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교란 무엇인가? ‘선교’라는 개념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이그나티우스 폰 로욜라(Ignatius von Loyola)가 예수회 수사들에게 요청한 네 번째 서원에서였는데, 그 서원은 선교(votum missionis)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또 1544-1545년 사이에 ‘constitutiones circa missionis’를 기술했다. 예수회 소속 수사인 아코스타(Acosta)는 그의 책 ‘De procuranda Indorum salute’(1588)에서 선교를 ‘하느님의 말씀을 위해 도시에서 도시에로 돌아다니는 여행’으로 이해하였다. 오늘날 이해되는 전문용어로서의 ‘선교’ 개념은 17세기 초, 카르메니터(Karmeliter)파의 글 가운데서 나타난다. 토마스 아 예수(Thomas a Jesu)는 1622년 로마 교황청에 ‘선교성성’(Missionskongregation)을 설립하였는데, 후에는 ‘신앙선전단’(Propaganda Fide)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 후에야 그 이름이 바뀌어 ‘민족복음화를 위한 성성’(Kongregation fuer die Evangelisierung der Voelker)으로 개명되었다. 개신교에서는 17세기 이후부터 선교개념과 이론에 대한 논의가 훨씬 활발해졌다. 필립 니콜라이(Philipp Nicolai), 요한 하인리히 우르시누스(Johann Heinrich Ursimus)와 곳트후리드 아놀드(Gottfried Arnold) 등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확장으로서 선교를 이해하였다. 경건주의자인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는 하느님의 나라의 확대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선교목적이 있다고 확신하면서 ‘하느님은 이방인들이 그에게 와서 은혜를 찾기까지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이방인을 찾아 나선다’고 말하였다.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 1589-1676)는 선교목적을 이방인의 회개에서 교회의 이식,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단계적 발전으로 이해하였다.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폰 친첸도르프(Nic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는 ‘이방인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지침서’를 썼고, 영국의 침례교 신학자이자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 1761-1834)는 ‘이방인의 회개’와 ‘이방인을 가르치는 직업’을 선교로 이해하였다.2) 현대선교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독일의 구스타프 바르넥(Gustav Warneck, 1834-1919)은 선교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신학적으로 정리하여, 선교신학을 다른 신학적 원리들과 함께 위상을 정립하였다. 로트쉬름바하(Rothschirmbach)의 목회자이자 은퇴 후 할레 대학에서 선교신학 교수로 재직한 그는 그리스도교화와 유럽화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선교를 ‘비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 교회를 세우고 조직하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활동’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선교의 주체는 여전히 사명을 받은 개별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선교의 목적은 비그리스도인의 회개와 세례에 있었다. 그러나 선교는 민족 전체의 회심을 지향하고 일종의 민족교회 수립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바르넥의 입장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선교가 한 민족의 중산층을 겨냥하고 전개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까닭은 중산층이 한 민족단위 사회 안에서 건강한 핵심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 이상의 선교에 대한 개념을 유형론적으로 정리한다면, 신앙의 확대로서의 선교, 하느님 나라의 확대로서의 선교, 회심으로서의 선교, 교회설립으로서의 선교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선교 이해는 지금까지도 보수와 진보,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을 막론하고 기독교 선교의 본질을 부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2. 한국 개신교 선교와 그 신학적 배경 2-1 한국 개신교 선교는 초기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선교사들의 활동은 선교, 교육, 의료 영역에서 이루어졌지만 이들의 신학적 태도는 회심과 가시적 교회의 설립을 지향하는 경건주의, 근본주의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들은 한국교회에 걸 맞는 한국 교역자 양성이라는 목표 아래 대중목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을 주입하는 신학교육을 실시했고 교회의 비정치화와 구령운동을 선교정책으로 채택했다. 초기의 이런 선교신학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는 길선주(1869-1935)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새벽기도’, ‘성서 무오설’, ‘말세론’ 등 오늘의 한국교회의 성격을 크게 규정하는 전통을 만들어 낸 인물이기도 한 길선주는 보수적 근본주의 선교신학의 길을 열었다.
