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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천로역정강해(5):실망의 수렁에 빠진 순례자들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1340
실망의 수렁에 빠진 순례자들
(딤후3:14~15)
그때 내가 꿈속에서 보니 최고집씨는 되돌아갔고, 크리스챤과 유약한씨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평원을 가고 있었다. 그들을 대화하기 시작했다.
크리스챤: “약한씨, 어떻습니까? 나는 당신이 나와 함께 갈 수 있도록 설득되어서 매우 기쁩니다. 만약 고집씨도 나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압박감을 느꼈다면 그렇게 가볍게 우리를 뒤로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약한: “크리스챤씨, 지금 이곳에는 우리 두 사람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즐길 것인지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해주시오.”
크리스챤: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나는 그것들을 마음으로 더욱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알고 싶어하니, 내 책에서 그것들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유약한: “당신은 책에 있는 말들이 틀림없이 진실이라고 믿습니까?”
크리스챤: “예, 참으로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에 의해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딛1:2).
유약한: “그래요, 그것들은 무엇입니까?”
크리스챤: “영원한 나라가 유업으로 주어질 것이고,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사45:17;요10:27~29).
유약한: “그 밖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크리스챤: “영광의 면류관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예복이 주어질 것인데, 그것은 하늘의 태양과 같이 우리를 빛나게 해 줄 것입니다”(딤후4:8;계3:4;마13:43).
유약한: “이것 참, 기분 좋군요. 그 밖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크리스챤: “그곳에는 더 이상 눈물과 슬픔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주인이신 분이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25:8;계7:17;21:4).
유약한: “우리는 그곳에서 어떤 친구들과 함께 합니까?”
크리스챤: “그곳에서 우리는 스랍들, 그룹들과 함께 있을 것인데, 이런 피조물들은 그들을 쳐다보는 당신의 눈을 압도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우리보다 앞서 그곳에 간 수천, 수만 명의 성도를 만날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사랑스럽고 거룩한 자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운데 행할 것이며, 영원한 용납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그곳에서 황금 면류관을 쓴 장로들과 황금 하프를 가진 거룩한 처녀들을 볼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를 향한 사랑을 품은 것 때문에 세상에 의해 몸이 산산조각 났고, 불 가운데 던져 졌으며, 야수의 밥이 되었고, 바다에 빠졌던 자들을 볼 것인데, 그들 모두는 예복을 입은 것과 같이 불멸의 옷을 입고 있을 것입니다”(사6:2;살전4:16~17;계7:17;4:4;14:1~5;요12:25;고후5:2~5).
유약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황홀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즐길 수 있는 것들입니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크리스챤: “그곳의 통치자이신 주께서 이 책에 기록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그것을 얻고자 한다면, 주께서 모든 것을 자유롭게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사55:1~2,12;요7:37;6:37;시21:6;22:17).
유약한: “그래요. 내 좋은 친구여, 이 모든 것을 들으니 기쁩니다. 어서 걸음을 빨리 합시다.”
크리스챤: “ 내 등 뒤에 있는 무거운 짐 때문에 빨리 걸을 수 없습니다.”
나는 꿈 속에서 그들이 대화를 마치자 마자 평원의 한 가운데에 있는 깊은 수렁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두 사람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갑자기 수렁으로 빠졌다. 수렁의 이름은 ‘실망의 수렁’이었다. 그들은 진흙으로 뒤범벅이 된 상태로 한 동안 늪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크리스챤은 등에 지워진 무거운 짐 때문에 수렁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유약한: “크리스챤씨,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는 거요?”
크리스챤: “정말로 모르겠는데요.”
유약한: (이때부터 약한씨는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를 내면서 크리스챤에게 말했다) “아니, 당신이 나에게 말한 행복이 고작 이런 것이오? 우리가 시작하자마자 이런 불행을 만났다면, 지금부터 여행이 끝날 때까지 우리가 무엇을 예상할 수 있겠소? 나는 돌아갈 터이니, 당신이나 혼자서 훌륭한 고장을 차지하시오.”
이렇게 말하면서 약한씨는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다가 마침내 그의 집 가까운 쪽에 있는 늪가로 기어올랐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가버렸고 그후 크리스챤은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최고집씨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크리스챤을 설득하려 왔다가 오히려 설득된 유약한씨와 크리스챤은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서로간에 대화를 나누는 내용을 통해서 유약한씨가 순례의 길에 따라나선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문제는, 이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크리스챤조차도 함께 “실망의 수렁”(the Slough of Despair)이란 곳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들이 무엇일까요?

