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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디아코니아(3)-예수의 섬김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1090
디아코니아(3)
예수의 섬김
홍주민_한신대학교 연구교수

지난 호에는 ‘섬기는 존재’이신 야웨 하나님의 섬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구약성서에 계시된 야웨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다신적인 상황에서 다른 신들, 특히 바알 신과 달리, 사회적 약자들과의 당파적 연대와 무조건적 사랑으로 자신을 성격화한다. 이러한 성격은 이웃 사랑계명, 십일조법, 사회적 약자보호법, 사회경제법들로 구체화된다. 즉 구약성서는 이러한 야웨의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섬김 실천에 대한 문서모음이다. 이러한 구약성서 전승과 공동체내의 섬김 실천에 익숙한 예수에게 있어 섬김은 어떠한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가?

야웨의 영을 받은 예수
예수는 야웨 하나님의 영을 받고 그의 사역을 시작한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눅 4:18a).” 여기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가? 이들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곤경에 빠진 이들과 예수가 예로 언급한 옥에 갇힌 사람들, 눈먼 이들 그리고 억눌린 사람들(눅 4:18b)의 총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는 가난 자체에 복이 있다고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한 사실이다.(눅 6:20) 예수는 그의 선포와 행위 속에서 늘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한다.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눅 12:16 이하)와 부자청년 이야기(마 19:16 이하) 그리고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 이야기에서(눅 16:19 이하)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에 대해 예수는 말한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 따르기가 더 쉽다(막 4:19; 10:21)고 한다. 예수는 또한 물질이 목숨을 얻게 할 수 없다고 주지시킨다.(마 16:26) 또한 예수를 따라가는 이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염려로 영향 받아서도 안 된다(마 6;19 이하)고 한다. 더욱이 마지막 남은 동전을 헌금으로 바치는 가난한 과부의 믿음이 풍족한 가운데 쓰고 남은 것을 바치는 부자들의 것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눅 21:1이하) 결국 예수는 건강한 사람, 의인, 부자들이 아니라 죄인, 가난한 사람들, 병든 이들에게 그의 나라를 약속한다.
죄인들과의 식탁공동체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당파적 행위 그리고 귀신축출, 치유행위 등, 예수의 섬김은 포괄적이고 전체적이다. 즉 예수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무조건 사랑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무제한적으로 신뢰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또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섬김으로 이미 현실이 된다.
초기 예수 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섬김과 예수의 섬김 그리고 야웨 하나님의 관심은 일치한다. 야웨의 영을 받은 예수는 그의 전권을 제자들에게 위임하고 동시에 그들에게 전적인 섬김을 요구한다. 또한 이러한 섬김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는 예수의 언명은 구약성서에 상응하여 나타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 6:36) 또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동시에 예수자신과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요구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또한 섬김을 위한 파송 명령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즉 자비하고 완전한 야웨의 섬김을 예수는 자신이 몸으로 살아내고 이를 제자들에게도 요구한다.

