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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디아코니아(마지막회)-비헤른과 섬김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1273
디아코니아(마지막회)
비헤른과 섬김
들어가면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그들의 사회복지국가 형성과정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섬김신학과 실천을 통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즉 개신교 신학의 뿌리에는 복지의 문제가 처음부터 화두로 역할을 했으며, 이런 개혁적인 신앙의 내용들은 교회내적 개혁에 그치지 않고 사회구조의 패러다임을 하나님의 질서로 변혁시켜 내는 견인차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현재의 독일의 사회국가(Sozialstaat)시스템은 교회의 섬김실천인 디아코니아와 함께 형성되어 나왔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한가운데 개신교의 한 개혁가 요한 힌리히 비헤른(Johann Hinrich Wichern, 1808-1881)을 만나게 된다. 사랑의 천재라 불리우는 비헤른은 종교개혁의 명제인 만인사제직과 믿음과 사랑의 통일성에 충실하여 독일 사회복지단체의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큰 개신교 디아코니아사업단(Diakonisches Werk)의 기초를 형성한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거의 소개가 안 되어 있거나 단편적으로 소개된 비헤른의 섬김신학과 실천은 섬김의 르네상스라 할 만큼 섬김의 언어가 풍미한 한국교회에 다양한 물음을 던져준다. 이번 호에서는 그간 반년간의 섬김을 주제한 글을 결산하면서, 독일의 섬김실천의 역사적 전개와 현황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비헤른의 섬김신학과 실천의 의미를 정리해보기로 한다.
독일의 섬김 실천의 역사적 전개
1820년경 독일에서는 각성운동과 더불어 산업혁명의 여파로 생겨난 심각한 사회문제들에 직면해 그리스도교인의 사회적 실천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한 연관성 속에서 독일의 디아코니아운동의 선구자로 불리우는 비헤른은 1833년 방치된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양육하는 공동체, “라우에 하우스(Das Rauhe Haus)”를 세운다.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디아콘(Diakon)을 교육하는 일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남성 섬김 전문직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이어 1836년 테오도아 프리드너(T. Fliedner)와 그의 부인인 프리데리케(Friederike)가 카이저쓰베르트에서 여성 전문 섬김직(Diakonisse, Diakonin)의 역할을 하는 디아코니세 공동체를 세운다.
이러한 가운데 500년 전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 95개조의 반박문을 내세우며 당시 중세의 가톨릭 신학과 교회에 당당히 도전하였던 비텐베르크의 성 부속교회에서 1848년 9월, 이른바 1회 독일 교회의 날 행사가 있었다. 그 때 비헤른은 즉흥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사랑은 교회에 있어 신앙에 속한다(Die Liebe gehort mir wie der Glaube)”라는 그의 언설과 함께 디아코니아운동의 거대한 화산이 분출되었다. 종교개혁의 핵심사상인 만인사제설의 전통을 다시금 회복시키려는 독일 디아코니아운동은 150여 년 전 산업혁명의 결과로 생긴 수많은 사회문제에 무방비와 무관심으로 일관한 기존교회에 대항하여 생긴 개혁운동이자 각성운동이었다. 처음 이 운동은 신앙각성운동에 헌신적으로 자신을 던졌던 평신도들과 당시의 화석화된 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살아있는 신앙의 회복과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즉 이들은 당시의 사회문제에 대해 바로 교회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강하게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밖을 향한 선교가 아닌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의 각성(innere Mission)을 요구하게 되었고, 교회의 본질인 디아코니아가 회복되어야 할 것을 주창하였다.
비헤른은 당시 산재하여 있었던 협회(Verein) 단위의 디아코니아 실천들을 하나로 연대하고 통합하고, 이를 바탕으로 1849년 내적 선교(Innere Mission) 중앙위원회를 구성한다. 또한 대도시에서는 1877년 이래 도시선교회(Stadtmission)라는 기관이 설립되어 대도시의 사회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기관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내적 선교는 사회 구조적 틀 안에서 디아코니아를 구체화하기 위해 비스마르크 정권의 사회복지법제정에 깊이 관여한다.(T. Lohmann) 그 결과 1883년 의료보험, 1884년 산재보험, 1889년 근무 장애보험과 노후 연금보험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이 내적 선교회는 독일에서 가장 큰 신앙고백적 복지기관으로 성장하고 독일의 현 체제인 사회국가로 도약하는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 후 1919년 독일의 사회복지체계의 틀을 마련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복지체계의 장치로써 사적인 것과 공적인 부분으로 한 이중적 체계(dual System)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디아코니아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1929년 세계의 경제위기는 독일에도 경제난으로 이어지고 디아코니아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33년부터 국가사회주의에 의한 제 3제국 시기는 디아코니아의 암흑기라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제 3제국의 국가사회주의 폭압아래 독일의 교회는 다시금 진정한 의미에 있어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거듭 질문을 하게 되었다. 특히 고백교회를 통해 저항운동을 하였던 이들을 중심으로 전쟁이후의 새로운 교회에 대한 구상을 실현해 나간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고백교회운동의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트레사에서 개신교 구호국 (Evangelisches Hilfswerk)를 세우게 되는데, 이를 중심으로 교회가 전면에 나서서 전후의 복구 작업을 신속하게 해나간다. 이는 독일교회의 영적 재생과 물적 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중심모토는 교회 자체를 “행동 속의 교회(Kirche in Aktion)”로 이해하는데 있었다. 이어 1948년 독일교회총연합(EKD)이 결성될 때, 교회법 정관 안에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본질이자 삶의 표현”이라는 조항을 명시화하기에 이른다. 이후 1957년 내적 선교회와 개신교구호국은 하나의 기관으로 융합하기로 합의하고 서로의 폭을 좁혀 나아가다가 1975년 오늘의 독일 개신교 사회 봉사국(Diakonisches Werk der Evangelischen Kirche in Deutschland)으로 합치된다.

