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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디아코니아(2) -야웨의 섬김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1095
디아코니아(2)
야웨의 섬김
홍주민_한신대학교 연구교수

당신이 어떠한 해석학적 안경을 쓰고 성서를 읽는가에 대해 말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섬김에 대해 어떠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수 있다.
- 클라우스 뮬러


지난 호에서 필자는 ‘섬김의 르네상스’란 제하에 독일의 섬김운동과 실천 그리고 섬김학의 학문화과정과 개념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구약성서의 섬김에 대한 근거들을 정리해본다. 우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와의 관련성 부분을 언급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디아코니아라는 단어가 헬라어이고 신약원전에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섬김에 대한 내용이 구약성서에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일반적인 인식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이웃사랑계명과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신약성서를 섬김의 발원지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G.Uhlhorn, J. Wellhausen) 역으로 신약성서에 나오는 섬김의 내용들은 구약성서에 이미 나오는 것이라 하여 구약성서를 강조하는 경향도 있다.(R. Weth) 하지만 이러한 경향성은 하나의 오류이다. 우리는 구약성서적인 배경 위에서만 신약성서의 섬김을 이해를 할 수 있다.
구약성서와 관련하여 섬김의 근거를 찾는 일은 두 개의 성서, 즉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자비하고 긍휼하신 야웨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한 하나님의 사신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신약성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다양한 섬김의 주제들을 구약성서 안에서 서술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성서적 사회법, 십일조 규정, 이웃사랑계명,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문제, 야웨와 바알과의 관계 등을 말할 수 있다.

섬김은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독일 디아코니아운동의 선구자 요한 힌리히 비헤른(1808-1881)은 섬김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1856년 “섬김과 섬김직에 대한 평가서”에 서술한바 있다. 이 평가서에서 그는 초대교회처럼 독립된 직제로서 섬김전문사역자(Diakonat)를 세울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없으면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보살핌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비헤른은 이 평가서에서 그 자신의 섬김에 관한 신학적 관점을 포괄적으로 밝힌다. 그는 섬김을 “신·구약 성서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로 보며 특히 “이미 약속되었고 아직 성취되지 않은 구원의 발전과정”으로 서술한다. 또한 섬김은 에큐메니칼적 입장에 선다. 그는 교회사적 관점과 하나님나라의 역사관점을 구분한다. 그래서 “인간세계에 깊이 들어가 고난을 깊이 이해하고 깊이 있고 적절한 도움을 주기위해” “하나님으로 깊이” 되돌아 가야한다고 강변한다. 또한 모든 내적 영향력을 끼치기 위한 지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준비되는 계시”에 있다고 주장한다.

비헤른은 섬김의 역사가 이스라엘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비헤른에 의하면, 크신 긍휼로 돕고, 구원하고, 수발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의 곤경과 고난으로 향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교의 계시이전에 광채 나는 빛을 발한다. 이러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족을 선택하시고 성별하셔서 하나님의 가족을 위한 민족을 세우셨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개념은 섬김에 대한 비헤른의 중요한 사고의 표현이다. 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계시’로 왔다. 하지만 이 계시는 이미 구약성서의 옛 계약의 하나님의 백성 속에서 계시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섬김의 가족(diakonische familia Dei)’으로 세우셨다. 그리고 이러한 신적인-섬기는 사랑은 사람들에게 돕는 사랑의 실천과 정신 속에서 나타난다. 야웨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내린 율법을 통해 보여주신 계시는 궁핍한 사람, 빚진 사람, 고아, 과부 그리고 나그네, 옥에 갇힌 사람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이는 당시 헬라, 로마지역에서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비헤른은 주장한다.