예수, 시중드는 이
그리스도교 교회의 초기 형성기에 교회로 하여금 전적인 새로움과 세상을 변혁케 하는 힘을 가져오게 한 요인은 바로 섬기는 자(Diener, Diakon)의 교회로 태동되었다는 점이다. “누가 더 높으냐?” 예수는 계속해서 묻는다.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밥상 앞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나는 시중드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다.”(눅 22;27) 말 그대로 “… 섬기는 이로.” 바로 섬김의 표식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고 예고된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 자신의 머릿속에 상정한 메시야 상에 대한 혼란을 겪는다. 제자들은 그들 중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대한 논란을 벌인다. 제자들은 영광의 주(主)의 교회가 되기를 원했지, “시중드는 이 같이” 여겨지는 주의 교회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께서 영광 받으실 때에 예수의 왕좌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원했다. 하지만 예수는 단호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막 10:43) 즉 섬기는 자만이 큰 사람이고, 섬기는 이가 주다. 많은 종교지도자나 정치 지도자가 예나 지금이나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즐긴다. “나는 섬기는 자다. 하지만 지배자로서 나는 섬기는 자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의 지배권을 장식하려 하고 변장한다. 하지만 예수는 정반대로 말한다. 이 세상의 지배자들은 섬기지 않고 지배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와 있다.
로마의 발덴저 대학 신학과 교수 파오로 리카(Paolo Ricca)가 1992년에 행한 강연에서 시중드는 자 예수에 관하여 도발적인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신약성서 안에는 예수에 관한 많은 명칭이 있다. “놀라운 것은 예수 자신이 ‘섬기는 자’, ‘시중드는 자’ 라는 명칭으로 유일하면서도 명백하게 자신을 ‘규정’했다는 사실이다.” “왜 누가복음 22장 27절에서 예수는 ‘시중드는 이처럼’이라고 말하는가…시중드는 이처럼 그는 주(主)요 스승이다.” 이것은 놀랍고도 충격적인 사실이다. 예수 안에서 커다란 전환, 신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지배의 방법과 양식이 ‘섬기는 것’, ‘시중드는 이’로 전환 되는 것이다. 시중드는 이로 되는 것이 스승 됨의 ‘방식’이 된다. “예수에게 있어 섬기는 것은 그 자신의 삶의 하나의 역할이 아니라 그의 삶 존재 자체이다. 동시에 그의 오심의 근거요 내용이다.(막 10:45)예수는 ‘섬기는 자’(Diakon, Diener)가 되기 위해 왔다.”
섬김을 사회 윤리적 측면에서 연구하는 독일 뮌스터 대학의 기독교사회학 연구소를 기초한 벤드란트(H. D. Wendland)는 1962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 “그리스도-섬기는 이, 그리스도-종(Christos Diakonos, Christos Doulos)”에서 섬김의 성서 신학적 근거, 특히 섬김의 기독론적 근거를 서술한다. 사회 윤리학자이자 동시에 성서신학자인 그는 “신약 성서적 원 역설”을 바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서보도 안에서 드러낸다. 즉 왕적이고, 신적이고, 미래 세계와 우주의 심판자 그리고 구원자는 ‘섬기는 자’와 ‘종’으로 서술된다. “이로 인해 예수는 종말론적 구원자 그리고 해방자 특히 섬기는 자가 된다. 그리고 그의 전 삶을 통해 이러한 섬김이 포괄적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구유 안의 아기 때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존재로서 그의 모든 행위와 모든 말씀 속에 섬김이 내재하여 있다.” 벤드란트는 고대사회의 전체 가치체계가 이러한 기독론적 혁명으로 인해 붕괴되었고, 결국 고대의 전체위계질서와 가부장적 사회질서가 와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정치적 결과들뿐만이 아니라 인간학적이고 교회론적인 측면에서도 모든 인간 가치의 전복과 전향을 불러 일으켰다. 섬기는 자로서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이들 안에 살아 있고, “교회의 디아코니아적 실존”의 기반을 이룬다. 그래서 교회는 고난과 죄 가운데 있는 세상에서 역동적이고 종말적인 보루이다. 본회퍼가 “그리스도인은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 옆에 선다”고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이요 종이신 그리스도의 현존 속으로 들어간다.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있어서 예수의 전 삶과 행위는 “섬김”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자기희생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막 10:45)로 귀결된다. 또한 “섬기는자(Diakon)” 예수는 마지막 만찬과 연결되어 묘사된다.(눅 22:7 이하) 그리고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으로 인식하면서 행동했고, 무력함과 섬기는 사랑의 종으로 살아가다가 결국은 십자가에 달리셨다.(비교. 요 13:2-5, 빌 2:5-11) 예수의 섬김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화해의 디아코니아의 깊고 포괄적인 차원 속에 있다.

서열의 역전
‘섬김’이라는 단어는 성서 안에 아주 다양한 형식으로 전승되어졌다.(막 10:43 이하, 마 20:26 이하, 눅 22:26 이하, 마 23:11, 마 9:35, 요 12:26) 여기에서 본래의 아람어적 단어군은 확실히 재구성할 수 없다. 이들 가운데 가장 오래 보존된 구절은 마가복음 10장 43절 이하이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이는 너희의 섬기는 이가 되어야 한다. 누구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섬기는 사람(diakonos)’과 ‘종(doulos)’은 평행구로 나오며 ‘큰’과 ‘첫’은 동의어로 쓰인다. 여기에서 제자그룹 안에서 지배관계의 급진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여기에 중요한 주제가 담겨있다. 왜냐하면 ‘섬김’, ‘낮아짐’, ‘겸손’이란 단어는 당시 헬레니즘세계에서는 매우 낮은 평가에 속하는 언어군이었기 때문이다. 플라토의 고르기아스 491에 의하면 “사람이 누군가를 시중드는 것이 어찌 복된 일이 될 수 있느냐?”라는 표현이 나온다. 분명한 것은 성서에서는 ‘큰’과 ‘첫’ 그리고 ‘섬기다’, ‘종됨’이 분명하게 반대적 위치에서 의도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유대교적 전승에 자비하신 하나님이 빈자와 힘이 없는 이들 편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물론 예수는 더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막 10:45)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오심의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예수의 인간에 대한 전적인 헌신, 특히 빈자, 병자, 귀신 들린 자, 작은 자, 여성 그리고 종교적 소외자들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야웨 하나님의 중심 계명인 이웃사랑 계명이 이어진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에게 있어 ‘섬김’이 결코 타협이거나 상호간의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섬김’은 요한복음에서의 발 씻음(요 13:4이하)이나 누가의 종으로 오시는 재림하는 주님의 ‘섬김’(눅 12:37)으로 형상화된다.
이러한 예수의 말에서 시작된 ‘섬기다’라는 단어군은 복음서 전승에서 점점 더 제자들의 표현으로 특화된다. 마가복음 9장 33-37절에서 ‘섬기다’라는 단어는 하나의 아포프테그마로 연결되어 인자의 고난, 죽음, 부활로 연결되고 두 번째 고지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누가 큰 자인가라는 주제로 싸우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답한다. “누구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이의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이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막 9:35) 예수는 한 아이를 가운데 데려오고 ‘작은 자’를 기쁨으로 영접한다. “이런 아이들을 나의 이름으로 맞이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치 않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치 않는 것이다.”(막 9:37)