섬김실천 현황
독일의 사회복지 체계는 6개의 중요한 협회에 의하여 구성되어 진다. 즉 1848년 개신교의 디아코니아를 필두로 1897년 가톨릭의 카리타스, 1919년 독일 유대인 복지센터, 1921 독일 적십자, 1924년 노동자 복지 조합, 독일 평등복지 사업협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모든 단체는 1924년 독일 “자율 복지 기관 연맹(Federal Association of Free Charitable Organisations)”이라는 기구 안에 속해 있다. 여기에 속해 있는 기관은 1996년에 9만 3천 5백 개에 달하며 327만 536개의 수용자리/침상이 있다. 또한 이 안에 110만 명의 전임요원이 일을 하고 있고 250-300만 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봉사를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약 6만개에 해당하는 디아코니아와 카리타스 기관이 있고, 이 안에서 90만 명 이상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다. 이 수치는 독일의 모든 “자율 복지 기구”의 80%에 해당하고 모든 복지기관의 75%에 이르는 것이다. 이 가운데 디아코니아 기관에는 45만 여명의 직원이 전일제/시간제로 고용되어 있다.
정리하면, 현재 독일의 개신교 디아코니아 기관은 약 31,000개이고 45만 여명의 직원이 그 곳에서 일하고 있고 40만 명 정도의 자원 봉사자 들과 100만 이상의 의료침대나 수혜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직원 중 26만 명 정도가 고정된 시설에서 근무를 하고 있고 그 중 40%에 해당하는 이들이 양로원, 청소년 기관, 장애인 기관, 그리고 병원에 속해 있다. 또한 4,300여개의 자원봉사 동아리들이 움직이고 있고 18,000개의 교회가 이 섬김의 사역에 연대하며 나아가고 있다. 즉 25개의 주교회(Landeskirche)와 9개의 자유교회 그리고 90개의 전문협회가 독일 개신교 디아코니아 사업단에 속하여 있다. 구체적으로 독일개신교의 섬김실천은 국내와 국외의 영역에서 아주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 공룡처럼 거대한 독일 개신교의 섬김운동의 틀을 기초한 비헤른,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의 삶의 자취를 찾아가 보자.

사랑의 천재, 비헤른의 삶
필자는 독일에서 섬김학을 배우는 기간에 가족들과 비헤른의 고향이자 디아코니아운동의 시발지였던 함부르크의 라우에 하우스를 방문한 적이 있다. 대도시이고 항구도시인 함부르크는 여느 도시와는 다른 육중함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라우에 하우스는 대도시의 화려함에서 먼 변두리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주로 어려운 이들이 사는 곳에서 디아코니아운동이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비헤른이 아이들을 위한 그룹홈을 시작했던 라우에 하우스를 중심으로 지금은 학교와 여러 섬김기관들이 하나의 섬김단지로 자리하고 있다.
