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종교개혁에 의해 지구상에 새로이 출현한 개신교는 중세 가톨릭이 주장했던 성직계급과 교회를 통한 구원의 전달체계를 뒤흔들어 버렸다. 그 결과 믿음으로 새로워진 이들은 누구나 사제의 신분으로 하나님앞에 설 수 있다는 만인사제론이 개신교인의 자의식을 규정하게 되었다. 또한 믿음으로 새로워진 이들은 사랑으로 열매 맺는다는 명제아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복지혁명으로 이어져 16세기 초반, 유럽의 사회복지체계가 법적인 형태로 지반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종교개혁신학은 섬김의 신학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실천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개신교의 분명한 원칙들은 적어도 종교개혁 초기, 1세대 개혁가들의 활동기에는 살아있었다. 하지만 개혁가들의 사후, 개신교는 얼마 되지 않아 교리화, 정통주의화, 화석화되어 갔다. 이글에서는 어떠한 경로로 개신교의 본래의 명제들이 퇴색되었으며, 그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경건주의 운동의 ‘경건’과 섬김과의 관계를 조명하고자 한다.
개혁이전으로의 회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오랜 투쟁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로 일단락되었으나 17세기로 넘어갈 무렵,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그 결과 개신교측 제후들은 1608년 신교 동맹을 결성하였고 가톨릭은 1609년 구교 동맹을 맺는다. 그런 상황 아래 1618년 프라하의 대주교와 황제대리인들이 신교의 신축교회에 대한 철거명령에 대해 신교측 귀족들은 프라하에 모여 항의 집회를 갖게 된다. 황제가 이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자, 이들은 황제 대리인 2명과 서기 1명을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는데, 이 사건은 독일 민족에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처음에 종교적 패권을 두고 시작된 이 전쟁은 점차 세속적 이해관계에 대한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참여한 30년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강화조약으로 겨우 끝났지만, 독일은 1800만 명의 인구가 전쟁 전 수준의 3분의 1로 줄었다. 이로 인해 독일은 폐허가 되었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100년쯤 뒤로 돌린 심각한 장애를 가져왔다. 또한 이 전쟁으로 인해 국가의 빈자구호는 거의 전면적으로 정지되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새로이 부각된 구걸은 심각하게 대두되었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호는 더욱 요청되었다. 하지만 절대주의라는 표식속에 도시와 교회는 국가의 행정기구에 관련됐고 주정부에 종속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개인적 복지행위와 사회복지적 섬김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30년 전쟁(1618-1648) 과정 속에 개신교내에 중대한 전환점이 오게 되었는데, 종교개혁의 이상, 즉 만인사제설에 입각한 전적인 섬김, 신앙과 행동의 통일은 많이 변질되어 교권화된 성직자 중심의 개신교체제로 변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경건주의는 바로 이러한 성직자중심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교리로 인해 만인사제직이 밀려나는 것에 반하여 생긴 살아있는 그룹에서 출발한다. 즉 섬김공동체로서의 원시 그리스도교를 다시금 재생하고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 경건주의의 의도였다. 그리고 섬김의 표식 속에서 두 번째 종교개혁을 이어가고자 한 운동이었다. 사랑으로 동력화되고 실천을 지향하는 경건주의는 당대의 시류를 거스르는 하나의 저항운동이라 할 수 있다.
경건주의, 경건? 필자는 독일에 있는 동안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도시인 비텐베르크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루터의 흔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루터가 오랫동안 살던 집, 루터가 수천 번 설교한 교회 등, 그의 숨결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었다. 산책하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엽서가 있어 구입하였다. 그 안에 루터가 말한 다음의 문장이 있다.