2-2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우리 민중의 주체적인 신앙고백의 빛에서 역사를 보면 이 시기 선교사들의 신학과는 다르게 전개된 한국교회의 선교신학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한 진보적 사회참여 운동을 실천한 윤치호(1864-1945), 한국의 전통종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을 추구한 최병헌(1858-1927) 등이 이 시기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와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선교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선교신학은 선교초기부터 이미 큰 틀에서 ‘영혼구원’과 ‘민족구원’,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근본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상호 대립적, 때로는 상호 보충적으로 서로 영향을 끼치며 받아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대립과 갈등은 1940년대에 이르러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장로교 총회에서 성서의 고등비판과 자유주의 신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논란이 그것이다. 한 편으로 성서 무오설과 성서 축자영감설을 정통신학의 유일한 척도로 삼은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자인 장로교의 박형룡과 감리교의 변홍규, 다른 한 편으로 모세의 창세기 저작설을 부인했다고 비난받은 김영주, 성서의 여성관을 비판했다고 제소 당한 김춘배, 성서의 자유주의적 실존적 이해를 추구한 정경옥, 사회적 역사적 성서이해를 기초로 참여적 신학의 길을 닦은 김재준 등이 이런 대립의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 신학적 논쟁은 주로 성서이해를 둘러싸고 전개된 것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아직 일제의 식민지배가 강화되고 있었다. 1937년의 중일전쟁, 조선어 폐지와 1938년의 신사참배강요와 장로교신학교 폐교, 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폐간, 창씨개명, 1941년 태평양전쟁 시작, 1942년 성결교, 안식교, 침례교 등의 해산과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의 추방 등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지만 당시 한국 신학계는 세계를 향해 주목할 만한 선교 신학적 성찰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2-3 해방 후 4·19 학생혁명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는 이른바 ‘한국교회의 바벨론 포로기’를 겪었는데, 이승만 정권에 대한 무비판적인 순응과 반공, 친미주의적 태도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시기에는 한국교회 내부적 분열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에 대한 책임문제를 중심으로 분열되기 시작한 한국교회(장로교 고려파가 1951년 분리)는 급기야 교권다툼과 이권문제로도 분열되었다. 신학적으로도 보수와 진보 사이의 다툼이 장로교 안에서 재연되었고, 이런 다툼은 마침내 한국전쟁 중에 열린 37회 장로회 총회(1952년)에서 김재준의 제명과 이것이 계기가 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분열(1953년)로 이어졌다. 선교 신학적으로 주목할 운동은 이 시기에 발흥한 신흥종교라고 하겠다. 문선명의 통일교 운동(1954년), 나운몽이 이끈 용문산 기도원 운동(1954년), 박태선의 전도관 운동(1955년) 등은 토착종교와 기독교신앙, 말세론, 축사와 치유, 선교와 기업정신이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전개된 신흥종교들이었다. 지금은 이들 신흥종교들의 영향력이 크지 않지만 당시 이들은 한국전쟁 이후의 사회적 혼란기에 제 기능을 못한 제도권 교회의 틈새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2-4 한국교회의 선교신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한 것은 60년대 토착화, 세속화 등 선교신학적 논쟁이 활발해진 이후였다. 물론 이런 선교신학적 접근은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분류되는 신학자들에 의해 주로 진행되었고, 이런 신학적 논쟁은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적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기 한국의 선교신학은 ‘토착화론’에서조차 수입신학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계교회의 지평에서 주목받는 신학적 논의가 한국이라는 콘텍스트에서 모색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진보진영 신학자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4·19 학생혁명’ 이후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반성하면서 60년대 세계를 휩쓴 ‘근대화’의 물결에 편입된 한국사회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한국교회의 신학적 방향은 여전히 보수주의, 진보주의, 자유주의라는 세 유형으로 전개되었고 대다수 한국교회의 현실은 근본주의의 영향 아래 양적 성장을 지향하고 있었다. 선교신학을 둘러싸고 한국교회가 첨예한 신학적 대립을 보인 것은 70년대부터였다. 보수진영에서는 일련의 대규모 대중 집회(‘엑스플로 74’ 등)를 통해 개인의 회심을 강조하는 ‘복음화’와 전도를 강조했다. 미국 풀러 신학교의 교회성장이론가인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이 74년과 75년에 한국에 초청되었고, 개신교 각 교단들은 경쟁적으로 성장계획을 수립했다. 이른바 ‘확장의 시대’로도 불리는 이 시기의 선교방법은 물량주의 위주라는 부정적 영향을 끼쳤지만 전도와 양적 성장에 큰 자극을 주기도 했다. 성장을 뒷받침한 것은 기복적인 설교,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 사고’와 같은 대단히 현세주의적인 ‘번영의 신학’이었다. 그러나 진보진영에서는 산업선교와 도시빈민선교를 통하여 ‘인간화’를 강조했다. 