각성운동의 영향을 받아 각성된 아이로도 간주되는 비헤른은 독일 함부르크의 어느 가난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0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비헤른의 교육을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이유로 비헤른은 사립학교에 다니는 것이 가능했다. 함부르크에서 요한 노이움 김나지움에 다니면서 비헤른은 아주 최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비헤른은 당시에 함부르크에 긴장을 일으키고 있었던 각성운동에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비헤른이 아주 일찍부터 교회적 이성주의에 거리감을 두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비헤른의 삶의 여정은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1823년 비헤른 나이 15세에 아버지를 결핵으로 잃게 된다. 그리고 비헤른은 그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당시 비헤른과 그의 모친이 책임을 져야 했던 가족은 4명의 자매와 1명의 형제였다. 때문에 온종일 그는 함부르크에 있는 소년기숙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을 하고 저녁에는 학력고사를 준비하였다.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을 하고 늦은 밤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은 그로 하여금 평생 동안 두통에 시달리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한다. 이때 비헤른은 중요한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개신교 수련회를 조직하여 섬김을 실천하였던 아말리에 지벡킹, 함부르크의 시의회 의원인 마틴 후트발커, 성 게오르그 교회 목사이자 함부르크 각성운동가이자 독일 최초의 영어 주일학교의 시발자였던 요한 빌헤름 라우텐베르크가 이에 속한다. 라우텐베르크는 비헤른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성만찬 초대와 루터에 대한 서적을 탐독케 하여 신앙적으로 고무시킨다. 또한 바론 에른스트 코트비츠는 당시 실업자를 위한 사립보호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비헤른은 그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또한 18세 되던 해에 만난 요한네스 클라우디우스로 이해 비헤른은 영적인 대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는 괴팅겐과 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녔다. 1830년 베를린으로 대학을 옮기던 도중, 북 하우젠, 할레, 비텐베르크를 방문하게 된다. 할레에서 프랑케가 세운 학교와 비텐베르크에서 루터기념관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는 훗날 그의 섬김실천의 물꼬를 틔운 라우에 하우스를 만드는데 중요한 매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신학수업 기간 중 비헤른은 교회를 국가로부터 분리된 독립적 기관으로 이해하였던 다니엘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슐라이에르마허를 알게 된다. 그를 통해 비헤른은 신자의 보편적 사제직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고 이에 근거한 교회 이해를 갖게 된다. 또한 그는 니콜라우스 율리우스에게서 감옥문제에 대한 강의를 듣고 평생 형집행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된다. 비헤른은 신학수업 기간 중, 신앙은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며 고난당하는 이웃에 대한 섬김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베를린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는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지금까지 살아왔고, 하나님께서 저를 섬김실천을 위해 부르셨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제 그 일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헤른이 신앙과 사랑의 연관성에 대한 근본 주제를 신학수업을 통하여 분명하게 입장 정리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1831년 비헤른은 목사후보생이 되어 고향 함부르크로 돌아온다. 하지만 당시 신학교를 졸업하고도 목회지를 얻지 못한 2,500여 명의 대기자들이 있었는데, 비헤른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는 그의 생애 내내 목회지를 받지 못한 대기자로 머물게 된다. 함부르크에 돌아온 비헤른은 이성주의자들과 교회적 논쟁에 참여한다. 당시에 함부르크에는 “각성된” 사회라 할 정도로 그리스도교적 사상이 사회저변에 확산되고 있었다. 즉 성서가 배분되고 소책자들을 통해 학교 교사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이들로 인해 방치된 아이들을 돌보는 주일학교가 생기게 된다. 이 주일학교는 주중에 가난 때문에 일을 해야 했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일종의 대안학교라 할 수 있다. 비헤른은 그러한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의 집을 방문하면서 당시의 사회적 참상을 직접 보면서 깊은 충격을 받게 된다. 이러한 곤경을 보고 비헤른은 1833년 이른바 구조원인 “라우에 하우스”를 함부르크에 세우게 된다.
이 라우에 하우스에 관련하여 비헤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는 아이들을 위해 보육소를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구원하는 사랑을 가지고 보육소를 세울 만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라우에 하우스는 아이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라우에 하우스에서 아이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새로운 삶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대화 마지막 부분에 비헤른은 아이들에게 항상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모든 것은 이제 지나갔다. 용서받았으니 이제 다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사실이 너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곳에서 전적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비헤른은 라우에 하우스를 거대한 기관으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원칙에 따라 운영을 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성장하기 위해서 부모와 가족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원칙에 따라 비헤른 자신과 그의 가족 모두가 일을 했다. 라우에 하우스는 해가 갈수록 확대되어갔고 가족들도 늘어나게 되었고 교육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영적, 육체적 그리고 수공업적인 교육을 비헤른은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놀이와 기도회도 중요하게 여겼다. 또 하나의 라우에 하우스의 원칙은 자발성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감독과 통제에 의한 집단 교육체계를 멀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수업은 철저히 자유로이 참여하며 아이들은 섬김공동체 안에서 양육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고가 지배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외부로부터의 모든 공적 경제 보조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하여 1835년 형제의 집인 “내적 선교를 위한 학교(Seminar fur die Innere Mission)”를 세우고 아이들의 도우미 역할을 할 개신교 사회복지사인 디아콘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비헤른은 이 기간에 다른 지역을 많이 방문하게 되는데, 방문의 결과를 1844년 “개신교회의 위기와 내적 선교”라는 주제의 글 속에 정리한다. 이 글은 1848년 비텐베르크에서 있었던 교회의 날 연설의 원고가 되었으며, 1849년 내적 선교 백서로 발전된다. 당시 내적 선교회의 중요한 사역은 어린이 집, 노약자, 지체 장애인, 시각장애인, 정신 장애인, 천식 장애인, 방랑자, 바다 선원, 강 선원, 죄수, 형 면제 받은 이들, 중독자들을 위한 섬김사역이었다. 내적 선교는 이들을 위하여 문서 선교회, 개신교 청년회, 남녀 봉사자의 집, 그리스도교 훈련협회, 남성 자원봉사대, 이웃 사랑회 등의 기관들로 발전되어갔다. 당시 비헤른이 중점을 두고 사역을 한 일은 도시선교(Stadtmission)와 교도소 선교였다. 도시선교는 런던 도시선교를 모델로 베를린에서 1877년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중점을 둔 사역은 매춘문제, 부부폭력문제, 중독자 보호와 빈민과 실직자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또한 떠돌이와 직업없이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숙박업소도 운영을 하였다.
