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한국 장로교회는 신사참배를 문제 삼아 1952년 고신(고신대학)이, 1953년 기장(한신대학)이 각각의 교단으로 분열한 것을 시작으로 1960년대 이후에는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되었으며, 이러한 분열의 폭풍우는 1980년대에 이르러 다시 한국 장로교회에 휘몰아쳤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교단 간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고자하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런 운동들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합동과 통합이 분열(1959)한 직후 1960년 합동과 고신의 통합이 이루어졌으나 3년 후에 다시 분열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W.C.C 가입 문제로 분열한 합동과 통합도 1963년 이후 지속적인 교단 일치를 시도하였으나 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장로교는 1980년 이후 다시 교회 분열에 대한 반성을 시작하였고, 2005년에 이르러 합동과 개혁이 통합하여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같은 해에 세 개의 교단, 예장개혁, 합동대신, 합동개혁이 예장개혁으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인식하여 올해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을 계기로 ‘하나의 장로교’라는 표어아래 장로교의 통합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교단 통합의 노력은 한국교회 변혁의 역사로서 높이 평가할만한 일로 매우 고무적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형제애에 근거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교단 통합의 노력은 미래의 한국교회를 비옥하게 만들어가는 좋은 토양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겨져, 침묵의 상태에 머물고 있는 신학적인 문제-기장의 분열(1953)과 연관된 축자영감설 논쟁과 합동과 통합의 분열(1959)과 관련된 W.C.C. 가입 문제-가 장로교의 통합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로교 일치운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아직까지 선교와 사회봉사 차원의 연합 사업으로만 장로교 일치운동을 제한하고자 하는 입장이 보수교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심창섭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를 반영한다.
신학적 입장에 대한 양보와 배려의 정신은 결국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주장하는 일치(unity)와 다양성(diversity)의 인정인데, 이 정신을 한국 장로교회가 구현할 수 있을까? 논자〔심창섭〕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다양성 인정은 교리와 신학사상의 다양성의 인정과 관계되어 있다. 이는 곧 성경관과 같은 진리에 관한 문제이므로 신학적 입장의 양보와 배려는 보수와 진보, 둘 다 수용할 수 없는 이상론에 불과하다.2)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2005년에 이루어진 합동과 개혁의 교단 화합은 두 교단이 신학적 차이로 분열하지 않고, 교권주의와 지역주의로 인하여 분열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어떠한 신학적 합의도 도출하지 못한 채 ‘하나의 장로교’를 만들기 위해 일치운동을 진행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장로교를 만들고자 전개하는 일치운동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한국 장로교회의 중심 교단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고신, 기장, 합동, 통합은 모두 신학적으로나 교회 제도적으로 칼빈 또는 개혁파 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교단들은 서로 여전히 장로교 총회 횟수를 각 교단의 총회 횟수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공통점은 장로교 각 교단이 통합을 위해 접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배경 하에 장로교 교단 분열의 중심에 서 있는 성경 영감론을 살펴보자. 장로교의 출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칼빈과 그가 성경 영감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면 이것이 한국 장로교 분열에 미친 영향이 어떤 것인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로교 분열 과정에서 한국 장로교는 칼빈의 성경 영감론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 맞게 유용하였는지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 영감에 관한 칼빈의 이해를 연구하는 일은 한국 장로교의 분열의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요, 하나 되는 장로교를 세우기 위한 기초를 놓는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2. 박형룡과 김재준의 논쟁을 통해 본 축자영감설의 이해 박형룡과 김재준의 성경영감에 대한 논쟁에서 나타난 격렬한 쟁점은 영감의 범위이다. 박형룡에게 있어서 성경의 문자와 사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靈)이 문자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는 오르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상은 필연적으로 문자에 의하여 형상되며 표현된다. 만일 영감이 있다면 그것을 반드시 사상과 함께 문자에로 투입할 것이며 표현을 형성할 것이며 용어로 하여금 전달될 관념의 산 매개로 되게 할 것이다.3)