Wer viel Bier trinkt, schlaft gut. Wer gut schlaft, sundigt nicht. Und wer nicht sundigt, kommt in den Himmel! Martin Luther (Aber im Himmel gibt es kein Bier, darum trinken wir es hier!
번역해보면, 맥주를 많이 마시는 사람은 잠을 잘 잔다. 잘 자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간다. 마틴 루터(하지만 하늘나라에는 맥주가 없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마신다!) 개신교의 틀을 마련한 루터에게서 나온 말이다. 미심쩍어서 엽서판매원에게 물었다. 진짜 그분이 한 말이냐고! 사실이란다. 그리곤 장광설을 더 늘어놓는다. 수녀출신인 루터의 부인은 아예 집에서 맥주를 담갔고, 루터는 하루에 2리터씩 드셨단다. 각설하고, 한국개신교는 주초문제에 대해 금기시하는 풍토가 아주 지배적이다. 그리고 주초문제를 신앙생활, 경건생활의 시금석으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하여 한국개신교인들이 독일교회에서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루터가 던진 이 말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와는 아주 다른 개방적이고 자유한 면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개신교는 진보적이고 가톨릭은 보수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 반대의 인식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개신교적 신앙과 경건 그리고 경건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건주의라는 단어에 대한 선입관은 세상을 등지고, 경건한 체하고, 유약하고, 자기 독선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인가. 경건주의는 실제 모험을 좋아하고, 개방적이고, 사회적 이상을 일상 속에서 민첩하고 분명하게 실천하는 능력을 가진 것과 연관된 말이다. 섬김실천의 전성기는 경건주의운동가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러한 경건주의는 종교개혁과 관련되어 있다. 마틴 루터는 그가 1516년 기술한 로마서 주석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신앙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신적인 활동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용기, 의미, 모든 힘들을 변화시켜 전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성령 안에 살아가게 한다. 오! 신앙은 얼마나 생명력이 있고 활동적인가.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쉬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앙 안에 사는 이는 그가 선행을 행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물음 이전에 이미 실천을 했는가와 행동 속에 항상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 경건주의의 본질을 발견케 된다. 즉 신앙과 사랑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경건주의는 개인성과 “더 나은 시대에 대한 희망”이라는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모든 믿는 이들의 섬김직”이라는 의미에서 만인 사제직을 재형성한다. 이를 통해 살아있는 공동체를 재형성하게 되고 “평신도”를 강화하여 상당한 역동성을 가져오게 된다. 그 결과 30년 전쟁과 절대주의의 결과로 형성된 계층화된 사회내의 질서를 경건주의 운동이 흔들어 놓았다. 또한 계몽주의는 휴머니티를 그리스도교적 책임 차원에서 근거짓고 교육했다. 루터의 영향을 받은 경건주의는 섬김실천이라는 표식아래 2차 종교개혁을 이어간다. 보편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이 운동은 교회 내적 섬김실천의 혁신에 머물지 않고 정치-사회적 지평으로 이어진다. 이는 종교개혁신학의 중심적 내용인 신앙과 행동의 통일, 세상 속에서 만인사제직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전적인 섬김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각 시대마다 등장한 경건주의의 세 인물들을 소개해본다.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p Jakob Spener): 구조를 통한 섬김 경건주의운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스페너(1635.1.13-1705.2.5)는 법률가의 아들로 북부 알사스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635년은 30년 전쟁의 중반기로 전쟁으로 황폐한 상황이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독일인구의 2/3가 폭력과 굶주림 그리고 전염병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청교도의 종교 문학과 요한 아른드의 “참된 그리스도교에 관한 네 권의 책”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즉 올바른 신앙에 대한 질문이 올바른 실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스페너는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엄격한 루터교 교육을 받았다. 