이런 대립과 갈등은 선교신학적으로 ‘교회중심적 선교’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으로 대별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80년대 말, 두 입장의 대립은 조직으로도 구체화되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1989년 조직)로 한국교회가 양분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 때 형성된 신학적 대립과 기구적 분열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데 앞으로도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두 조직의 기구적 통합에 대한 논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실현가능성은 희박한 것처럼 보이고 신학적 대화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처음으로 한국의 독창적인 신학운동이 일어나 세계교회와 신학계의 주목을 끌었는데, 그것은 바로 박정희 개발독재의 희생자인 도시빈민과 노동자의 인권보장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연대투쟁으로부터 태동한 ‘민중신학’이었다. ‘민중신학’이야 말로 한국 개신교 100여 년의 역사상 세계 에큐메니칼 신학의 지평에서 처음으로 주목을 받은 한국적 선교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신학은 역사의 담지자이면서도 권력자에게 억압받고 소외당한 민중의 현실을 성서적, 교회사적으로 조명하고, 한국의 민중전통과 성서의 해방 전통을 합류시키는 신학 작업이었다.
2-5 80년대 특히 광주민중항쟁 이후, 정치권력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보수와 진보 두 진영은 또다시 대립했는데, 진보진영은 ‘민중신학’의 기초 위에서 민중교회 운동을 전개했고, 보수진영은 교회성장과 대형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이들은 복음의 순수성과 정교분리의 이름으로 교회의 사회참여와 민주화, 평화통일운동을 비난했다. 이 시기는 군사독재에 의해 자유와 민주주의가 여전히 유보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경제적 성장을 성취할 수 있었고 이에 편승하여 한국교회 안에도 물량적 성장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진영의 신학자들이 야당 국회의원으로 정당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현실정치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개신교 재야인사들의 정당정치 참여에 대한 선교신학적 논의가 심도 있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 선교신학적으로 중요한 자극을 준 사건은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된 것이었다.(1990년 3월) 중요한 세 주제 모두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한반도에서 열린 이 세계대회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역교회공동체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90년대는 문민정부에 의한 정권교체와 절차적 민주주의의 수립, ‘국민소득 1만 불 시대’로 특징지어졌다. 문민정부의 수립을 전후하여 한국교회 진보진영이 지지후보와 전략적 판단의 차이로 분열된 것도 이 때였고 이 분열의 후유증은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 선교신학적 화두는 단연 통일이었다. 사실상 통일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80년대부터 한국기독교회협의회는 통일논의의 물꼬를 터왔다.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1988년 2월), 세 차례에 걸친 글리온 남북회의(2차는 88년 11월, 3차는 90년 12월), ‘인간 띠 잇기 운동’(1993년 8월) 등이 그것이다. 특히 ‘88선언’은 그 후의 남북관계를 진일보시킨 ‘남북기본합의서’(1991년 12월),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1992년 2월)의 채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한편 한국기독교회협의회는 1995년을 민족의 ‘희년’으로 선포하고 평화통일운동에 박차를 가하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 북한의 식량난은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넘어 북한동포 돕기 운동을 통하여 서로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 국민의 정부 수립 이후 정치적 문제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 사이의 갈등과 대결은 많이 약화되었다. 오히려 대표적 보수교단이었던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1996년 7월 11일 가입)와 ‘정교회’(1996년 2월 26일 가입)가 교회협의 회원교단으로 가입했고, 장로교단의 통합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됨으로써 가시적 교회일치를 위한 기구적 접근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 안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교회의 양극화, 대형교회의 세습에 대한 비판도 거세졌고, 개신교의 공격적인 해외선교와 타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배타적 정복주의가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다원주의 문제때문에 진보적 신학자들이 강단에서 추방당할 만큼 보수적 근본주의가 다시 강화되었다. 한국개신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대부분의 신학적 논의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영혼구원과 사회참여, 보수와 진보, 토착화와 세속화, 복음화와 인간화 등을 둘러싼 논의들이 대부분 수입신학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교회의 주체적인 선교신학은 없단 말인가? 나는 70년대의 ‘민중신학’과 ‘한국문화신학’, 80년대의 ‘통일신학’, 90년대의 ‘희년신학’이 한국 상황에 대한 신학적 대결과 성찰에서 탄생한 한국의 선교신학이라고 생각한다.