예수 제자들의 섬김
예수의 오심은 인간에 대한 전적인 ‘몸 던짐’이었고 그의 제자들은 이를 계속하여 실천해 나갔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결코 고정된 거주지가 없었다. 그들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기 위해 이스라엘 지역을 다녔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방랑하는 떠돌이 구걸자들과 비교된다. 종교적인 이유로 떠도는 구걸자들은 당시 이스라엘에 고대 세계 안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있어 철저한 가난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다. 즉 식량 주머니, 신발 그리고 돈주머니는 금지 된다.(눅 10:4) 다른 전승에 따르면, 여분의 옷(마 10:10, 막 6:9)도 금지된다. 가난, 가족 없음, 고향 없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예언자적 표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모든 판단의 척도와 지배관계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빛 아래서 철저화했다.
타이센(G. Theissen)에 의하면, 예수의 ‘방랑 급진주의’는 갈수록 강화된다. 다른 방랑 설교가들과는 달리, 예수운동은 두 가지로 특화된다. 하나는 방랑 설교가에게 있어 돈벌이는 선포를 통해 금지된다. 이것은 마태복음 10장 9절에 분명히 나타난다. 금, 은, 동전을 지갑에 넣고 다니지 말라. 다른 신약본문에도 계속하여 이런 말씀이 나온다.(계 22:17, 딤전 6:5;참조 고후 12:16-18, 디도 1:11)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참조 고후 11:7, 계 21:6) 다른 한편 예수의 방랑 사신들은 다른 방랑 설교가와는 달리, 목적이 분명한 정착 공동체들을 설립한다. 이러한 정착 공동체들은 손님을 환대하고 도움을 준다. 이렇게 정주해있는 예수 공동체 구성원의 손님 환대는 그리스도교적 섬김의 뿌리를 이룬다. 방랑하면서 예수를 따르는 형제들과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섬김은 예수에 대한 섬김으로 나타나고 그를 보내신 이를 영접한 것으로 이해된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서 예수의 작은 형제들에 관한 말씀은 유대인들의 사랑 실천과 비교하면 변화된 형태를 띠고 있다. 재산 없는 신부의 지참금, 죽은 이를 동반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는 것은 마태복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고 병자와 옥에 갇힌 자를 방문하는 것이 등장한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은 ‘예수의 작은 형제들’, ‘작은 자(마 10:42, 18:6-10)’에게 해당된다.(비교. 마 12:49 이하, 28:10) 그들을 영접하면 예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다.(마 9:35, 마 10:40)