먼저, 이렇게 순례의 길을 나선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유약한씨처럼 되돌아가 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에서 분명하게 강조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넘어지는 자요”(마13:20~21). “유약한”씨를 영어이름은, Pliable입니다. “휘기쉬운”이란 뜻입니다 저는 “유약한”으로 번역했습니다. 크리스챤을 통해서 전도를 받았을때 금방 받아들입니다. “즉시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절망의 수렁”에 빠지게 되자, 금방 돌아서 버립니다. 우리들 중에도 이런 휘어지기 쉬운 유약한 사람이 있다면, 비극입니다.
왜 유약한씨는 이렇게 반응하는 것일까요? 그 깊은 동기와 목적을 살펴보면 쉬 간파할 수 있습니다. 약한씨는 크리스챤에게 첫 번째 하는 질문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즐길 것인지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해주시오” 합니다. 그의 관심은, 지금, “어떻게 즐길 것인가”입니다. 크리스챤이 성경책을 통해서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 “영원한 면류관”, “영원한 즐거움” 등에 대해서 설명해 주자, 황홀해 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황홀해” 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또 덧붙이는 말이 “그러나 이런 것들은 즐길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합니다. 유약한씨의 관심은 “즐기는 것”입니다. 아직 자기자신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거룩에 대한 열망도 관심조차 없습니다. 받을 혜택과 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왜 이 시점에서 순례자의 이름이 “크리스챤”이라고 바뀌는 줄 아십니까? 이 즈음에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소위 “크리스챤”이라고 불려질 수 있지만, 진정한 크리스챤이 아니라, 유사크리스챤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유약한씨 같은 사람들이 바로 명목상의 크리스챤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기쁨으로 금방 반응을 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들에게 무엇이없습니까? 그 속에 “뿌리”가 없습니다. 더나아가면, 우리는 천로역정의 이야기를 통해서, “뿌리”까지는 있지만, 그 뿌리로 계속 자라 열매를 맺히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뿌리가 무슨 뿌리입니까? 바로 말씀의 뿌리입니다. 존 번연이 이 대목에서 자신이 설명하지 않고, 성경책에 나오는 내용을 읽어준다고 하는 데서 이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크리스챤과 명목상의 크리스챤의 중요한 차이는, 바로 말씀에 대한 확신과 불확신, 이것에 있습니다. 크리스챤은 성경이 진리의 책이요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단계에서 크리스챤이 분명히 회심한 자임을 이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을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통하여 회심하고 거듭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없는 유사기독교인, 유약한씨의 특징을 살펴보십시오. 동기와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세상적인 욕망과 쾌락입니다. 그런데, 이런 동기와 목적으로도, 진정한 크리스챤의 모습보다도 더욱 경건한 모양을 갖출 수가 있습니다. 더욱 종교적일 수가 있습니다. 크리스챤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먼저 “목적지”에 대한 말을 꺼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들으니 기쁩니다”면서, “어서 걸음을 빨리 합시다”고 합니다. 순례의 길을 걷는 일에 크리스챤보다도 더 열심인 듯 합니다. 언제까지 그렇습니까? 환란을 만날 때까지입니다.
“실망의 수렁”에 그들이 빠져들었습니다. 그 수렁에 빠졌을 때, 유약한씨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장망성에 있는 자기 집 쪽으로 빠져나가 욕을 하면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크리스챤도 함께 이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존 번연은, “부주의”하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부주의하고 말았을까요? 금방 장망성을 빠져나오지 않았었습니까? 자, 무엇을 하다가 부주의하게 되었습니까? 이야기하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누구와 말입니까? 유약한씨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그랬습니다. 크리스챤은 어느새 전도자의 입장에 선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만 우쭐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유약한씨가 빨리 걷자고 할 때, 크리스챤이 무엇이라고 답변합니까?: “내 등 뒤에 있는 무거운 짐 때문에 빨리 걸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만 죄에 빠져든 것을 암시합니다. 방심하다가 우쭐해져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우쭐해져버리기가 쉽습니다(뒤에서 우리는 크리스챤이 수렁에서 빠져나와 빠진 이유를 스스로 설명하기를, "두려움에 몰려 다른 길로 도망가다가" 빠졌다고 하는데, 존 번연의 '실망의 수렁'을 설정한 동기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수렁에 빠지는 맥락 자체를 보면 이런 크리스챤의 자기설명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우리가 크리스챤된 것이 자기의 공로나 의 때문이라고 의식하지는 않아도 자기도 모르는 새 갖게 되기가 쉽습니다. “좁은 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심지어는 “구원의 언덕”에 이르러서 죄의 짐을 다 벗어버리게 된 이후에조차도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크리스챤은 점점 깨달아가게 됩니다. 우리도 깨달아가야 합니다.