3. 한국교회 선교: 비판과 전망 선교는 교회의 성숙한 성장과 개혁에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선교가 교회의 성숙한 성장과 개혁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교회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현실이다. 선교가 교회의 일치와 증언의 신실성을 뒷받침하기보다 교회를 분열시키고 증언을 불신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장둔화 혹은 정체기를 맞은 한국 개신교의 선교는 더더욱 물량주의에 근거한 공격적인 교인쟁취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선교가 교파간의 분열은 물론 ‘부자교회’와 ‘가난한 교회’로 교회를 양극화시키는 현실이 그것을 반영한다. 해외선교도 마찬가지다. 해외 교민교회의 끝없는 분열과 상호배타성은 물론 현지 선교지에서의 문화충돌, 공격적인 자본주의시장경제에 편승한 선교태도, 19세기 백인선교사들보다 더 강화된 선민의식, 아니 심지어는 ‘황색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선교사들, 선교사들 상호간의 불신, 파송 기관 혹은 후원교회와 선교사의 관계에서 제기되는 갈등과 선교비 문제 등은 선교가 교회를 개혁하기보다는 교회의 정체성을 도리어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선교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일치는 ‘상하적 일치’가 아니라 ‘평등한 일치’여야 한다.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선교의 후발주자로 나선 한국교회의 선교는 19세기 백인중심의 근본주의적 선교와 무엇인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선교의 위기가 비롯된 것일까? 나는 이 위기가 선교신학의 부재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선교신학의 부재는 선교를 좁은 의미에서의 전도, 다양한 성장 프로그램으로 이해하는데서 온다. 그러나 선교는 프로그램 개발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선교가 프로그램이라면 인적 자원과 돈이 없는 교회는 선교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는 사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존재로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마 5,13-14)라고 말씀하신 것은 선교를 사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의 하나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역할이나 프로그램으로 이해된 선교는 우리가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존재로서의 선교’는 선교하지 않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게 한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수 없다. 아니 교회가 곧 선교이다. ‘존재로서의 선교’는 교회와 지도자와 신도의 존재론적 새로움, 곧 거듭남(회개)에서 시작된다. 교회의 정체성을 한꺼번에 위협하는 위기는 선교 프로그램의 부재에서가 아니라, 교회가 존재론적으로 선교적이지 않은데서 오는 것이다. 교회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일관성을 가지고, 말씀 위에 선 믿음으로 연대적 사랑을 실천을 할 때에 교회의 존재 자체가 선교일 수 있을 것이다. ‘연대적 사랑의 실천’은 구체적으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세계화’의 희생자들 편에 교회가 서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를 20대 80의 사회로 양극화시키는 세계화 이데올로기의 물신숭배적 성격을 폭로하고 희생자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가 투쟁해야 한다. 노숙자, 실직자, 어린이와 노인 등 직접적인 희생자들을 위한 디아코니아, 지역에서의 대안 경제운동,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 불의한 기구들의 개혁을 위한 연대투쟁을 전개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교회가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신학은 한편으로 오늘의 불의한 세계경제구조를 신학적으로 성화시키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작업을 통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의 투쟁과 경험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을 통하여 한국의 ‘경제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존재로서의 선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사귐에 열려있다. 