1848년 비헤른은 교회가 여러 면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먼저 가톨릭주의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보았다. 즉 그는 당시 독일의 가톨릭주의가 혁명을 매개로 디아코니아의 자생적 조직인 협회조직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헤른이 이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것으로 여긴 것은 이성적 자유주의였다. 이성주의에 경도된 시민들은 이미 반교회적으로 변해있다고 비헤른은 보았다. 비헤른은 당시의 신학과 철학에서도 위기를 느꼈다. 당시 신학안에서 다비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는 예수의 삶을 신화로 설명하였다. 또한 1848년 포이에르바흐는 하이델베르크 시청에서 “종교의 본질”에 대해 강연을 하는데 거기에서 그는 종교를 하나의 인간존재의 투영물로 설명하면서 초월적 신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개진한다. 칼 막스도 포이에르바흐를 넘어서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요 인민의 고난의 표현이라며 이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가운데 교회는 1848년 이후 수많은 문제로 휩싸이게 된다. 1848년 비텐베르크에서는 개신교 지도자들의 모임이 있게 되는데, 거기에서 비헤른은 1시간 넘게 즉흥연설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개신교의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행동할 것을 주장하게 된다. 이를 통해 예상을 뛰어넘는 반향을 불어 일으킨 비헤른은 1849년 1월 내적 선교를 위한 백서를 발표하고 신속하게 내적 선교회를 위한 중앙위원회를 구성한다.
1849년 비헤른은 바이에른, 당시 주요한 산업도시였던 뉘른베르크, 에어랑엔, 아우그스부르크, 뮌헨, 뷔텐베르크 그리고 바덴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내적 선교회가 구체화된다. 비헤른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바덴 주교회의 목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후 바덴에도 내적 선교 협회가 신속하게 구성된다. 비헤른이 백서를 발표하고 여러 지역을 방문한 후 디아코니아 기관들이 여러 곳에 생기게 된다. 이런 과정 속에 비헤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쏟아지게 되는데, 비헤른이 교회와 국가사이의 한계를 없애고 있다고 비난한다. 또 다른 비판은 교회 자체로부터 왔다. 많은 목사들은 비헤른의 이러한 행동이 목사 직제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목사직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게다가 비헤른의 행동이 비 복음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왜냐하면 비헤른의 디아코니아 실천이 칭의론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에서였다.
1851년부터 1853년까지 비헤른은 왕으로부터 프로이센에 대규모 조사방문을 요구받고 평가서를 서술하게 된다. 1868년 비헤른은 공적으로 프로이센의 국가기관의 요청으로 프로이센의 감옥개혁을 위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의 지도아래 베를린의 모아비트에 처음으로 교도소가 건립되는데 특이한 것은 라우에 하우스의 형제들이-군인들이 아니라-감옥을 감독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858년 비헤른은 요한재단(Johannesstift)를 세우고 형제들을 위한 지속교육의 장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비헤른은 교회가 공적으로 섬김직을 세우고 디아코니아가 진정한 교회의 과제라는 사고를 더욱 발전시킨다. 이로 인해 자율적 협회뿐만 아니라 교회직제로도 디아코니아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비헤른은 강변한다. 1866년 비헤른은 두 번에 걸친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1871년 10월 교회 회의에서 그의 마지막 강연을 한다. 1874년 비헤른은 뇌졸중으로 두번째 쓰러지고, 7년간의 투병생활을 하다가 1881년 4월 함부르크에서 영원한 잠에 들어선다.

비헤른의 섬김신학
1951년 여름, 함부르크의 라우에 하우스를 방문한 독일의 대통령 테오도아 호이세는 비헤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비헤른은 위대한 신학자가 되기 위한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그를 재촉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비헤른이 3년의 짧은 신학수업 이후 줄곧 섬김실천의 현장에서 행동가로서의 모습을 밀도있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신학이론이란 무엇을 의미했고 그가 남겨둔 이론적 결실은 무엇인가?