이에 반해 김재준은 성경의 목적은 우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고 둘째,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즉 구원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4)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감을 주셨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본질적인 내용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성경 저자를 통해서 선포한 것이다. 이 둘의 쟁점은 성령의 영감이 성경의 내용뿐만 아니라 문자에까지 미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성경의 내용에만 국한된 것인지의 문제였다. 이런 차이와 더불어 성경의 무오에 관해서도 대립적 양상을 나타내면서 둘의 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박형룡은 하나님의 영이 문자에까지 영향을 끼쳐 문자 하나하나에 오류가 없다고 보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결과 성경은 과학적 사실로서, 역사적 사건 기록으로서 오류가 없다고 주장했다.5) 반면 김재준은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면에서는 오류가 없으나, 성경의 내용을 문자로 이해하여 과학적 혹은 역사적으로 얼마나 정확한가를 따지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6) 이를 위해서 그는 무오의 개념을 ‘절대무오’와 ‘성경무오’로 구분함으로써 성경무오는 인정하나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축자영감설의 ‘절대무오’는 거부하기에 이른다.7) 한편 박형룡도 성경이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 성령의 역할을 영감과 조명으로 구분하는데, 그에게 있어 영감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 ‘단 한번’ 일어난 ‘특별하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간섭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를 위한 영감으로서 성령의 역할은 끝났으며,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로서 조명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경 저자들에게 성령의 조명이 있었을 것은 확실하나 조명만은 새 진리를 전달하지 못하였을 것이요, 그들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방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조명은 진리의 전달과 관계하지 않고 이미 계시된 진리의 이해와 상관하는 것이다.”8) 또한 박형룡은 성경의 무오를 주장하기 위해서 ‘원본무오설’을 주장했다.9) 내용인즉, 지금 현존하는 성경의 문서들은 사본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원본에는 오류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김재준은 박형룡과의 논쟁에서 축자영감설을 성경의 무오류와 관련하여 ‘기계적영감’(mechanical inspiration)으로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박형룡은 분열 이후 축자영감설은 기계적영감이 아니라 ‘유기적영감’(organic inspiration)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김재준과 박형룡의 논쟁은 결국 ‘축자영감설’이냐 ‘사상영감설’(Sachinspiration:事象靈感: 박형룡은 성서의 내용만이 영감되었다고 보는 입장을 ‘부분영감’이라고 칭한다.)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귀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학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제 3의 대안이었던 유기적 영감을 깊이 숙고하지 못했다는 점은 유감스러운 일이다.10) 이러한 대안이 보수주의의 단초로 사용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미처 둘 다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박형룡이 ‘유기적영감설’을 주장함으로써, 성경 저자를 감동시킨 그들을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개인적인 특성과 그 당시 사회적·문화적 환경을 반영한다는 김재준의 관점에 동의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품과 능력, 그가 처한 사회적·문화적 환경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靈)은 이러한 인간적인 제약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 내지는 기관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11)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을 강조하며 성경 저자가 어떤 창조적인 저자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 자라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성경의 무오류를 주장하였다. 이처럼 박형룡은 ‘위로부터’, 즉 하나님의 권능의 관점에서 축자영감설을 논증하고, 이를 토대로 역사적 성경비평방법을 거부한다. 이와 달리 김재준은 하나님이 성경 저자를 그의 영(靈)으로 감동시켜 성경 저자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하고, 그 사람의 인격과 개성을 통하여 그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의 산물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역사적 성경비평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성경의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성경 해석의 목적이라고 여겼다. 그러기에 과학적 혹은 역사적으로 성경이 전하는 정보들이 문자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성경의 본의를 벗어난 것이었다. 김재준은 이런 성경해석을 통해 신학자들이 자의로 만든 교리를 지키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는 일, 또는 교리적 해석으로 성경 저자의 원 뜻에서 멀어지는 일 등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12)
3.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성경 영감에 대한 이해 3.1) 영감에 대한 개념적 이해 칼빈은 ‘영감’(靈感)이란 말의 라틴어 어원인 인스피라치오/인스피라레(inspiratio/inspirare)를 기독교강요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기독교강요』-이하 강요라고 칭한다-최종판에서 그는 단지 네 번 사용했을 뿐이다.13) 그 중 두 번 강요 I권 5장 5절과 I권 16장 1절-이하 『기독교강요』는 해당 권수의 숫자로만 표기하기로 한다-에서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는 창조의 힘과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은 우주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으로 생기를 얻는다고 가르치며 인간의 마음도 그렇게 느낀다.14)