나는 21세기에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도전의 하나는 종교 간의 갈등이 폭력적으로 심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람과 유대교(이스라엘), 이슬람과 기독교(유고, 인도네시아 등), 불교와 기독교(한국), 기독교 교파간의 갈등은 지역간, 인종간 갈등의 배경이 되고 있고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불교와 근본주의적 개신교 사이의 갈등은 위험수위를 이미 넘어서고 있다. 90년대 군부대와 대학 캠퍼스 내에서의 장승과 불상 파괴사건, 1998년 제주도 원명선원 불상훼손 사건, 2000년 6월 불교계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 석가여래입상에 붉은색 십자가를 그리고 그 밑 부분에 ‘오직 예수’라고 쓴 사건 등은 불교계에게만이 아니라 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선교가 회심과 개종, 전통문화와의 단절을 지향(강요)하는 한, 이런 갈등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존재로서 이해된 선교는 다른 종교와 신앙,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함께 사는 삶’(Konvivenz)을 지향한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어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딤전 2,4-6) 어떤 이유로든지 그리스도교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을 배타적이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교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주셨다’(딤전 2,6)는 말씀을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는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창 12,3) 교회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민족들이 복을 받아야지, 오히려 갈등과 분열과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선교를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지금은 선교의 방법만이 아니라 선교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진지하게 다시 숙고해야 할 때이다.
4. 과제 인류의 미래는 갈수록 불확실해지고 있다. 미래를 전망하는 수많은 예언서들의 결론은 대체로 순진한 낙관론이거나, 암울한 세계 종말의 예언, 혹은 인간의 윤리적 거듭남에 대한 호소 등으로 끝맺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외에는 확실한 것이 없다는 이른바 ‘불확실성의 시대’, ‘위기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과 미래의 암울한 전망을 상징 언어로 표현한 것을 우리는 ‘묵시문학’이라고 말하는데, 묵시문학의 뿌리는 후기 유대교에까지 소급된다. 그러나 21세기의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종교적 환상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과학자, 역사학자, 경제학자들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이들의 언어도 더 이상 상징 언어가 아니다. 1962년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이 쓴 『침묵의 봄』5)에서부터, 1972년 로마 클럽이 발표한 『성장의 한계』와 『제1차 지구혁명』(전형배 역, 청림출판 1992),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21세기 자본주의』(강철규 역, 현대정보문화사 1993), 미셀 알베르의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김이랑 역, 소학사 1993), 레스터 써로우의 『세계경제전쟁』(이근창 역, 고려원 1992), 폴 케네디의 『21세기 준비』(변도은/이일수 역, 한국경제신문사 1993), 야마모토 료이치의 『지구온난화 충력리포트』(김은하 역, 미디어 윌 2007), 노벨 평화상을 받은 미국 전 부통령 엘 고어가 만든 영화, <불편한 진실> 등이 이런 변화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이 보여주는 세계의 미래가 암울하기는 마찬가지다. 인구폭발, 특히 개발도상국가들의 인구증가와 인구 도시집중, 지구 온난화와 수자원의 고갈, 기근과 식량안보 문제, 첨단기술의 발전과 실업의 급증, 세계경제의 블록화와 초국적 기업의 확산, 새로운 민족주의의 대두와 민족 갈등, 종교적 근본주의와 종교분쟁, 통신혁명과 정보화 사회의 문제 등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한 이들의 예견은 전통적인 묵시문학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이 되었다. 1984년 인도 보팔시 유독가스 사고,6) 1986년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핵연료 폭발사고, 1995년 일본의 고베 대지진, 1998년 양쯔강 대홍수, 2001년 ‘9.11’테러, 2003년 프랑스 폭염으로 15.000여 명 이상의 시민 사망, 2005년 미국의 뉴올리언스시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파키스탄 북부지방 대지진, 2007년 인도네시아 해일,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등 재난은 물론, ‘사스’(SARS: 급성호흡기 증후군),7)‘광우병’8)등의 질병이 그 실례다. 과학자들이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면 종교적 근본주의가 득세하기 마련이다. 1978년 가나(Guayana)의 존스 타운(Jonestown)에서 민족성전종파 912명이 집단자살한 사건, 1995년 캐나다와 스위스에 있는 태양성전종파에 소속된 53명의 신도, 1997년 미국 샌디에고에 있는 외계인-사망-제의 종파(UFO-Death-Kult-Sekte)의 신도 39명, 우간다에 있는 가톨릭 계열의 ‘하느님의 어머니 종파’(Mutter-Gottes-Sekte)를 믿는 1,000여 명이 넘는 신도들의 자결, 일본 쇼코 아사하라의 독가스 종파와 미국 오클라호마 폭파범 등9) 수없는 예를 들 수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런 전환기의 격렬한 변화의 파장이 어떤 지역이나 사회도 예외로 남겨 놓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떤 이는 이것을 세계화 시대의 또 다른 발전의 기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세계화는 지구상의 소수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게는 기회일지 몰라도 대다수의 개도국이나 가난한 나라들에게는 오히려 세계의 양극화를 의미할 뿐이다. 