1998년 독일 디아코니아운동 150주년을 맞아 디아코니아의 근거와 과제 그리고 미래적 전망을 담은 백서가 153개의 테제형식으로 독일 개신교위원회로부터 출간되었다. 이 가운데 3번부터 11번째까지의 테제는 백서를 낳게 한 동기부여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 안에는 비헤른의 신학과 실천의 요약이 담겨져 있다. 이는 독일의 디아코니아 실천이 비헤른의 디아코니아 신학과 실천에 근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신학이론은 전적으로 섬김실천을 위한 신학이론이었다. 강단이나 책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장에 뿌리를 둔 신학이론이었다. 수많은 섬김실천 현장만큼이나 그가 남기고 간 실천이론들이 그의 전집 열두 권 속에 남아있다. 독일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는 그의 신학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연구를 이어나가고 있다. 아래에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해본다.
교회에 대한 이해
비헤른의 교회구조에 대한 사고는 주교회 중심아래 전통적 교회의 직분론적 구조와는 거리가 멀다. 비헤른은 1856년 “디아코니아와 섬김직에 관한 평가서”에서 그의 총체적인 신학적 관점을 밝힌다. 여기에서 그는 디아코니아를 “신 구약성서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로 보며 특히 “이미 약속되었고 아직 성취되지 않은 구원의 발전과정”으로 보고 있다. 또한 그는 교회사적 관점과 하나님나라의 역사 관점을 구분한다. 이러한 하나님나라의 관점은 실천을 이끄는 추동력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세계에 깊이 들어가 고난을 깊이 이해하고 깊이 있고 적절한 도움을 주기위해” “야웨 하나님으로 깊이”들어 가야한다고 강변한다. 또한 모든 내적 세계의 영향력을 끼치기 위한 지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고 준비되어지는 계시”에 있다고 비헤른은 강조한다. 당대에 비헤른만큼 디아코니아 안에서 에큐메니칼적인 사고를 확고하게 대변했던 인물은 없었다. 그는 디아코니아와 섬김직이 모든 종류의 제한적 입장들을 벗어나야함을 강조한다. 그는 개신교 내부 뿐만 아니라 내적 선교의 모든 행위가 모든 신앙고백의 그룹들을 넘어 많은 반대들을 극복해야함을 강조한다. 그는 무엇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자선적 전통의 업적에 대해 언급하며, 특히 그 중 수도회의 업적을 중요시 했다. 이것과 관련하여 비헤른은 조직적인 협력사업은 생각할 수 없었지만 가정 동아리(Hauskreis)단위 속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보았다. 즉 그러한 그룹들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모든 기존교회들을 깨우칠”수 있다고 보았다.
비헤른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슐라이에르마허와 평신도와 성직자의 간극을 철폐한 헤른후터 형제단운동에 근거한다. 자유, 진실, 공동체 그리고 상호간의 사랑에 근거한 비헤른의 교회이해는 요한복음의 사랑 공동체에 정향된 교회이해라 할 수 있다. 1839년 “주의 진실한 공동체”라는 그의 글에서 확인하듯이 비헤른은 교회를 사랑 자체라 하며 사랑 안에서의 삶을 교회라 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교회밖엔 없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적극적인 자유는 세상을 극복케 한다고 한다. 이 자유는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개인적 통합에서 오는 것이라 한다. 또한 이러한 자유는 같은 사고를 지닌 공동체에서만 가능하며, 이를 통해 “생명력 있는 유기체”가 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교회는 해방받은 이들의 진리를 위한 협회적 성격을 갖는다고 한다.
비헤른은 교회를 믿음과 신뢰의 공동체라 하며 요한복음 13-17장의 고별사를 공동체의 기본규정으로 삼는다. 즉 “서로 사랑”하며 “발을 씻어 줌”으로 서로의 죄를 용서해 주고 서로의 죄를 깨끗케 한다고 한다. 또한 ‘요한의 교회’라는 설교에서 요한복음 16장 15절 이하를 증거로 주의 교회는 형제적 공동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직무에 근거, 영을 통해 역사하는 교회라 한다. 또한 요한일서 4장8-11절의 본문을 주제로 하는 설교에서 형제적 사랑의 계명이 그의 제자를 인식하는 표식이며 자매적 사랑은 서로의 죄를 용서해주고 공동체적 삶으로 이끌며 디아코니아적으로 구조화 된다고 한다. 즉 섬기는 자가 큰 사람이 되는 공동체를 말한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 13장 34절이하의 설교를 통해 형제적 사랑과 일반적 사랑을 엄격히 구분하며, 예수가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고별할 때 새 계명으로 준 형제적 사랑으로 서로간의 상호적 사랑의 관계의 중요성을 말한다. 서로의 발을 씻어주고 이로써 항상 새로워지는 공동체 안에서 성숙해지고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함을 위한 상호간의 도움과 섬김은 외부를 향한 행동의 조건이라 한다. 또한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점화된 사랑은 자연관계 속에서의 사랑, 즉 가족 간의 사랑을 거룩하게 한다. 또한 민중을 향한 사랑을 강화시킨다고 비헤른은 주장한다.