칼빈에 따르면 고대 철학자들도 “일반적인 영”(우주정신)이 세상에 생명을 불어 넣으며 그것을 이용해 자연을 움직인다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도 세상에 내재된 초월적인 힘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에 의거하여 철학자들도 “자연이 하나님이라는”15) 결론에 도달하지만 이러한 빈약한 사색은 인간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경건을 불러일으키거나 보존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오히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창조한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보살핌을 뜻하나 “일반적인 영”(우주정신)의 영향은 “차디찬 그리고 무미건조한 사상”16)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사를 돌보신다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돌본다는 확신 없이는 우주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신중히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7)
이와 반대로 철학자들의 사고는 편협하고 근시안적이므로 하나님의 인식으로 이는 “영상적인 신격”18)을 고안해 내는 것으로 신성을 모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칼빈은 강요 I.18.2에서 ‘영감’이라는 라틴어를 사용하는데, 하나님의 영이 소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영을 그가 정한 목적으로 인간들을 이끄는 역할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III.1.3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칼빈은 여기에서 ‘영감’이라는 라틴어 동사(inspirare)를 ‘숨을 불어 넣다’는 동사(afflare)와 함께 사용하여 그 뜻을 더 분명하게 나타낸다.
성령께서는 그 힘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며 거룩한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과 자극으로 움직이게 된다.19)
이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의 힘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어떤 것이라는 점과 더불어 인간의 실존적 경험으로 성령의 힘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성령을 “샘물”(요 4:14) 그리고 “하나님의 손”(행 11:21)으로 표현하였고, 하나님의 목적에 이끄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인간이 성령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들의 마음은 어두울 뿐만 아니라 사악할 뿐임을 강조하였다. 요약하면 성령은 한편으로 창조의 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별한 사역을 행하는 힘으로 이 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의 세계에서 간섭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늘의 보화와 하나님의 힘이 흘러 넘쳐 나오는 원천으로, 이 힘은 외부로부터 인간의 마음에 들어가 그 마음을 휘저어 하나님이 정한 목적에 도달하도록 인도한다.
2) ‘영감’과 동의어로 사용된 용어들에 대한 이해 칼빈은 영감이라는 단어 대신에 성령의 역할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다른 동사들을 사용하는데 ‘숨을 불어 넣다.’(afflare: I.8.4)와 ‘충동하다. 격려하다.’(instinguo: I.8.8), ‘통치하다. 관리하다.’(gubernare: I.8.8)와 ‘받아쓰다’(dictare: IV.8.5:6), ‘끌고가다. 인도하다’ (duco: IV.8.14)등이다. 이러한 단어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주체자이고 동인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반면, 인간들은 단지 하나님의 힘을 받아들이는 수납자임을 나타낸다. 강요 I.8.4에서 ‘숨을 불어 넣다’라는 동사는 수납자로서 야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령의 개입이 성령을 수납한 선포자의 혀와 연결되어 있어서-예를 들어 예레미아의 혀(I.8.8.)-구체적으로 성령이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상상하도록 도와준다. 이는 한편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의 말씀을 선포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하는 수동성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위가 전수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때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보증하며 또한 선지자에 대한 신뢰성과 그의 선포의 성취를 보증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I.8.8에서 성령의 역할인 ‘신적 충동’(divini instinctus)을 명사 ‘증거’(specimen)와 연결한 것이고, 성경 저자인 사도들을 ‘서기’(amanuenses: IV.8.9)로 표현한 것이다. 이외에 칼빈은 성령의 역할로서 ‘받아쓰다’라는 동사를 강요 IV.8.5와 IV.8.6에서 세 번 사용하는데, 그는 여기에서 이 단어를 문자대로 받아쓰는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영을 통한 ‘불어넣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강요 IV.8.5에서 칼빈은 성령의 역할을 구두전승의 맥락에서 “하나님이 내적으로 불어넣는 것”(Deo intus dictate)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문자로 기록되기 전에 그의 계시가 하나님의 영이 직접 불어 넣음으로 후대에 전승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족장들이 받았던 것을 후손에게 직접 물려주는 일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적으로 불어넣었기 때문에 자녀들과 그들의 손자들은 그것이 땅에서 오지 않고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다.20)