형편이 제3세계보다는 그런 대로 낫다는 우리나라도 세계적 전환기에 이미 들어와 있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의 체결과 예상되는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은 이런 변화의 구체적인 표징이다. 그런데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닥쳐온 파국적 위기 그 자체만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의 변화를 예감하면서 인류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이들, 특히 인간과 우주의 근본가치를 주장하고 가르치고 있는 종교인들의 연대와 대안모색이 아직 활발하지 않다는 것이다.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고 독일의 맑스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는 말했다.10) 그런데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종교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민족과 인류에게 희망을 줄 수 있기 위해서 종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종교가 주장하는 근본가치들을 스스로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근본가치들 가운데 전환기에 더욱 요청되는 것은 생태적 삶, 평화와 정의와 공생, 그리고 대화적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종교에 대한 사회적 공신력과 종교의 발언권을 회복하고 민족과 인류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실천에 앞서 우리는 종교 안에 있는 희망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한다.
4-1. 근원으로부터, 미래에서부터 삶을 보기-시간적 관계망 ‘종교’로 번역된 ‘religion’의 어원은 사실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라틴어의 종교개념은 특히 광범위한 위미의 변형을 보여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religio’의 어원은 ‘relegere', 즉 ‘다시 결합하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religere’, 즉 ‘조심스럽게 주목하다’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religare’, 즉 ‘묶다, 유착시키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11) 그러나 종교를 이해하는데 본질적으로 중요한 공통의 요소들은 초월경험, 제의와 공동체, 신앙의 교리와 윤리적 방향설정 등이라고 하겠다. 모든 종교는 창시자의 삶과 가르침에 의존해 있고,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변질되기도 했지만 인간과 우주의 근원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는 ‘삶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죽음의 문제를 그 중심부에 세운다. 부족 종교에서처럼 삶의 사슬과 혈통이 중심부에 서있는 종교에서는 죽음이 조상들과의 삶을 향해 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힌두교나 불교처럼 현존의 고통으로부터의 구원과 무상함으로부터의 구원이 중심부에 서있는 종교에서는 저승으로의 이전이 윤회사슬의 파괴, 절대적인 것에로의 진입, 곧 니르바나로 가는 입구로 이해된다. 신이 중심에 서있는 종교, 구원이 구세주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종교에서는 죽음이 신과의 삶에 이르는 문으로 이해된다.’12)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종교들의 답이 서로 다를지라도, 중요한 것은 종교가 삶을 근원과 미래라는 ‘시간적 관계망’에서 보는 시각을 준다는 것이다. 삶을 과거와 미래로부터 단절된, 조상과 후손으로부터 단절된, 기억과 소망으로부터 단절된 것으로 보지 않고, 시간적 관계망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희망의 근거이다. 이런 인식으로부터 ‘세대 간의 책임’, ‘동시대 세대에 대한 책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삶은 권리이면서 동시에 의무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종교가 말하는 ‘영원함’은 생명의 시간적 길이가 아니라, 신체험의 깊이와 강도, 종교적 체험의 근원성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말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생각한다. 그리고 ‘내세’는 ‘부정당한 현세에 대한 보상’으로 이해된다. 이런 생각은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상처와 절망에 순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항하게 한다.13)