1848년 9월 22일 비헤른이 행한 비텐베르크에서의 즉흥연설문에 대해 사람들은 1517년 루터의 동일한 곳에서의 95개 벽보조항과 비교한다. 비헤른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고 근본적인 개혁만이 교회를 새롭게 하고 그들의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고 확언한다. 비헤른은 확고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계시된 것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행동 안에서도 설교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가장 지고하고 순수한 교회적인 행위는 구출하는 사랑이다.” 개신교 교회는 그 때문에 다음을 고백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사랑은 신앙이다.” 때문에 죄인들의 구원자로의 예수를 억압당하는 이들의 변호사로,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을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실제적 개입과 대립시키고 반목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랑의 예리한 눈으로” 현실을 본다는 것은 인간 곤경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하여 본다는 것이고, 그러한 현실을 사랑으로 구원하는 행위로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전력을 다하여 현실의 변혁을 위하여 투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헤른은 이것이 모든 교회의 소명임을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즉 “내적 선교”, 디아코니아는 “교회 밖과 측면에서의 삶의 표면”일 수 없으며, 디아코니아는 “신앙하는 사랑의 영적 생명”인 교회의 본질로 나타나고자 한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와 디아코니아가 함께 속하여 있다거나, 혹은 두개의 구조연합을 통하여 서로 연결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이 둘의 내적인 삶의 과정은 서로 서로 맞추어져야 하고 우선순위는 함께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관 안에 디아코니아 사업을 독립하는 것의 위험은 교회가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회피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비헤른은 분명히 인식하였다. 디아코니아 기관에 대하여 비헤른은 본질적으로 교회적 본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일 디아코니아기관이 교회를 섬기지 않고 외부에서 자기 권력적 형태로 나아간다면 진정한 의미의 성격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디아코니아 기관에 그러한 의무가 지워진다고 한다.
비헤른에게 있어 디아코니아는 “모든 이들의 직분”이다. 그리고 루터에 의해 재발견된 “만인사제직”은 디아코니아적인 교회의 기초라는 것을 천명한다. 즉 그는 만인사제직을 세례를 근거한 하나의 그리스도인의 직분으로 간주한다. 이로써 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고 각 개인의 카리스마(은사)와 직분이 통일을 이루고(vocatio interna und externa) 신앙과 행동, 그리고 소명(Berufung)과 직업(Beruf)이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여기에 “직접 행하는 참여, 말하는 것, 함께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모든 이가 다른 이들과 말하며, 자신의 경험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론화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가지고 말하고 실천 자체가 표현되어 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비헤른은 이런 방식으로 교회 내에 있는 은사(카리스마)들이 활동을 시작한다고 확언한다. 그래서 비헤른은 디아코니아적인 전문가주의를 반대하며 내적 선교안의 전문지식이 결여된 졸렬함에도 경고를 하고 있다. 그의 사고는 실천, 즉 신학적으로 책임적인 실천에 목표를 두었고 이론과 실천의 교차를 중시하였다.


삼중적 섬김
때문에 비헤른은 사적인(자율적인), 교회적인 빈민구제와 국가의 빈민구제로 나누어진 역할과 협력을 원하며, 이어서 “삼중적 섬김”을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안과 그들의 가정과 그룹들은 사랑의 자율적 섬김을 강화시키며 이를 위한 의무가 있다. 그들은 가깝게 접하는 이들의 곤경을 보며 사회적 과제를 찾아낸다. 이러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자발적 행위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자율적 섬김 안에서 국가나 교회가 행할 수 없는 섬김의 실천을 하게 된다. 자신이 경험하여 획득한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생겨나는 자유로운 섬김은 아주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은 어떠한 법적인 형태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로운 섬김은 개인에게서 일어나고 가족이나 친구관계 그리고 이웃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즉 이는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이웃사랑 그리고 가족 디아코니아 그리고 협회나 구빈원이나 디아코니세 같은 기구적 디아코니아에서 구체화된다. 비헤른은 자유로운 섬김의 이상적인 형태를 여성들의 방문 섬김과 병자간호협회들에게서 본다. 비헤른에게 있어 라우에 하우스의 형제들과 카이저스베르트의 자매들은 자유로운 섬김에 속한다. 그는 이들 속에서 수도공동체의 은총이 넘치는 재생으로 본다.