이 도시는 이미 개신교의 영향아래 있었기 때문에 믿음과 경건실천의 분리, 경건과 실천의 분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1666년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프랑크푸르트와 드레스덴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는 유럽 전체의 개혁가로 간주되는데,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경험과 루터, 부쳐, 아른드 그리고 안드레아의 사상으로부터 개혁에 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학문의 넓이뿐 아니라 깊이 속으로 들어갔다. 스페너는 순수 목사 중심적 교회를 극복하고자 했고 평신도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그는 만인 사제설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성직자와 정치지도자들에게는 명백한 도전이었다. 그는 신자들이 서로 교제하고 신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규모 모임을 제창해 냈다. 특히 순수 정통 루터주의에 반대하여, “실천적 그리스도교”의 일환으로 경건주의를 이끌어 나가면서 사회적 곤경을 극복키 위한 실질적 프로그램을 실천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 1670년 경건주의가 교회 개혁운동의 출발로 삼은 프랑크푸르트의 ‘경건한 모임’이 탄생하였다. 그의 교회론의 핵심주제인 이 모임은 거듭남, 만인사제직, 초대교회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페너의 섬김실천적 개혁 의도는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각의 섬김실천적 책임을 구체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교구는 그들의 임무를 구체적으로 검증하고 공동체 국가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때문에 그는 현대 공적 복지체계의 아버지로 간주된다. 그로인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더 이상 기독교적 동정에만 의존하게 하지 않고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과제로”되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1666-1686) 스페너는 교회청의 담당자로 일을 하면서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개혁의 일환으로 교회와 헌금 규정의 연결을 효율적으로 시도한다. 그는 이러한 개혁과정에서 교구위원회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목표가 분명한 투쟁에 몸을 던졌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 고아, 노동자의 집을 통해 공적 복지사업을 하게 되는데, 이는 독일과 유럽에 하나의 모범적인 예가 된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 대해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스페너는 섬김실천에 있어 협력, 계획이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다. 결국 스페너로 인해 처음으로 “사랑이 구조 안에서, 구조를 통하여 실현되는” 사상이 조직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병원, 빈민구호, 병자구호, 노동촉진과 교육촉진이 지역적 국가적 보호아래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영향아래 1794년 프로이센법에 보편적 사회보조의무의 원칙이 가동됨으로 사회복지 법치국가의 새로운 장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스페너는 지역교회에서 빈자를 돌보는 일이 정치질서와 가정과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사랑이 추동자의 역할을 하고 그리스도교적 신앙이 동기부여를 가져다준다고 여겼다. 물론 그는 진정한 섬김은 빈자구호에 관여한다고 보았다. 이로써 동지적이고 자발적 자가 도움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그는 구걸의 철폐와 빈자구호를 제안한다. 1675년 스페너는 요한 아른트의 설교집 서문에 실은 경건의 요청(Pia desideria)이라는 글에서 교회와 개인의 그리스도적 삶을 위한 개혁적 소망들을 정리해서 프로그램으로 내놓았다. 