세현씨가 크리스챤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꺼려하도록 유도한 점”입니다. 갈라디아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세 번째 잘못은, 그 교훈이 크리스챤으로 하여금 사망의 길을 걸어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각각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무엇이 잘못인가를 깨달아야 했었던 것입니다. 바른 길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지 못하고, 어떤 위험을 갖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 이런 일을 재발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천로역정의 전도자는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분명히 인상깊게 새겨두어야 할 점은, 번연의 전도자는, “혐오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혐오”라는 말은 아주 강한 말입니다. 우리의 본성적 감정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정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것, 그렇게 유혹하는 교훈이나, 그런 유혹에 넘어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혐오”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특별한 역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말의 진실성을 증명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런 ‘혐오감’을 심어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만 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이런 점을 기억하고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자는 이렇게 죄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고 경계하는 것에 그치지 않지요? 이런 경계와 책망에 대해서 유혹에 넘어갔던 크리스챤은 크게 잘못된 점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이제 죽을 수 밖에 구원받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크리스챤은 슬픈 목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는 세속현자와 만났을 때를 저주하면서 그의 거짓된 충고에 쉽사리 넘어가 버린 자기 자신을 바보들 중에 바보라로 수천 번 외치는 것이었다.그는 또한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망에서 우러나오는 그 현자의 충고에 현혹되어 바른 길을 저버린 자신의 행동에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런 회개의 눈물 후에 “저의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하면서 그 가능성에 대해서 간곡히 전도자에게 질문을 합니다. 전도자는 크리스챤이 참된 회개의 증거를 보이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한 번 더 주의를 주면서도 위로하고 격려하기 시작합니다. 격려한다고 해서, 이제는 편한 길로 가도 괜챦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지요. 곧 바로 지금부터 진짜로 ‘좁은 문’을 향해서 걸어가십시오 합니다. 옆길로 빗나가서 “주의 진노가 조금이라도 발한다면 당신이 길에서 망할까 두렵습니다”고 합니다.
금 크리스챤은 장망성을 떠났습니다. 그것으로 이미 “크리스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크리스챤이 되었다”는 "증거"가 여러 곳에서 보여지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물론, “좁은 문”을 통과한다고 해서 바로 “천성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많은 시험과 환란과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진정한 크리스챤이 되었다는 분명한 표와 증거를 가지게 된 뒤의 싸움입니다. 아직은, 그 몇가지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인생에, 장망성을 떠나왔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습니까? 분명히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수요일에 수요예배에 참석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질문을 드립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셨습니까? 이게 오늘 본문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아직 통과하지 않으셨다면, 전도자에게 책망을 받았던 크리스챤처럼, 바울사도에게 책망을 받았던 갈라디아교회사람들처럼 책망을 받으셔야 합니다. 왜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실망의 수렁”에 빠져 계시는 것입니까? 그래서 주저주저하십니까? 아니면 “세속현자”의 유혹에 빠져서, 도덕마을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오늘 천로역정을 통해서 음미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망의 길입니다. 장망성을 떠났으면서도, 사망의 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천성을 향해서 가려면 반드시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라는 이름은 있을 지 몰라도 변질된 복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사도가 갈라디아교회 사람들에게 “거짓복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천사들이라 하더라도 이 거짓복음을 전한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9). “도중에 만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고 혹 누가 그에게 말을 걸어와도 대답조차 하지 않”고 좁은 문을 향해서 걸어갈 수 있기 바랍니다. 이미 “좁은 문”을 통과하신 분들은, 그렇지 못한 분들에게 이렇게 권면할 수 있기 바랍니다. “좁은 문”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토론문제
1) 세상-지혜자는 20세기의 자유주의 신학과 같습니다. 구원을 어떻게 이해합니까?(요일4:5;갈6:12).
2) 세상-지혜자의 정체는 무엇입니까?(벧후2:14)
3) 전도자는 크리스챤에게 회개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들입니까?(렘31:19;고후7:11)
4) 전도자가 책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갈3:1~3)
5) 율법을 지켜서 혹은 도덕적으로 스스로 구원하려는 노력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가. 롬7:9~11, 나.롬2:21~23.
6) 거짓 선지자의 목적은 무엇입니까?(마7:15)
7) 전도자의 기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히2:4)
8) 전도자의 책망의 효과는 무엇입니까? 또 이것은 무슨 증거입니까?(마5:3~4)
9) 죄에 대해서 결코 간과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창44:16)
10) 전도자의 또 다른 기능은 무엇입니까?(살전2:11)
11) 크리스챤이 책망을 달게 받고 회개한 증거는 무엇입니까?(렘31:21;고후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