칼빈이 이 단어를 불어판에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증거를 고백”(avoyont tesmoinage de Dieu en leur coers)하는 것으로 번역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딕타레(dictare)라는 단어를 문자와 연결된 ‘받아쓰다’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V.8.6에서는 성령의 역할로서 ‘받아쓰다’란 동사인 딕타레를 성경 문서들의 편집행위와 연결하여-dictante Spiritu santo compositae-‘명령하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칼빈이 불어판에서 “성령이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작성하다”(le saint Esprit les inspirant et dressant αcela)로 번역한 것과 의미에 있어서 일맥상통하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받아쓰기’란 단어가 어떤 문자를 받아쓰는 행위가 아닌, 폭넓은 성령의 역할로서 ‘무엇을 불어넣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성령의 역할로서 하나님이 불어 넣은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전승하고자 할 때도 인간적인 것이 아닌 신적인 것을 전승했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칼빈은 성령의 역할로서 ‘영감’을 뜻하는 인스피라레(inspirare) 또는 인스피라치오(inspiratio)란 단어를 드물게 사용하였고, 이 단어로서 성경의 어떤 외적으로 보증된 신적 본질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 단어를 인간에게 압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성령의 역할로 이해하였고, 이러한 성령의 힘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실존적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하는 것으로 보았다.
3.2) 성경형성 과정에 나타난 영감의 이해 1) 구두전승에 나타난 영감의 이해 칼빈은 성경 문서들의 역사적 전승과정을 강요 I.6.2(1539)의 구두전승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에게 계시의 말씀과 환상을 통해서 나타내셨든지 그들의 임무를 통해서든지 선조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마치 후손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처럼 드러내셨다. 여기에는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우선 말씀에 참여하는 형태로 그들에게 (전수되었고) 그들은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깨달음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를 적용하실 때마다 이 사실을 믿도록 항상 확고한 믿음을 허락하셨다.21) 말하자면 그는(하나님) 소수에게 표징을 주어 특별히 그의 분명한 현존을 꿰뚫어 알게 하셨고 그들에게 후대인에게 전달되어야만 하는 구원을 주는 진리의 보물(salvificae doctrinae thesaurum)을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의 계약(foedus aeternae vitae)을 어떻게 하늘의 계시를 받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전 가족에게 퍼져나갈 뿐만 아니라 전 후손들에게 확대되도록 보살피는 것을 보았다. 더욱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구별하셨는데 이것이 확실한 차이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한 은혜(!)로 말씀을 공유했기 때문이다.22)
여기에서 칼빈은 어떤 형태로 하나님이 그의 뜻이 다음 세대에 전수되었는지 서술한다. 그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겪은 하나님 현존의 체험을 통해서 족장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그 족장들이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후손에게 전달한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시작한다. 그는 전승의 연속성을 ‘말씀에 참여’하는 행위, 즉 예전에서 이루어지는 선포에 참여하는 행위와 그 말씀의 원저자가 하나님이라는 믿음에 토대를 둔 내적 확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승의 본질로서 선포 말씀은 바로 “구원을 주는 진리의 보물”이며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언약”으로 이것이 전승의 연속성을 갖게 한다. 이 전승의 연속성은 하나님과 그가 선택한 백성과의 인격적 관계에 근거하며 언약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확고한 믿음에 도달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주체자도 하나님이며, 이를 다음 세대에 전수하도록 하는 믿음의 수여자도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전승의 통일성임을 나타낸다. 이것에 대한 믿음의 확신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며, 이 믿음을 통해서 진리가 전달하는 것을 확신하는 자에게 성경의 전승은 “독점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건”23)이 된다. 1559년 최종판에서 1539년 전승의 연속성을 방편으로 삼은 ‘말씀의 참여’가 뒤로 물러나고 ‘믿음을 통한 내적 확신’과 ‘가르침’이 두드러진다. 하나님이 족장들의 마음에 새긴 내적 확신은 그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다음 세대의 후손들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즉 내적 확신을 통해서 선조가 가르친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확신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계시의 수납자들) 자기들이 배운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증하고 보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인간의 모든 견해를 능가하는 확고한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다.24)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는 전승된다. 그렇다면 족장들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 확신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시 사건을 통해서 하나의 표징을 준다. 