여기에서 그는 모든 신도들이 보편적인 사제직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으며, 평신도들의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사랑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안에 사회 개혁에 대한 제안들도 있었다. 스페너는 더 나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필요함을 강변한다. 이를 위해 재생을 통한 전적인 의인과 성화가 교차되어야 하며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것을 강조한다. 전적으로 변화된 존재는 하나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자신의 의지를 복종시킨다. 이러한 새로운 존재는 영적인 은사를 강렬하게 소망하며 결국은 이웃사랑을 위해 투신한다. 그 외에 그는 이 문서에서 신학교육, 설교, 학문적 신학의 개혁을 요청한다. 스페너는 개인의 재생으로 변화된 새로운 사람들의 공동체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로 인해 종말론적인 지평위에서 전체 교회가 개혁되고 전 사회의 개혁으로 이어진다. 새 사람, 새 사람들의 공동체, 평신도들의 책임, 행동과 실천으로서의 그리스도교, 하나님나라의 사업, 디아코니아적 중요성을 강화한다. 스페너의 윤리는 특히 자연적 도덕의 거부를 통하여 디아코니아적 관심 아래 피조성, 인간성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다. 스페너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근본의도, 즉 로마서 서문에서 강조되는 것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신앙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로 태어나게 하는 신적인 활동이며 살아있고 행동하게 하며 강한 것으로 쉼 없이 선을 행하게 한다고 한다. 물론 강조점은 신앙의 열매로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성장도 포함된다. 루터의 보편적 사제직에 이어 모든 믿는 자들의 섬김직으로서의 “영적인”사제직도 새로이 효력을 가져오게 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안에서 전적으로 새로워진 이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개혁으로 나가고 결국은 총체적 사회개혁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트 헤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ke): 시설을 통한 섬김 2006년 독일을 방문하였을 때 필자는 구동독지역에 위치한 할레를 방문한 적이 있다. 헨델의 고향이기도 한 고풍스런 이 도시에서 경건주의의 거성인 프랑케의 흔적을 통해 느낀 감명이 아직도 새롭다. 300여 년 전에 세웠다는 섬김실천기관들의 규모와 품격이 21세기를 사는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할레 도시의 한 부분이 거대한 섬김실천단지인데 오늘날도 이곳에서 활발한 섬김실천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면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이끈 인물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프랑케(1663. 3. 22-1727. 6. 8)는 종교개혁의 전통위에서 섬김실천의 단초를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오늘날 개신교에서 “시설 중심의 디아코니아”라고 부르는 것은 프랑케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할레의 고아원을 설립한 것은 독일 디아코니아 역사의 분기점을 이룬다. 디아코니아의 새로운 형태가 생겨난 것이다. 즉 개인의 운동에 의해 세워지고 동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시설이 세워졌다. 프랑케의 삶의 흔적들을 찾아가보자. 1689년 프랑케는 신앙적 위기를 맞게 되고, 갑작스런 하나님 경험으로 이를 극복하게 된다. 이러한 회심체험으로 그는 성서의 진리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깊은 절망에서 빠져나와 갑자기 흔들림 없는 신앙을 갖게 되는데 이는 다음의 그의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사람이 손을 뒤집는 것처럼, 곧 모든 나의 의심은 사라졌다.” 특이한 것은 그의 회심은 개인적인 삶의 전환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그리스도교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당시의 정통신학자들과 분쟁을 야기 시켰고 라이프찌히와 에어프르트에서 밀려나게 된다. 할레로 옮긴 그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성서신학 교수로 일하면서 목사로 활동한다. 