비헤른은 섬김의 개념을 정리하면서 섬김의 연대적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야웨 하나님은 백성을 섬기는 자(Diakonus)로 이스라엘의 가난한 백성들을 돕고 보호하신다. 또한 야웨 하나님의 섬김에 의존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는 상호간의 섬기는 이들 간의 연대로 이어진다. 이러한 연대공동체적인 성격은 일방통행식 도움과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도움행위자들의 거만함, 약자에 대한 강자,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자만심을 버리도록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섬김을 위해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기가 받은 은사에 따라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섬기십시오.”(벧전4,10)

성서의 사회법: 사회복지법의 효시
고대 근동의 자비정서는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는 권위주의적인 구조를 통하여 성격화되었다. 즉 당시의 복지행위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부한 자나 강자의 호의였다. 그러한 복지행위는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관계의 표현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권리가 없고 힘이 없기 때문에 부한 사람들의 자비에만 희망을 둘 수밖에 없었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로마적인 인간사랑에 대한 이해는 민주적이고 공화국적인 법률들을 배경으로 평등하고 보편적인 성격으로 나아가게 됐고 특수한 빈자구호에 제한되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즉 고대 근동에서는 복지 행위가 순수한 호의의 형태 속에서 진행되었다면 그리스인들은 법으로 형성해 나갔다는 것이다.
고대 동방세계의 법은 왕으로부터 선포된 국가법으로 판결에 영향을 주는 법이었다. 하지만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법은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시내산에서 주어진 것으로 신학적 종교적 중심 요구를 포함한 법이라 할 수 있다. 신명기 4장 8절에 “이런 율법 바른 규례 법도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 있는가?”라는 말씀이 있다. 이 법은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 형성과정에는 없다가 이스라엘이 정착하면서 생기기 시작한다. 즉 주전 8세기경 사회비판적 예언자들, 아모스, 이사야, 미가를 통해 당시 빈부 격차로 인한 사회적 위기를 비판하게 되는데 가난한 이들과 곤경에 처한 이들의 권리문제가 이들의 중심테마였다 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법으로는 계약서(출 20:22-23:33)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사회적 곤경에 대응한 신학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왕조 시대 말에 형성된 신명기 법전은 가장 포괄적인 법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포로기 혹은 그 이후에는 성결법(레 17-26장)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성서적 사회법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으로 특히 자녀들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노인들을 위시해서 법적 능력이 없는 과부, 나그네, 가난한 이들 그리고 일용 노동자들이 구체적으로 이 법을 통해 보호받는다.
특히 히브리성서에서 다음 세 가지를 강조한다. 이웃에 대한 이자금지(신23,20이하), 7년마다 안식년에 빚을 탕감하는 것(신15,1이하), 그리고 50년 되는 해에 희년으로 그사이에 얻은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모든 노예를 풀어 주는 것(레 25:8)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희년은 이러한 구약의 사유재산의 이해의 특별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의 사적 재산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 혹은 하나님의 소명으로부터 온다는 사고에 기인한다. 즉 노동의 위임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이해한다. 동시에 재산의 위임도 사회 윤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웃사랑계명: ‘사회적 약자’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
레위기 19장 18절에 이웃 사랑 계명이 나온다.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여기에서 이웃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레위기 19장 11-18절까지 4번(12, 14, 16, 18절)에 걸쳐 “나는 주다”라고 분명한 점층법적 구조로 서술되어 있고 그 가운데 사회적 문제에 관련된 이들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나열해보면 (10절)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사람들이 줍게, 그것을 남겨두어야 한다.” (13절) “네가 품꾼을 쓰면, 그가 받을 품값을 다음 날 아침까지, 밤새 네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14절)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된다.” 즉 여기에서 야웨 하나님은 이웃을 추상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우리는 이 이웃사랑 계명에서 이웃이 사회적 약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이웃사랑은 야웨 하나님의 거룩성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레위기 19장 2절에 보면, ‘나 야웨가 거룩하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고 명한다. 