인간은 이 표징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확실하게 경험하게 되며, 이 경험은 표징을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 인간에게 하나의 해석을 요구한다. 이 해석의 잣대를 칼빈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계약(promossio)으로 삼았다. 이 계약의 말씀이 바로 전수의 본질로서 다음 세대에 전수되고 퍼져나가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현존의 표징을 통해서 확신에 이른 자는 구원의 진리를 수납하고 본래의 의미에서 시작하여 진리로서 전수되고 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임한 것은 인간들의 역사 안에서 하나의 역동성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나아가 영원한 진리인 독트리나(doctrina)25)로서 다음세대로 전수된다. 영원한 독트리나로서 진리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존재하며 널리 퍼지게 되는 힘이다. 이 영원한 진리의 힘의 근원지, 진리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내적 확신으로서 인간은 믿음 안에서 단지 진리로서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믿음의 저편에 놓여 있는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며,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에 근거한 대화를 요구한다.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말을 건네는 자이고 주체자로 앞서 가는 자이다. 이와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부름에 대답하는 수동적 입장에 서있게 되고, 이 관계에서 인간은 단지 듣는 자이다. 그렇지만 ‘들음’은 인간에 속한 능력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인간의 동의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올바르게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말씀을 공유했기 때문이다.”26)라고 서술한다.
3.2) 율법의 해석사로서 성경 1)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와 제사장 칼빈은 모세를 첫 번째 성경 저자이자 “율법의 해석자”27), 율법의 충실한 통역자로 여겼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율법을 “더 분명하게 설명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교리의 중심 내용들을 십계명에 짧게 요약하셨고 이는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척도로써 충분하다. 모세가 후에 덧붙인 더 분명한 설명은(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이었다.28)
더 분명한 설명 내지는 해석이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은 모세가 성령을 통해서 이 일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성령이 인도하는 그 능력에 의지하여 다섯 권의 책들을 썼을 뿐만 아니라 … 정확하게 하나님이 그의 면전에서 그에게 구두로 말씀을 주신 것처럼” 그렇게 기록하였다. 모세를 통해서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는 추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모세의 이러한 권위는 후대 제사장들의 권위 해석의 전제로써 그들의 권위에도 적용된다.29) 이처럼 성령의 인도 아래서 이루어진 그 시대의 정황에 적절하게 적용된 율법의 해석은 후대 제사장들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 권위가 유효하다. 그리고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의 권위는 이러한 방법으로 제사장에게도 적용된다.
2) 율법의 해석자로서의 선지자 모세와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선지자 역시 율법의 해석자로 여겼다. 그에게 있어서 선지자들은 “율법의 참된 해석자들”이며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율법의 본래의 목표에서 벗어나 있는 일반 백성들의 눈을 율법의 목표로 다시 향하게 하는”30)데 있다. 선지자들이 자신의 시대에 율법을 적용하기 위해서 행한 해석은 본래의 궤도에서 벗어난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목회적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주제와 관련하여 문제는 선지자들이 율법의 해석 이외에 덧붙인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이다. 이 예언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능력을 승인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러한 선지자들의 능력을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 분명하게 그리고 폭넓게” 구원의 교리를 보여주기 위하여 행한 것으로 보았다: “약한 양심들이 더 만족하도록 더 분명하고 더 풍부하게 교훈을 나타내는 것이 주의 마음에 합당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언들을 문자로 기록하여 그의 말씀의 일부로 삼기를 명하였다.”31) 이러한 의미에서 예언들은 바로 율법의 ‘해명’이며, 그 목적은 바로 당시 삶의 정황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지자들의 임무는 율법과 떨어져 있지 않다. 율법에 이은 예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의 부록처럼 어떤 새로운 것을 덧붙인 것이 아니라 백성이 더 율법에 복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32) 이러한 임무는 칼빈에 의해서 선지자로 간주된 역사서를 편찬한 자들과 시편 기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역시 선지자들의 임무인 역사서들도 성령의 영감 아래서 편찬되었다.”33) 성령이 이들에게 엄밀한 의미에서 선지자와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모세도 선지자로서 이해하였고 “모든 선지자 중에 최고의 선지자”34)라고 칭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자는 ‘공무수행자’로 여겨질 수 있으며 이들은 어떤 것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그들이 받은 것을 전수하는 ‘하나님의 학생’이다.