당시 할레는 계몽주의 철학과 정치이론 그리고 개신교주의의 도피처 역할을 하였다. 프랑케는 그의 스승 스페너를 1687년에 만나게 되면서 결정적으로 변화된다. 그리고 그의 경건주의 이론을 실제 실천 현장에 구체화하게 된다. 그는 신앙 안에서 -기독교적 교육을 통해 촉진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디아콘, 디아코닌(Diakon, Diakonnin)이라 주장한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목적을 위해 과감히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 “하나님의 전 사업의 촉진”, “모든 삶, 신분들의 실제적이고 보편적인 향상”, “전 세계의 총체적 개혁”이라는 표제어로 그는 전적인 섬김을 강조한다. 또한 “신앙의 기쁨(Glaubensfreudigkeit)”이란 운동으로 그는 놀라운 발전과 번영을 가져오는 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프랑케에게는 사회적 위기에 대한 도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각성과 회심이 중요한 화두였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처럼 낮아져 종의 모습이 되어 이웃에게 유용하고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보았다. 프랑케의 섬김실천은 1695년 이래 눈에 띄지 않게 시작되었다. 한주에 한번 가난한 이들이 후원금을 위해 목사관에 찾아 왔다. 이 과정에서 프랑케는 아동들의 무지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먼저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학비를 조달해 주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두개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이와는 달리, 고아들과 방치된 아동들을 위한 기숙사는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그 안에 학교와 교육시설이 생겨나게 되었고 독특한 학교도시로 발전해 갔다. 그는 이러한 다양한 교육기관을 통하여 개혁사상을 교육시켰는데, 이는 엘리트 지향적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즉 고아교육, 빈자 도움교육, 교사교육 시설에서 통전적인 교육 시설을 형성해 나갔다. 그의 고아원 구상은 17세기 후반부의 강제노동 교육소와 교도소라는 배경 아래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즉 이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을 위해 사회정치적 “다목적 무기”로써 간주되었다. 다시 말해 병자와 정신병자, 빈자, 실업자 그리고 반항적인 고용인, 고아와 비행청소년들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함께 지내게 되었다. 필수적인 부양, 징벌, 훈련 그리고 노동의무-이러한 다양한 기능과 목적이 혼합되어 시설물들이 형성되었다. 할레 고아원의 특성은 고아와 방치된 아이들이 삶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게 한다는 데에 있었다. 프랑케의 교육철학은 두개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진정한 경건”을 위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 안에 인간의 뜻을 세우고 “그리스도교적 예지”를 위해 교육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재능을 촉진시키는 데에 목표를 두었다. 이를 위한 재정의 마련을 위하여 프랑케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먼저 그는 전적으로 후원금에 의존하였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디아코니아적 교육기관들을 점점 회사들로 연결시켜 나갔다.(출판사, 인쇄소, 약국, 농업, 채석장) 이를 통해 사회복지 사업들의 경제적 기반이 형성되어 나갔다. 고아원은 “전 세계의 모든 신분들의 보편적 향상”을 위한 총체적 구상 속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모델은 엄격하고 금욕적으로 이행되었지만 개인의 본성과 차이를 고려하여 실행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빈자를 위한 도움, 아동 교육, 병자 구호, 장애인 구호가 이어졌다. 스페너에게 요구된 신학교육의 개혁은 할레의 프랑케가 실현했다. 특히 경건의 실천, 신조에 대한 논쟁을 제한하면서 성서적이고 실천적인 신학에 집중했다. 프랑케 재단안에서 학생들은 교육을 통하여 학문과 실천을 연결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개혁조치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할레로 모여들었다. 