사실, 이 “실망의 수렁”(the Slough of Despond)에 반드시, 필연적으로, 빠져들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 장면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되겠지만, 이 “실망의 수렁”에는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습니다. 조금만 주의하면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이 ‘실망의 수렁’에 빠지는 것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점은, 2부에서 존번연이 크리스챤의 아내 크리스티아나의 여정에서 보여주듯이 분명하다. 그녀와 일행은 징검다리를 건너서 이 ‘실망의 수렁’을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유약한씨와 얘기를 나누다가 우쭐해서 방심하던 것 때문에 보지 못한 채로 수렁에 빠져들어간 것입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자, 우리의 수렁에 빠진 주인공, 크리스챤과 유약한씨 중에 먼저 빠져 나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유약한씨입니다. 크리스챤은 왜 빠져나오지 못합니까? “등에 지워진 무거운 짐 때문에 수렁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고 존 번연은 기술합니다. 유약한씨가 실망의 수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죄의 실망의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새로운 실망에 빠져들어갑니다. 장망성의 실망입니다. 겉으로는 유쾌할지 모릅니다. 쾌락을 누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벗어나올 수 없는 “실망의 수렁”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좁은 문을 향하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 크리스챤은 지금 실망의 수렁 중에서도 어느 방향을 향해서 벗어나오려고 합니까? 좁은 문쪽을 향해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하고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크리스챤이 된 이후에 자신 안에 죄를 느끼고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실망을 느끼는 중에도, 회심한 사람, 거듭난 사람은, 그 실망조차도 하나님 안에서 합니다. 좁은 문을 향해서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도움의 손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크리스챤은 실망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토론문제)
1) 유약한씨는 크리스챤이 가는 길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눅14:25~35)
2) 전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딤후3:15)
3) 유약한씨가 끊임없이 관심을 둔 것은 무엇입니까?(마13:20)
4) 천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에서 크리스챤은 어떤 영적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까?(계5:13)
5) 유약한씨의 주된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눅9:25)
6) 진정으로 영적인 것과 하늘의 것을 얻기 원한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사55:1~2,12;요7:37,6:37)
7) 유약한씨가 순례길을 따라나서지만 크리스챤과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순례길에 나서는 이유가 어떻게 다릅니까?(마1:21)
8) 두 사람이 절망의 수렁에 빠진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마26:41;딤전4:8)
9) 절망의 수렁은 어떤 시험을 의미합니까?(벧후2:14;3:16)
10) 유약한씨는 크리스챤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고는 화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이 있는 멸망의 도성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유약한씨가 되돌아간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입니까?(막2:17;롬7:24)
하나님의 말씀에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유형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씨뿌리는 비유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길가에 뿌려진 사람은, “천국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깁니까? “악한 자(사탄)이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고집스러운 생각이나 편견으로 인해서 아예 반응조차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말이나 경험들을 너무 많이 들어놓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유형은 어떤 사람입니까? “천국말씀이 돌밭에 뿌려진 것과 같은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이 유형의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입니다. 셋째 유형도 있습니다. “가시떨기에 말씀이 뿌려진 것과 같은 사람”입니다. “말씀을 들으나” 가시떨기 때문에 자라지를 못하지요? 어떤 가시떨기입니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그것들 때문에 “말씀이 막혀” 자라지 못하고, 결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니, 결론적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열매를 맺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됩니다. 이런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는, 말씀을 듣고 그것에 대해서 반응하는 네 가지 유형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해당되는 분입니까? 네 번째,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을 천로역정에서는 “크리스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유형의 사람들을 아주 인상적으로 설명해줍니다. 간단히 대조해볼까요? 가족들과 이웃들의 유혹에 귀를 막고 장망성을 떠난 크리스챤에게 누가 달려와서 말리려고 하였습니까?(그림1) “고집”이란 사람과 “약한”이란 사람입니다. 최고집과 유약한 말입니다(그림2-3). 제가 성을 붙였습니다. 이중에 “고집”이란 사람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누구에게 해당될까요? “길가에 뿌리워진 씨앗같은 사람”입니다.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약한”이는 몇 번째 유형에 해당될까요? (맞습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뻐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천로역정은 이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이 기쁨으로 말씀을 받으면서도 왜 그렇게 쉬 넘어지게 되는지, 잘 설명합니다. 천로역정의 이 부분을 다 같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천로역정본문읽기)
실망의 수렁에 빠지게 되지요? 오늘은, 이 유약한씨에 대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다시, 그림3). 약한씨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하지만, 어떤 동기로 지금 순례의 길을 따라나서는 것입니까? 약한씨는 크리스챤에게 첫 번째 하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즐길 것인지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해주시오” 합니다. 그의 관심은, 지금, “어떻게 즐길 것인가”입니다. 크리스챤이 성경책을 통해서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 “영원한 면류관”, “영원한 즐거움” 등에 대해서 설명해 주자,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황홀해” 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또 덧붙이는 말이 “그러나 이런 것들은 즐길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합니다. 유약한씨의 관심은 “즐기는 것”입니다.