다른 한편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섬김직분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사회 안에서 도움의 의지를 형성하며 정치적 공동체 국가를 지향하는 가장 중심역할을 한다. 이른바 교회적 섬김차원에서 규정된 섬김직분은 보충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교회의 디아코니아의 근원은 예배에서, 성만찬에서, 디아코니아적인 기도에서 그리고 사랑의 헌금을 모으는 데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교회적 섬김은 자율적 섬김을 촉진시키고 보충한다.

이러한 정치적 공동체국가의 섬김직을 위해 국가는 이에 상응하는 제도를 설정, 유지 그리고 관리(예를 들어 빈민구제, 공공 병원, 빈민주택, 학교)할 의무를 부여 받는다. 비헤른에게 있어 국가는 섬김의 영역에 속하지 지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틴 루터의 창조적 질서에 따른 과제 분담과도 연결되어 지는 것이다. 하지만 비헤른에게 있어 시민적 디아코니아에 대한 단초는 있지만 사회적 디아코니아로는 발전 못한 면이 있다. 즉 그는 노동자연합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는데 이것을 그는 자유주의의 산물로 보았고 반 그리스도교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
신학적으로 비헤른은 보편적이고 넓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비헤른에게 있어 하나님나라 사상은 가장 중심에 있다. 이로부터 기존교회의 부동성과 자기고수에 급급한 정통주의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자신만 구원받고자 하는 경건주의의 지반 즉 환원주의적 구원이해는 강하게 비판한다. 비헤른에게 있어 하나님나라 이해는 하나님의 교회가 사회적 국가적 삶의 현실에 전체적으로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교회 그리고 사회의 전 영역에서의 개혁원칙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전체적인 작업을 위하여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 죄의 지배아래에 있는 이들의 내적 외적 갱신을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을 향하는 외적 선교(aussere Mission)와 나란히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상태에서의 세례 받은 이들의 내적 선교(innere Mission)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비헤른에게 있어 그의 시대의 사회적 곤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의 결과이다. 이러한 죄가 물질적 곤경을 가져온 근본원인이라고 그는 본다. 바로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적으로 산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여기게 되고 이웃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상황은 아주 전혀 다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인 우리 인간은 늘 자기 자신에게 얽매어 산다. 이 때문에 인간은 죄에 대한 인식과 고백이 필요하다. 이것이 비헤른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내적 선교를 하나님나라의 과정으로 이해하며 커다란 통일적 도움체계를 통하여 모든 개체의 도움이 전체로 통합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만인사제로 참여한다. 비헤른은 개인, 교회, 국가의 사회적 도움이 각각의 역할 속에서 함께 영향을 미치기를 원했다. 비헤른은 루터의 만인사제직 사상을 확산시키며 동시에 내적 선교의 실천을 위한 근거로 삼는다. 내적 선교는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해 나간다. “믿는 이들의 사제직은 선교행위를 위한 서품수여인 동시에 내적 선교를 위한 축성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직업과 신분 안에서 하나님나라는 성장해 나간다.”

협회개신교
내적 선교의 실천을 위해 소명으로 받은 보편적 사제직은 협회(Verein)안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제도화된 교구적 지역 교회 내에서의 활동영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협회는 사회적 개신교의 형성을 위한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자율적 협회안에서 형성되는 내적 선교는 비헤른에게 있어서 “신앙의 행동”이라는 창조적 힘으로 구체화되고 국가나 기존교회가 도달할 수 없는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나라를 세워나간다. 즉 비헤른은 이 “협회”를 진실한 주의 교회로 간주한다. 이 협회는 계급적, 신분적 사회질서의 붕괴 후 생겨난 것으로 각성운동이후 기존의 교회 형태로부터 해방받아 생긴 것이다. 이로 인해 신앙행위와 실천이 창조적 힘을 가지고 자유로운 섬김 행위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내적 선교는 본질적으로 구원하는 사랑의 행동을 통한 신앙고백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존 교회의 영적인 직제가 일반의 영혼 욕구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면 내적 선교는 잃어버린 이들, 즉 병든 이들과 위험에 처한 이들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헤른은 그리스도교적 사회를 건강한 국가, 교회, 그리고 가정을 위해 적절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유기체로 파악한다. 비헤른의 특별한 업적은 글이나 실천적 단체구성을 통하여 당대의 흩어져 있던 복지행위들의 연관성을 정리했다는데 있다. 비헤른은 “모든 개별적 도움이 전체로 연결되어져 하나의 거대한 통일적인 도움체계”를 형성하는 것을 “사랑의 구축”으로 이해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 악과 고난의 현실은 “행동과 삶”으로 극복되어진다고 이해한다. 만인 사제직은 모든 사역자들에게 광범위한 구원사역에 참여케 한다. 이로써 각각의 개별화된 행동은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실천의 전체적 행위 안에 놓이게 한다.