이는 제의적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의 영역에서도 거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연관하여 도대체 거룩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룩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예언서에서도 확인된다. 이사야 58장 6-8절에 의하면, 야웨가 기뻐하는 금식은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고 압박받는 이들을 놓아주고 멍에를 꺾어 버리고 굶주린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떠돌이, 나그네를 맞이해 주고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이라 하였다. 결국 하나님의 거룩성은 이웃 사랑으로 형상화된다는 말이다. 이는 출애굽기 22:20; 23:9의 외국인보호규정에서도 확인된다. “외국인을 억압하지 말아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다.” 또한 신명기 14장, 29장, 16, 11. 14절; 24장 17-22절; 26장 11-13절에서 우리는 고아, 과부, 나그네 그리고 레위인을 구체적으로 보호하고 사랑하는 야웨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이들은 사회적 약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십일조: 인류 최초의 사회적 세금(신 14:28)
신명기 14장 22-29절에 십일조 규정이 나온다. 22절에 보면 해마다 밭에서 거둔 소출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출의 십분의 일 아니면 돈으로 바꿔 십분의 일을 중앙 성소에 가서 가족과 함께 먹으며 즐거워하되 성안에 사는 가난한 레위인들을 저버리지 말 것을 제시한다. 즉 중앙 성소의 순례자들의 경제보조를 위해 십일조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28절에 보면 매 3년 끝에 십일조를 “성안에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즉 국가 세금 중 3분의 1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사용하라는 야웨의 명령을 우리는 여기에서 확인케 된다. 또한 신명기 26장 12절에 보면 “세째 해 마다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되면 그것을 레위 사람과 외국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마음껏 먹게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즉 셋째 해의 십일조는 모두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용하라는 인류 최초의 사회적 세금을 확인하게 된다.
사회적 세금으로서의 십일조 정신은 사회적 약자들을 자비와 정의로 사랑하시는 야웨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십일조 정신은 어디에서 발현되어야 하는가. 한국의 복지재정은 2003년도 OECD회원국의 국내총생산대비 사회지출비 비중 평균은 20.7%였다. 스웨덴은 31.3%, 덴마크 27.6%, 노르웨이 25.1% 등으로 역시 높다. 프랑스와 독일도 각각 28.7%와 27.3%를 기록했다. 이에 비해 한국은 겨우 5.7%로 아주 일천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복지는 세금이라는 말이 있다. 사회적 세금의 양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의식의 바로미터이다. 교회는 이러한 연대적 정신을 위해, 야웨의 십일조 정신을 통한 사회적 문화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즉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구조 확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교회내적으로 교회 재정수입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지출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한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재정지출가운데 구제비로 사용되는 헌금이 3-4%정도라 하는데, 이는 성서적 근본정신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관계
모든 출신, 모든 사람들은 땅을 취하는데 있어 야웨로부터 그의 기본 소유를 할당받는다.(민 26:52-56) 가난의 문제는 야웨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불의, 폭력, 잘못된 소득 등으로부터 온다. 소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이는 하나님 앞에 빈자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부는 항상 하나님의 은사요, 모든 이는 태생부터 가난하고 보호를 요하는 이들이다. 성서적으로 엄격히 말하면, 사유재산은 없다. 단지 차용재산일 뿐이다. 야웨가 곤경에 빠진 이에게 도와주고자 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부자는 그의 선물을 나눌 의무가 있다. 야웨는 곤경에 빠진 이와 빈자에게 선을 베푸시길 원하신다. 때문에 그들을 위해 하나님 자신이 관계하신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은 사람을 건지십니다.”(시 35:10)
또한 구약성서에서 “자선을 베푸는 것”이 “정의를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자비를 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많은 정의를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야 한다. 구약성서는 게다가 경제적이고 사회적이고 심리적으로 관련된 규정이 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공적인 빈자구호가 없었다. 왕조시대에서야 비로소 그리고 이와 함께 주어진 다양한 재산과 권력층이 많은 빈자들을 양산케 됐다. 그들을 위해 성전과 큰 회당 안에 곡식저장 창고가 있었다. 도움은 미시적-거시적 조직체계; 가족 안에서 혹은 민족공동체를 통하여 일어났다. 또한 랍비의 “종교법적 결정”은 사적 공적 빈자구호의 촉진을 위해 돕는 기관들과 직제들을 만들었다. 탈무드에 따르면, 교구 안에는 정주해 있는 빈자들에게 돈을 후원하기 위한 공적 금고와 방랑하는 빈자들을 위한 식당(종종 의복 저장소도 포함)도 함께 있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