그의 바람은 교육기관이 모범이 되어 미래의 수공업자, 상인, 의원, 목사, 군인, 법률가들을 기독교적으로 훈련해내고 이들이 나라의 복지발전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디아코니아가 기존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예방적인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이 되도록 했다. 그는 교회뿐 아니라 교육을 통해 철저한 개혁으로 나가고자 하였고 독일을 벗어나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려 하였다. 이러한 할레의 디아코니아의 실천의 범주는 1704년까지 가지들이 퍼져 나갔다.(퀘니히스베르크, 뉘른베르크, 할버슈타트, 오스트후리스란트, 특히 스톡홀름, 모스크바, 런던) 그리고 할레에서 교육 받은 이들이 헝가리, 지벤스뷔르겐, 덴마크, 스웨덴, 이태리 그리고 동방으로 나갔다. 또한 대형 무역업체들은 해외로 연결을 맺었다. 프랑케는 내적 경제적 구조가 디아코니아적 관심에 직접적으로 관련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즉 그는 사적 자본을 동지적, 공동체적 회사 구조로 만들었다. 이로써 “할레 모델”은 산업주의 현실 내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프랑케는 30년 전쟁이후 일어난 기관 중심의 섬김실천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폰 찐센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공동체를 통한 섬김 필자는 2007년 여름, 독일을 방문하여 폴란드 접경지역에 있는 헤른후트를 방문한 적이 있다. 드레스덴에서 버스로 약 30분 정도에 위치한 아주 작고 예쁜 도시이다. 이곳에서 섬김공동체 운동이 시작되어 창조적 섬김실천의 모범으로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실험의 중심에 선 사람 찐센도르프, 그는 누구이며 그의 사상은 무엇인가. 찐센도르프(1700. 7. 9-1760. 5. 9)는 개신교 경건사에 있어 독특한 방식으로 디아코니아적 공동체 프로젝트를 시도한 사람이다. 즉 그는 자율성에 근거한 교회로 초대교회를 모범으로 삼고 섬김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목회적 관점에서 찐센도르프에게 있어 교회는 소그룹으로 나누어져서 “신뢰가 두터운 가운데 고난을 함께 나누는” 공간이다. 이를 위해 섬김실천 지향적인 직제가 만들어졌다. 빈자 구호자, 남성 병자도우미, 여성 섬김직, 여성 병자도우미. 찐센도르프의 교회적 섬김의 특성은 교육, 빈자, 병자구호, 나그네 숙박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공동체의 실험은 “대안 사회”의 성격이 내재하여 있는데, 평등이라는 특징적 요소로 후기 바로크 시대의 신분 사회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교회 안의 삶은 세상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임무를 목표로 하고 에큐메니칼적인 관련성을 지속적으로 연결해 나갔다. 찐센도르프는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 작센으로 이주한 오스트리아 귀족가문의 장관의 아들로 1700년 드레스덴에서 출생한다. 하지만 그의 출생 6주후, 부친은 폐병으로 사망한다. 부친으로부터의 영향은 다음의 그의 고백 속에 드러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앙으로 사셨다.” 찐센도르프는 그의 전 생애를 걸쳐 이러한 아버지 상에 매어 있었다. 또한 그의 모친은 스페너의 경건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프랑케의 추종자였다. 할레의 프랑케 재단안의 고아원, 학교, 약국, 출판사, 성서출판과 확산, 해외선교, 농업은 그녀에게 상당한 관심사였다. 비운을 겪은 찐센도르프는 모친의 재혼(1704)으로 조모 아래서 성장하게 되는데(10년간), 어려서부터 스페너와 프랑케의 개혁운동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의 조부모는 그를 할레 대학에(1710-1716) 보내어 프랑케 밑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1721년 법학을 공부한 후 결혼하여 드레스덴에서 공무원으로 일한다. 그런데 드레스덴에서 그의 일생을 변화시켰던 모라비아 교도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원래 박해를 피해 고향 모라비아를 떠난 후스파였는데 찐센도르프는 이들에게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이 정착지를 “주님이 지켜보시는 곳”이라는 뜻의 “헤른후트(Herrnhut)라고 불렀다. 그들은 2년이 채 안되어 150여 명의 대식구로 불어났다. 1727년경 이 공동체는 200여 명의 모라비아 이주자들 외에도 그들에게 합류하기를 원했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살게 되는데 이것이 “헤른후트 공동체”의 기원이 된다. 이 시기 헤른후트 공동체에서 특히 중요했던 것은 공동체 안에서의 “속회(band)” 등 소규모 모임이었다. “작은 공동체” 모임은 1727년 7월 처음 조직되었는데 보통 2-3명으로 구성되었고 일주일에 1-2회 보통 저녁때 모였다. 