비헤른의 현실이해는 신앙으로부터 구체적으로 각인되어진 것이다. 즉 그는 경험적인 사실인식에 근거하여 구원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비텐베르크의 교회모임에서 있었던 1848년 9월 22일 그의 즉흥 연설은 “사실들, 숫자들, 이름들”로 가득하다. 단순한 의견개진이나 추론들은 그에게 전혀 의미가 없는 것들로 간주되었다. 사실들을 인식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안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내적 선교를 위한 중앙위원회의 설립이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였다. 1848년의 혁명을 그는 반갑게 맞았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실들을 통해 행동의 필요성이 요구되어졌기 때문이었다.
비헤른은 외국에서 배운 구체적이고 혁신적인 일들을 통해 그의 개혁구상을 지치지 않고 수행해 나갔다. 절약 상점(Sparladen)을 통해 그는 소비자연맹을 고무시키고 시민광장 프로젝트를 통하여 가족에 적합한 주택단지조성, 여가시간, 교육 그리고 사회봉사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갔다. 후에는 노동자가족에 적당한 주택단지 조성을 공장주의 의무규정으로 요구하고 해결책도 범례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빈민구제와 가족, 병자(허약자와 노인) 그리고 자녀문제를 구분한다. 그는 영국에서 시작된 도시 안에서의 문제를 해결키 위한 도시선교(Stadtmission)를 설립한다. 그는 국내와 국외에 내적 선교의 연결망을 구축한다, 비헤른은 1857년 초에 프로이쎈 내무부로부터 교도소와 빈민을 위한 위원회의 중요한 자리에 임명을 받는다. 동시에 그는 베를린의 개신교 총연합회의 위원이 된다. 1858년 내적 선교 중앙위원회의 의장으로 그는 교회, 국가 그리고 사회의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고 기독교의 사회적 임무의 핵심적 역할을 해나간다.
하지만 사실상 비헤른 시대는 사회적, 개별적 도움의 형태가 지배적인 사회였다. 이런 원칙에 따라 모든 연령에 속한 이들이 곤경과 위험과 영적, 정신적 결핍으로 각인된 삶의 상황 속에서 도움을 찾고 있는 시대였다. 그러한 이들에게 상담, 만남 그리고 위로를 위하여 초대되었고 수많은 정착지, 구조원 그리고 병원으로 인도했다. 선포, 목회 그리고 특히 문서선교도 아주 밀접하게 이러한 디아코니아적 행동유형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비헤른의 업적은 보편적 요구 뒤에 있는 구체적인 표현 속에서 남아 있어야 했다. 비헤른의 이러한 사실은 디아코니아적 관점에서 교회와 신학의 새로운 방향설정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즉 비헤른의 라우에 하우스와 디아콘 학교 그리고 디아콘 협회(베를린의 요한재단 1858)에서의 사회교육학적 업적, 섬김직과 관련한 그의 구상적 사고 그리고 이것을 교회의 규정적 직제로 섬김직을 요구했던 것, 국가교회에 내적 선교를 통합하려고 노력한 점, 디아코니아의 기구를 연결하고 교회연합체를 구성한 점들은 내적 선교를 강화시켜 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과소평가 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나가면서
4월호부터 여섯 번에 걸쳐 섬김이란 주제로 글을 이어왔다. 섬김이란 용어가 개신교라는 종교적 외피를 쓰고 정치가, 학자, 목회자들에게 있어 하나의 붐인 차제에, 개신교적 섬김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글들이다. 정리해보면,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섬김은 갈릴리 청년 예수의 섬김운동으로 이어졌고 그의 뒤를 이어 지난 2000년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섬김 실천의 불꽃으로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개신교는 바로 이러한 섬김을 화두로 신앙의 개혁과 사회제도의 혁신을 이끌어 왔다. 세계에서 복지의 꽃을 피운 나라들은 바로 이러한 영향아래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개신교는 바로 이러한 전통 위에 서있다. 특히 지나간 십여 년 동안, 한국 개신교는 급변하는 한국사회와 함께 사회복지선교를 가속화하고 있다. 바람직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지난 십여 년의 경험은 우리에게 섬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한다. 이는 교회의 복지실천이 단순한 사회복지실천이 아니라 신앙으로 동기화되는 디아코니아실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기부여와 정체성 문제는 디아코니아 실천 150년이 지난 독일에서도, 신자유주의와 세속화 그리고 세계화로 인한 사회의 재편과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화두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아코니아운동의 초석을 이룬 비헤른은 여전히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헤른의 신학과 실천에 대한 연구는 섬김을 주제화하려는 한국교회에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 주리라 생각된다. 야웨의 섬김, 예수의 섬김은 좀 더 근본적으로 연구되어지고 학습되어져야 한다. 하여 이 땅에 섬김의 꽃이 만개하여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