히브리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야웨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다음으로 ‘규정’한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 하나님이다.”(출 20:2) 하나님은 종살이를 하고 억압당하고 노예상태에 있는 백성을 위하는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다. 종살이에 대항하고 자유를 향하는 하나님의 원 선택, 이러한 분명한 하나님의 편들음은 성서전체에 하나의 맥으로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 선택은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실천적인 응답으로도 규정된다. “외국 사람이 나그네가 되어 너희의 땅에서 너희와 함께 살 때에, 너희는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레 19:33-34)
하나님이 그의 존재를 “섬기는 존재”로 규정한 두 번째 성서의 근거로 우리는 시편 82편에서 확인케 된다. 여기에서는 신들의 회합이 하나의 신화적인 언어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무엇이 혹은 누가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그리고 누가 될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한 그의 판단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정에 나오셔서, 신들을 모아들이시고 재판을 하신다. 언제까지 너희는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되풀이하려느냐? 언제까지 너희는 악인의 편을 들려느냐?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 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가난한 사람과 빈궁한 사람을 구해 주어라.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 주어라.… 내가 말한다.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다.” 이를 통해 다음이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하나님 존재를 위한 척도를 “정의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 고난당하는 사람 그리고 곤궁에 처한 사람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하나님 존재를 거부한다.
야웨 하나님은 작은 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요, 과부와 고아,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 그리고 나그네 된 이들에게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와 반대로 당시 이스라엘 주변에 널리 성행하고 있던 신들은 거짓 신으로 폭로되며 이 거짓 신들은 권력의 오용과 법의 왜곡 그리고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곡해로 이끈다. 신앙은 거짓 신들 모두가 행하지 않는, 즉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결국 구약에 나타난 야웨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섬기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야웨냐 바알이냐
울리히 바흐(1931-)라는 독일의 신학자가 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다가 갑자기 소아마비에 걸려 휠체어 신세가 된다. 발병이후 그는 자신에 대한 이해와 신학적 사유에 있어 대전환을 겪게 된다. 그의 계속된 질문은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로서 이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건강한 이가 장애인을 돕고 정상인이 비정상인에게 베푼다라는 사유의 틀 안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간의 철저한 구분을 한다. 이러한 식으로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한다.
바흐는 이러한 사유에 대해 비인간적이라 한다. 이러한 인식 아래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건강한 이와 병든 사람사이에 연대적 파트너십이 생길 수 없다는 말이다. 돌봐주고 자비를 베푼다는 미명아래 자신의 행함의 대상으로 삼거나 동등한 파트너의식과 이웃의식 없이 다가가는 것에 대해 바흐는 장애인과 병든 이들에 대한 금치산 선고나 마찬가지라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신학이란 중립적인 것이 없다. 신학은 삶을 촉진시키거나 망가뜨리는 역할을 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신학적 사유는 자신이 어떠한 삶의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휠체어에 의존해 살아가는 이에게 신학이란 아주 구체적인 물음에서 시작된다.
바흐는 케제만의 ‘바알의 신학’에 의지하여 신학 안에도 노인, 병자 그리고 장애인을 변두리로 밀어내고 소외시키는 신학이 있다고 한다. 케제만에 의하면, “성서속의 하나님은 항상 바알 아니면 야웨, 예수의 하나님 아니면 거짓 신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선택 속에서 나타난다. 그런 이유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누가 하나님이고, 야웨이며 바알이냐에 대한 물음은 반드시 대답되어져야 한다.”고 한다. 바흐는 이러한 신학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건강하고, 강하고 그리고 노동력이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이것은 강자의 이데올로기이자 힘 있는 사람의 욕구를 전제한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어느 정도 능력 있는 보통 그리스도인의 ‘소박한 신학’이라 규정한다.