이는 모라비안 전통을 쇄신한 것이다. 1732년 이 공동체가 500여 명으로 늘어 날 무렵, 전체 속회의 수는 80여 개에 이르렀다. 특히 이 공동체에서는 1728년 5월 3일 처음으로 다음 날을 위한 성경구절(Losung)을 32개 가정에 전달한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한 구절씩을 제비뽑아 결정한 말씀을 다음날 하루 동안의 영적 무기로 여기는 이 운동은 오늘 날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1731년에 처음으로 매일성경이 책으로 출간되어 2008년 현재 278해째 지속되고 있다. 현재 50개 국어로 번역되어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와 신앙고백 그리고 세대를 넘어서 일상과 함께하는 말씀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지금까지 한국어판은 없다. 필자가 2009년도 헤른후트 매일성경을 번역출판예정 중이다.) 이 공동체는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는데 이를 간략하게 기술해본다. 먼저 독신 형제들의 양털실 제조업은 매우 번창하였고, 독신 자매들이 짠 천과 섬세한 자수품들은 유럽왕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헤른후터 공동체의 뒤르닝어회사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농장과 제과점은 모범적으로 운영되었으며, 모든 이익금은 공동기금인 “어린양의 금고”에 넣어졌다. 이 공동체 안의 모든 일은 “어린양”을 섬기는 일로 간주되었다. 헤른후트와 베들레헴을 비롯한 여러 정착촌의 모라비아인들은 공동체 생활 안에서 생산과 소비 양면에서 괄목할 만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재산 전체를 공유함으로 경제적·사회적·종교적 기능을 집중 결합할 수 있었다. 이 공동체는 삶의 개인적·경제적·사회적·종교적 차원들이 하나의 공통된 체계로 통합된, 하나의 “그리스도인의 가족으로서의 완전한 공동체”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일종의 섬김 공동체(Dienstgemeinschaft)였다. 찐센도르프는 원시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공동생활에 관심이 많았다. 할레 교육고등학교 출신으로 신학적으로 루터의 영향을 받고 교회 사회비판적 신학자 골프리드 아놀드의 영향을 받은 그는 교구의 내적 원칙으로 섬김 사상과 세계를 포함한 행동 원칙을 삼았다. 왜냐하면 세계에 퍼져있는 헤른후터 뿐만 아니라, 형제 자매단을 “하나님의 공화국”으로 하나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세계의 형성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아놀드의 “처음 사랑; 초대교회의 전적인 모사와 그들의 살아있는 신앙과 거룩한 삶의 열성적인 훈련”을 그와 그의 동역자들은 형제교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로 삼았다. 즉 그들은 형제 자매간의 사랑, 평신도 실천의 강조, 가정 방문, 사랑의 식탁과 발 씻어줌, 빈자와 병자 구호에 열심이었지만, 무역, 수공업, 공공경제를 통한 일들을 통해 디아코니아적 목표 -손님 접대를 기꺼이 함- 가 결코 소홀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병자, 과부 그리고 고아들에 대한 공동체의 보호의무가 장치되어 있었다. “헤른후터의 모든 주민은 노동을 하고 자신의 빵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그가 병들거나 재산이 없게 될 경우 공동체가 그를 돌보아야 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 현대적 의미에서 주택보조, 직업교육, 학교봉사, 영업 감독, 의료봉사 같은 사회적 시설도 있었다. 프랑케처럼 찐센도르프는 사회와 교회 현실의 새로운 형성을 위해 종교개혁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사상과 하나님과의 동역의 사고아래 디아코니아를 실천해 나갔다. 그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지배 하에서 행하고자 했다. 여기에 루터적 은혜보편주의가 개혁적 행동주의와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세상 안에 그리스도교적 삶의 디아코니아적 근본구조가 분명하게 되고 당시 세상의 많은 영역에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이러한 형태에서 생동감 있고 성숙한 디아코니아적 교구의 수많은 직분들을 볼 수 있으며, 공동 경제적 생산 형태와 함께하는 과제들과의 연결을 통해 “바닥교회”의 모델을 발견하게 된다. 형제공동체의 하나의 특징은 풍부한 직제의 훈련이다. 특히 루터교회 영역에서 다양하게 분화된 직제의 도입은 아주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하고 동급의 직제들이 평신도 직제로서 보수 없이 행해졌다. 구체적으로 행정적, 목회적 그리고 디아코니아적 직제이다. 이 형제공동체에서의 직제의 의미는 그 자체가 디아코니아라는 의미이다. 