4-2. 실존과 우주 사이에서 삶을 보기-공간적 관계망 종교는 인간을 실존과 우주 사이의 공간적 관계망에서 이해하도록 돕는다. 내세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약속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종교들은 사람을 ‘이 땅으로부터 하늘로가 아니라, 이 땅 위에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한다.14) 하느님의 나라, 서방정토도 ‘가야할 나라’가 아니라, ‘와야 할 나라’다. 내세 신앙이 때로는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한 대기실 혹은 준비과정으로 생각하게 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래’(未來, Zukunft)가 ‘아직 오지 않은 때’, ‘오고 있는 때’를 의미하는 것처럼, ‘내세’도 ‘가야 할 세상’이 아니라, ‘오는 세상’을 뜻한다. 우주적 시각에서 인간을 생각한다면,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갈대보다 약한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갈대보다 크다. 사람이 자신의 위치, 삶의 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생각의 크기도 달라진다. ‘먹는 것’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처럼, 공간이 생각을 규정한다. 삶을 실존과 우주 사이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삶을 공간적 관계망에서 본다는 것과 같다. 이웃과 자연과 우주와의 밀접한 관련성에서 자신의 삶의 위치를 규정할 때, 우리는 지구의 미래에 대한 무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다.
5. 나가면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 실존을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규정한바 있다. 신앙인은 세상 밖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신앙인도 세상 안에 산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상처받고, 슬퍼하며, 좌절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분노하고, 병들어 아프고,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세상 안에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전적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새로운 가치란 우리 시대의 ‘주류가치’, ‘더 많이, 더 크게, 더 빨리, 더 높이’에 대한 ‘대항가치’이면서, ‘대안가치’여야 한다. ‘더 적게’, ‘더 작게’, ‘더 늦게’, 더 낮게‘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적대감에서가 아니라 사랑에서부터 비롯된, 종교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것이 아니라, 기쁘고 자발적으로 실천되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 가치를 의미한다. 바울은 또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말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을 이미 실현된 현실처럼 생각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미 보이는 것처럼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가능의 가능성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혁명적 본질이다. ‘혁명’(革命)은 본래 ‘가죽에 쓴 신의 명령’을 의미했다고 한다. 서양 전통에서도 ‘혁명’이라는 단어는 천문학과 관계되어 코페르니쿠스(Kopernikus, 1473-1543)의 작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1543)에서 최초로 등장하며, 혁명은 ‘규칙적이고 순환적으로 움직이는 천구운동으로서,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저항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고, 그래서 새로움이나 폭력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다.15) 점차 혁명이 정치권력의 폭력적 이동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지만 본래 혁명은 하늘의 뜻과 관계되었던 것이다. 하늘의 질서를 이 땅 위에 실현하려는 시도야말로 유토피아 운동이고, 종교적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종교는 불가능한 새로운 가치를 이 낡은 세계 안에서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새로운 가치’의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나는 ‘믿음’이야말로 새로운 가치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석 유영모는 ‘믿음’을 ‘밑바닥 소리’라고 했다. 우리 존재의 깊은 바닥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신앙이라는 말이다. 모든 피조물의 신음소리, 우리 존재, 우주의 깊은 밑바닥 소리를 듣는 사람이 희망의 담지자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희망의 담지자’(Traeger der Hoffnung), 곧 우리 시대 ‘정신의 귀족’이어야 한다.
채수일 l 교수는 한신대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뷔르템베르크 주교회 선교사와 함부르크 선교 아카데미 연구실장, 한국신학연구소장,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으며 지금은 한신대에서 선교학과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양심의 역사, 역사의 양심』, 『21세기의 도전과 선교』,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등의 저서와 『선교신학의 유형과 과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실패한 관계의 역사』 등 10여권의 번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