바알 신학에서 하나님과 그의 존재는 위의 것, 영광, 빛, 전능, 강함 그리고 깨끗함으로 서술된다. 반면에 병든 사람, 고난에 처한 사람 그리고 장애인은 결핍된 존재, 하나님에 거역하는 세력으로 처리된다. 이런 종류의 신학적 유형에 따르면, 말구유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낮아짐과 무기력은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와 거리가 있다. 바흐에 따르면, 이러한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에 적응하고 투사된 하나님인 바알이다.
바흐에 의하면, 신학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강자의 시각에서 발현되어 나온 ‘지배신학’과 작은 자의 시각에서 나온 ‘섬기는 신학’이 있다. 인간이 된 하나님은 도움을 주는 존재이자 도움을 필요로 하고 도움에 의존적인 분이시다. 인간, Humanum의 정의 안에는 ‘결핍’이 내재하여 있다. 이러한 인간이해의 바탕에서 모든 이들은 도움을 주는 자이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섬김의 주체이자 대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연로하거나 병들거나 가난에 처하고 불안할 때 도움과 조력을 필요치 않는 이가 없다 - 이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른 바 강한 사람도 생의 처음과 마지막 순간에 -종종 삶의 도상에서도- 하나의 약한 존재이다. 아무도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

나가는 말
야웨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고 그분에게 깊이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고난과 곤경에 처한 이들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한 선결사안이라 할 수 있다. 야웨, 그분은 누구이신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야웨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법적 규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고아, 과부, 레위인 그리고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사회 경제법을 통하여 사회가 양극화되는 현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하는 분이시다. 이러한 법적 장치는 종교적 명령인 이웃사랑계명으로 강화된다. 여기에서 이웃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대상이 아닌 사회적 약자를 의미한다. 또 하나의 섬김의 제도적 장치로 야웨는 십일조라는 사회적 세금을 요구한다. 십일조는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려는 야웨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이를 통해 야웨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와 욕심으로 인해 생긴 가난문제에 직접 개입하고자 하신다.
구약성서의 이러한 전체적 흐름을 통하여 우리가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은 야웨 하나님의 하나님됨은 사회적 약자들과의 관계에서 판가름 난다는 사실이다. 구약성서 안에는 시종일관 야웨 하나님과 바알신과의 투쟁사가 이어진다. ‘섬기는 존재’로서 야웨는 ‘애굽의 고깃가마를 그리워하는(출16,3)’ 생각을 떨쳐 버리고 과감히 광야로 나가는 신이시다. 고난 받는 신만이 도울 수 있다는 본회퍼의 말처럼, 고난 받는 신인 야웨의 섬김은 풍요와 강함, 번영과 성장만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하는 바알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섬김이다.

지난 해 12월 말, 대통령당선 축하예배에서 이명박 당선자를 메시야의 대행자로 설교한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는 <목회와 신학> 3월호에 섬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개진한 바 있다. “섬김은 약자, 없는 자의 덕이라기보다 강한 자, 있는 자의 덕이다.” 섬김이 강자의 덕이라…야웨의 섬김은 구약성서의 배경아래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야웨 하나님은 위에 있는 신이 아니다. 오히려 아래에, 말구유와 십자가에 달린 분이시다. 바알적 지배에서 야웨의 섬김으로 나아가라!

홍주민 l 교수는 한신대 신학대학원, 하이델베르크대학교(Dr. Theol)에서 섬김학과 신학을 공부하다. 지금은 한신대 연구교수로 있다. 역서로 『디아코니아신학과 실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