초기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섬김
누가의 사도행전 보도(행 2:42-47, 행 4:32-35)는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공산주의’를 그리고 있다. 이 보도에 의하면,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사도들의 가르침, 공동체, 빵의 나눔, 기도(2:42)’로 성격화된다. 그들은 자신의 재화와 소유물을 팔아 필요에 따라(2;45) 나누었다. 아무도 사적 소유가 없었고 공동으로 소유했다.(4:32이하) 그 결과 그들 중 아무도 부족한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자신이 판 것을 사도들에게 내어놓고 필요에 따라 나누었다.(4:34 이하)
누가는 고대철학의 이상적인 표현방식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형상화한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적 소유 없이”라는 표현은 프라토의 이상적 국가를 상기시키고 후기의 피타고라의 이상적 공동체와 고대의 친분관계윤리를 연상시킨다. 그는 성서의 언어도 불러일으킨다. ‘한 마음과 한 영혼’(행 4:32), ‘한 장소’(행 2:44) 그리고 ‘부족한 사람이 없었다’(행 4“34)라는 구절은 성서적으로 각인된 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묘사는 단순히 사장되지 않는다. 예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공동식사를 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른 유대교적 공동체, 예를 들어 에세네파가 공동식사를 행한 것이 사실일 뿐만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식사한 것에 대한 기억, 특히 마지막 고별식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공동식사는 이스라엘 땅,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기근의 위협에 처한 상황에서 사회적 보장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예수의 많은 제자들이 이방 출신이었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었다. 예수의 주요 영향권과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갈릴리와 연관이 있다. 이들은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하지만 예루살렘 안의 예수공동체는 다른 예수 제자그룹들의 방문을 받는다. 결국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히 -다양한 에세네적 그룹들에게서 이미 알려진-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에 에세네파가 있었다는 말이다. 분명한 것은 초기 예수 추종자들 가운데 공동생활형태가 존재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비록 당시에 사적 소유나 그에 대한 관리에 대한 고정적인 규정이 없었지만 말이다. 바울도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 많은 빈자들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제하고 있다.(롬 15:26, 고후 9:12)


바울의 선포안의 ‘섬김’
바울 서신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신약문서 중 diakon이라는 단어군은 매우 열린 체계로 사용된다. 즉 바울은 “다양한 섬김”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주도 하나요 그와 같다.”(고전 12:6). ‘섬김’의 평행구적 표현은 ‘은혜의 선물’(charismata)이요, ‘힘의 영향들’이다. ‘섬김'은 ’은혜의 선물‘처럼 프로그램적 개념이다. 모든 ‘은혜의 선물’은 거룩에 대한 선포와 방언과 ‘도움 유형’, ‘기능 수행’들로 이 모든 것은 동시에 ‘섬김’이다.(고전 12:28) 즉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섬기는’ 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과제를 ‘섬김’으로 이해한다.(고후 3:3, 6-9, 4:1, 11:8, 롬 11:13) 이는 ‘화해의 섬김’으로 나아간다.(고후 5:18) 바울 사도는 복음과 교회를 ‘섬기는 자’이다.(골 1:23, 25; 엡 3:7, 딤전 1:12) 하지만 바울의 동역자들은 공동체를 위한 그리스도의 ‘섬기는 자’이고 바울서신 중 여러 곳에서 사도는 ‘섬김’으로 표현된다. 이 섬김은 모든 경우 기본적으로 선포이다. 단지 로마서 12장 7절에서 섬김(diakonia)은 예언과 가르침 사이에 있고 특별한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에서는 선포가 아니라 사회적 영역에서 실제적 섬김이 문제시된다. 즉 바울에게서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단어는 섬김을 위한 기술적 표현이 아니다.
또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섬기는 자(diakonos)가 선포를 위한 직제표현이었다는 것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후에 라틴어 유사어인 ‘minister’가 이러한 기능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 단어가 특정 개인 그룹에 제한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은 성서적으로 그리 큰 설득력이 없다. 바울의 반대자들도 그가 고린도후서에서 보여주듯, ‘그리스도의 종’으로 표현된다.
교회전통 속에서 가장 중요한 직제가 ‘종’(minister)으로서의 선포직이고 이 선포직안에 권력이 숨겨져 있다는 용어사용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예수에게 있어 섬김은 이웃에 대한 섬김,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었지 하나님에 대한 또는 예수 자신에 대한 섬김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바울은 예수의 언어 사용을 받아들인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자로 존재했다.