모든 직분을 가진 이들이 지배가 아니라 발을 씻기는 섬김을 나열하면 원함으로 직제의 디아코니아적 구조가 구체화된다. 또한 헤른후트의 경제적 삶은 초기부터 디아코니아적 프로그램의 관점에서 확장되어 나갔다. “우리는 그의 이름에 따라 명명된다, 하나의 관심, 하나의 경제; 우리는 다른 이웃을 위하여 하나로 여기에 존재한다”. 이러한 찐센도르프의 근본 의도는 실천을 통하여 확장되었다. 이런 원칙으로 모든 일들이 진행되었고 경제생활은 사회복지적 기준아래 각인되었다. 헤른후트 형제단은 1760년까지 200개가 넘는 형제단이 지구상의 많은 지역에 생겨났다. 현재 30여 개의 나라에 약 82만 명의 형제들이 속해있고, 특히 아프리카에만 48만 명이 가입해있다. 이들은 수공업이나 경제적 사업에 참여하고 있고, 병원, 학교, 양로원, 유치원등 디아코니아적 실천이 헤른후터 공동체 교회를 통하여 진행되고 있다.
나가면서 우리는 개신교 역사 속에서 치열하게 섬김의 실천을 이어온 경건운동가들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스페너는 구조 안에서 하나님 사랑이 운동하는 사상을 그의 경건실천을 통해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섬김은 알량한 기독교적 동정이나 개인적 자선에 그치지 않고 공적 복지체계 안에서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유아기적인 복지체제 수준의 한국 땅에서 진정한 의미의 섬김은 성장-고용-복지라는 고리에서 성장기조에만 치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좀더 과감하게 복지체제를 구축할 것을 요청받는다. 개신교인들의 경건실천은 복지체제를 위한 연대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프랑케는 대형 섬김프로젝트의 대가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의 복잡한 구조는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즉흥적인 섬김실천에서 벗어나 예방적이고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섬김을 요구받는다. 이에 대한 역사적 실험을 우리는 프랑케의 할레 모델에서 찾을 수 있다. 1990년 중반이후로 한국개신교내에 기독교 사회복지 운동이 표면화되고 있다. 전문성과 고백성을 동시에 갖춘 기관을 통한 섬김실천은 앞으로 더 확대재생산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를 통한 섬김실천의 원형, 헤른후트 형제단은 개별교회에 자율권을 가진 한국개신교 교회에 아주 의미있는 범례를 던져준다. 공동체로서 교회공동체가 섬김을 화두로 지역에서 이루어낼 실천은 다양하다. 창조적 섬김의 원형인 헤른후트 공동체운동은 기구화되고 관료적인 형태의 틀을 벗어나도록 계속해서 우리의 창의적인 섬김실천을 추동시킨다. 만약 오늘 한국교회에 18세기 경건주의 운동가들이 온다면 어떻게 행동을 할까? 세상을 장망성으로 치부하고 깊은 산속에서 세상과 절연한 채 명상과 자기수련에만 몰두할까? 아니면 야웨의 섬김, 예수의 섬김으로 깊이 들어가 이웃을 향한 섬김에 투신할 것인가? 질문 속에 답이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 5:23-24)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은 이웃의 짐을 책임적으로 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진정한 경건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책임적인 행동을 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이와 무관한 예배와 의식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예수는 명토박아 둔다. 이랜드 사태를 우리는 알고 있다. 80만원 월급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량해고하여 생계의 위협으로 몰아간 이 회사 사장이 개신교의 장로란다. 그는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십일조헌금으로 130억을 내신단다. 경건생활은 먼저 이웃, 즉 사회적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화해하고 소통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먼저 수많은 날들 동안 복직을 위해 탄원하는 노동자들과 화해하고 소통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공공의 복지기반이 허약한 이 땅에서 경건을 실천하는 일은 현재 당면한 복지의 과제들에 구체적으로 관심 갖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기초연금, 아동수당, 무상보육, 고교의무교육, 대학지역균형 선발제, 비정규직 감축, 충실한 의료보장… 경건주의 인물들이 이 땅에 다시 온다면, 이런 일에 전력을 다하지 않을까. 물론 먼저 야웨 하나님에게로 깊이 들어가는 과정이 필수적이리라. 먼 옛날 예레미아 선지자가 그토록 희구했던 “좀 더 나은 세상”(예 29:7)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