3) 율법의 해석자로서 예수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율법의 제정자로 보지 않고 오히려 “가장 확실한 율법의 해석자”35)로 이해하였다. 예수도 율법에 순종하였고 그는 율법이 지닌 본래의 뜻을 회복하는 것을 그의 목표로 삼았다: “그의 목적은 율법을 느슨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조이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고안해낸 갖가지 그릇된 것들로 인하여 매우 부패해져 버린 율법의 참되고 진정한 이해를 다시 회복시키는 데 있었다.”36)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 해석의 전권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가 바로 육신이 된 말씀(Logos)이기 때문이며, 이에 근거하여 그의 선지자적 임무를 깨달아 수행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로고스를 계시 사건과 예언의 원천으로 삼았다. 로고스는 “하나님 곁에 머물고 그로부터 모든 계시의 말씀과 예언이 나오는 지혜”이고 모든 계시의 근원으로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아버지의 영원하고 본질적인 말씀”, “본체적인”37) 말씀이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항상 한 분으로, 동일한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하는 분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38)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전제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이 세상의 창조 시기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모든 계시 사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신학적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이 예수의 선지자적 임무의 완성을 위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칼빈은 이사야 61장 1f절과 관련하여 이러한 예수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는 그가 아버지의 은혜의 선포자 그리고 증인이 되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안다.”39) 이것은 선지자의 권위의 근거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다른 선지자들과 구분되는 “마지막이고 영원한 증언”40)이다. 그의 독트리나(doctrina)는 제한된 영역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계시 사건으로서 그의 나타남의 범주에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완전한 진리(doctrina)41), “모든 예언을 종식시키는 완전한 진리(doctrina)42)”이다. 그의 진리는 참된 교리와 거짓된 교리를 구분하는 척도로써 복음을 넘어서 다른 구원의 길에 도달하는 것은 제외되었다. “복음에 만족하지 않고 외부의 어떤 낯선 것을 가져다 복음에 꿰매는 자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것이다.”4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자이고 모든 교리의 내용이자 척도이다. “왜냐하면 그 외에 어떤 것을 아는 것은 필요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의 본질을 파악한 자는 하늘을 가득 채운 보화를 갖는다.”44)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공동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리스도가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그 자신이 선생의 임무를 적절하게 완수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그의 몸 전체를 위해서 복음이 계속 전파되는 일에 성령의 힘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45) 그리스도는 성령의 힘 안에서 선포의 주체이자 내용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율법의 원래의 의미로 되돌아간 율법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해석은 영원한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4) 선지자들의 보증인으로서 사도 칼빈은 사도들도 선지자들과 동등하게 율법의 해석자로 여겼다. 그는 말하길, “사도들은 이전에 선지자들이 사로잡힌 것과 다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승된 문헌들을 주석해야만 했고 문서가 가르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46) 선지자와 달리 그들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덧붙여졌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구원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계시 사건이 선지자들의 문서에서 은밀하게 숨겨진 채 있지만, 사도들의 문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구원의 역사가 더 분명하게 서술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어떤 의미에서 선지자들의 보증인으로서, 그들은 본질상 선지자의 문서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다시 말해 구원에 관한 것으로, 그 구원의 역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계시되었다는 것을 확증한 것이다. 사도들이 기록으로 남긴 증거들과 관련하여 칼빈은 그들을 ‘그리스도가 부른 공적수행자’로 여겼다. 그들도 선지자들처럼 그들의 임무를 임의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실하고 신뢰할만하게 그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그들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닌 단지 그들에게 명령한 것을 가서 가르치라고 명하므로 그들의 사명에 이를 하나의 규칙으로 제한하였기 때문이다.”47)
사도들의 우위성은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이 땅에 산 예수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있다. 사도들은 예수를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특별한 권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그들의 체험을 기록할 때 그리스도의 영이 이끌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불러준 것을 받고 오직 주의 지도를 받아 행했다.48)
칼빈은 이로써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그는 사도들의 능동적 활동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칼빈은 불명확한 화법으로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증거는 그리스도의 영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한에서 “확실하게 확증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예수)는 최상의 하나뿐인 선생의 자리에서 뒤로 물러나서 그(사도)들을 그의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 이 자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서만 보증된다. 이 자리바꿈은 지금부터 그리스도가 앞으로 더 이상 그가 이 땅에 머물면서 했던 것처럼 직접 자신의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입을 통해서 전한다는 것을 나타낸다.49)
이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복종함으로써 그의 뜻에 걸맞게 행동해야만 한다.