다른 이의 짐을 지는 섬김(갈 6:2), 그리스도 복음의 사회적 발현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는 섬김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과제이다. 하지만 ‘신앙의 동지들에 대해(갈 6:10)’ 더욱 그러하라고 바울은 말한다. 데살로니가서 3장 12절에 “서로 사랑하고 모든 사랑이 풍성하게 되고 넘치게 되기를 빕니다.” 이는 공동체에 집중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바울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사회적 문제’를 근본적인 문제로 알지 못한다. 여성들의 소외, 노예의 소외가 그에게 있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관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의 공동체이다. 여기에 수평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누가는 급진적인 사적 소유 포기를 통한 원시 공동체를 말한다. 소유를 파는 것으로 빈자에 대한 자선이 가능해진다.(눅 12:33) 예수에게로의 회심은 빈자를 위한 사회적 참여없이 가능치 않다(눅 3:10-13, 16:9, 19:8-10)는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물신 숭배는 동시에 될 수 없으며(눅 16:13)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행 20:35)는 예수의 말씀은 이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하겠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에 보낸 헌금에 대해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내가 마음을 다하여 해오던 일이었다(갈 2:10)’고 한다. 특히 헌금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의미)이며 신학적 상황을 말하고 있다.(고후 8) 헌금은 사회적인 면이 있고(고후 9:12) 성도들의 부족을 채우는 데에 기여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빈자들(롬 15:26)에게 규정된다. 바울은 단순한 ‘헌금’개념을 넘어 포괄적인 연관성을 제기한다.(행 24:17). 헌금은 성도들을 위한 ‘섬김’(diakoneo)이다.(롬 15:22 참조 고후 9:1) 이러한 섬김은 그 자체로 감사기도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 헌금은 그리스의 이방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마케도니아, 예루살렘 교회(롬 15:26이하)를 향한 포괄적인 ‘공동체(koinonia)’의 표현이다.(고후 9:13) 헌금은 ‘사랑의 증거’(고후 8:24)요, 은혜의 넘침이다. 이에 대한 마지막 근거는 예수가 너희를 위해 가난하게 되었고 그가 부함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너희가 부요해 진다(고후 8:9)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야웨 하나님의 섬김의 표식인 의식, 법, 그리고 긍휼은 원시 그리스도교에서도 지속된다. 특히 주의 만찬과 사랑의 식탁, 예배와 섬김과의 관련성은 다양하게 입증된다.(비교. 행 2:42 이하, 고전 11:17 이하) 여기에서 고대 사회의 사회 정치적 의미 안에서의 법 차원의 성격은 희박해진다. 그 대신에 모든 이가 다른 이들에게 섬김의 의무를 지는 교회안의 섬김이 지배하게 된다.(비교. 벧전 4:10 “모두 자기가 받은 은사를 따라서, 서로 섬기시오”) 이는 유대적 전통인 과부 돌봄, 빈자 구호 그리고 병자 간호의 전통 속에서 질서화된 섬김직의 초기형태에서 아주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미 초기 단계에서 에큐메니칼적 섬김의 단초들도 나타난다. 물질적으로 적정 수준에 있는 교회는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한다.(갈 2:10, 롬 15:2, 고전 16:1 이하)

나가면서
구약성서에서 계시된 야웨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들을 ‘섬기는 존재’로 자신을 성격화한다. 이러한 야웨의 의지와 행동을 담은 문서인 구약성서는 ‘야웨의 섬김’이 주제인 동시에 하나의 맥이다. 이러한 히브리 전통위에 등장한 예수는 야웨의 영을 입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자신을 ‘시중드는 이’로 규정한 예수는 제자들이 기대했던 ‘영광 속에 섬기는’이가 아니라 ‘섬기는 자’ 그 자체가 된다. 그리하여 예수는 지배를 위해 섬김을 이용하는 당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행태에 정면으로 충돌한다. 예수의 섬김은 소요를 일으킨다. 정의롭지 못한 구조와 정면으로 불화하고 거짓된 탈을 가차 없이 벗겨버린다. 또한 무정하고 차가운 세상의 기류에 따스한 사랑과 연대의 바람을 일으킨다. 이러한 예수의 섬김은 제자들의 헤게모니쟁탈에 새로운 지표를 던져준다.
예수의 섬김은 결코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 그리고 말로만의 섬김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몸 전체를 던짐으로 섬김의 삶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섬김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처음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격으로 나타난다. 그 안에는 서열화된 권력구조가 없었고 모든 것을 유무상통하는 공동체였다. 이는 단지 정신적인 의미에서 만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공유하는 연대적 공동체였다. 즉 자신이 사용하고 남은 잉여물로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영을 입고 자신을 전적으로 이웃에게 던진 ‘섬김 공동체’였다.
이러한 연장선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초석을 마련한 바울, 그는 자신을 ‘섬기는 자’로 이해한다. 그에게 있어 예수 사건은 ‘화해의 섬김’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었고, 그로인해 새로운 존재가 된 인간은 하나님의 섬김의 도구로 이 땅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분열되고 갈라진 이 세상에서 오늘도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섬김운동에 동지로 부름받는다. 이러한 ‘섬기는 존재’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른 이의 짐을 대신 져주는데 기꺼이 투신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예수의 섬김이 지배하는 교회, 그것은 단지 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