그에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 속에 뿌리가 없습니다”. 말씀의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크리스챤이 열심히 유약한씨에게 성경말씀을 들어서 설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유약한씨는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그래서 기뻐합니다. 그래서, 금방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뿌리가 없어서, 그 말씀의 뿌리가 요구하는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것도 없고, 거룩에 대한 열망도 관심조차 없습니다. 받을 혜택과 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천국을 물질적인 축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행복을 생각하니 너무나도 기쁩니다.
문제는, 여기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신이 나고 흥이 납니다. 그래서, 지금 죄의 짐 때문에 빨리 걷지 못하는 크리스챤을 보면서, “걸음을 좀 더 빨리 합시다”고 합니다. 거짓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보다 어떤 경우에는 더 열심인 경우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서든지 이런 유형의 사람이 있어 왔습니다만, 특별히 현대에 들어와서는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소위 물질적인 축복이나 성공에만 초점을 맞춰서 복음을 소개하는 설교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나옵니다. 흥이 나고 신이 나서 기쁨으로 기대를 하면서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무슨 일을 만나게 됩니까? 덜커덕, “실망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그림4).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좋은 땅에 뿌져진 씨”가 열매를 맺히게까지 되는 그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오해하게 되면, 좋은 땅이라고 해서 씨가 뿌려지면 저절로 열매가 맺힐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좋은 땅에서는 비바람도 없겠습니까? 태풍이나 한발이나 눈도 내리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열매를 많이 맺히게 될 자입니다!)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유혹이 밀려옵니다.
이렇게 균형잡힌 성경이해를 천로역정이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약한씨만 수렁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챤도 함께 빠집니다. 이 수렁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실망의 수렁”입니다. 장망성을 떠나서 좁은문에까지 이르기 전에 두 가지 난관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이 ‘실망의 수렁’입니다. 두 번째는, ‘도덕마을’의 유혹입니다(가시떨기밭에 뿌려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진정한 크리스챤이라고 하면 이런 난관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디를 향해서 간다는 것입니까? 바로 “좁은 문”을 향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참된 순례자의 표시와 증거가 됩니다.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좁은 문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좁은 문”을 통과해서 “좁은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좁은 문을 이미 통과하여 좁은 길을 걸으시는 중이라면, 아직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은 채로, 실망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겠습니까? 어떠하든지, 구원의 놀라운 열매를 풍성하게, 백배, 육십배, 삼십배 맺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천로역정공부의 초점은, 유약한씨에 있습니다. 이 실망의 수렁에 빠졌다가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이 유약한씨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왜 교회생활을 시작했다가, 실망하게 됩니까? 물질적인 축복이나 인정받는 것, 곧 육적인 동기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부추기고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에는 이런 유혹이나 난관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아는 사람은 이런 실망의 수렁을 통과하더라도 빠지지 않은 채로 통과합니다. 실은, 크리스챤의 아내인 크리스티아나가 그 자녀들과 함께 이 절망의 수렁을 통과할 때에 빠지지 않은 채로 통과합니다. 다음 주일 살펴보겠지만, 이 실망의 수렁에 빠졌다 하더라도, 크리스챤은 이 수렁 속에서도 좁은 문을 향해서 허우적거립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들로, ‘실망의 수렁’에 빠져 있다면, 허우적거려도 어디를 향해서 허우적거려야 하겠습니까? ‘좁은 문’을 향하여, ‘천성’을 향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에 보시는 것처럼, 분명히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우리들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