5) 요약 칼빈은 성경의 통일성을 율법의 해석사(史)로써 해석의 총체로 여겼다. 율법 해석의 전수 과정에서 그 권위는 한편으로 선지자적 권위에서, 다른 한편으로 성령의 영감에 그 근거를 두었다. 선지자적 권위의 측면에서 칼빈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무를 받아 수행하는 자’(minister)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맺게 하는 사건으로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말을 건네는 주체이며 인간은 이 부름에 겸손하게 받아들여 하나님의 뜻에 협력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성령의 역할을 통한 믿음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모세를 ‘선지자 중 가장 큰 자’라고 표현하였고, 그리스도의 증인인 사도들은 선지자들의 보증인이라고 이해하였다. 성경의 형성 과정은 구원의 진리가 지속적으로 전승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소명’과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능력을 주는 분이다. 성경의 형성 과정에서 칼빈은 성경 해석의 필요성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계시한 것은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항상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하고 하나님의 계시와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칼빈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인식 능력이 부족한 인간에게 자신이 스스로 계시하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를 설명하고, 더 나아가 그 해석의 전 과정을 돌보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의 형성과정은 ‘다양한 하나님의 계시의 현존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계시 사건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완성되는 해석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믿음 안에서 행해지는 해석이다. 이러한 명료성은 하나님이 항상 성경에 나타난 현존의 역사에서 이미 명확하게 증명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전승되고 확증된 것 이외에 어떤 것도 가르칠 의무가 주어지지 않는다.
4. 성경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나타난 영감의 이해 디모데후서 3장 16절 주석에 나타난 칼빈의 영감에 대한 이해를 논의하기 이전에 언급해야 할 사실이 있다. 이는 바로 칼빈은 이 구절을 독립된 구절로 다루지 않고 13-17절을 하나의 단락으로 묶어 다룬다는 점이다. 이 단락은 우선 저자가 믿음의 형제들에게 거짓 교사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라고 경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더 악해져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13절)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배우고 확신한 일, 즉 진리를 굳건하게 붙잡아야 한다.(14절) 이 진리는 가르치는 선생과 성경에 근거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15절) 마지막 절(16)에서 성경의 영감을 언급한다. 이 단락은 칼빈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교리를 고수하도록 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에 유의하라고 경고하는데 성경이 얼마나 권위가 있고 유익한가를 드러내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 삼는다는 점이다. 15절에서 칼빈은 “다음에 오는 것(16절)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존한다.”50)고 서술하고 있다. 영감과 성경의 효용은 이러한 믿음 없이 적절하게 이해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에서 16절에 나온 “하나님의 영감으로”가 축자영감설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또한 칼빈은 “모든 성경”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그는 성령의 역할로서 ‘받아쓰다’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칼빈은 직접 이 구절을 번역하였는데, 불가타 번역과 달리 영감을 술어로 번역하여 이 구절을 영감과 그것의 유익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로써 성령의 역할로서 영감은 성경의 본질을 지시하고 칼빈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으로 성경의 권위를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일어나는지는 다음의 구절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는 확실하게 선지자들이 자기 자신의 의견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성령의 도구였고 단지 그들에게 신성하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것을 확신했다.”51) 이 문장에서 칼빈이 선지자를 성령의 도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이 문장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이 단어로 축자영감설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고 오히려 이 단어는 선지자들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그리고 신뢰할만하게”52) 수행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성령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인간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이 임무를 인지한다. 성령은 사명을 완수하도록 선지자들을 부르고 선지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선지자들을 ‘공적인 수행자’로서 ‘성령의 도구’로 여겼던 것이다.
모세나 선지자들은 그들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쉽게 받아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은 신적인 추진력에 의해서 선포했기 때문에 충실하고 그리고 두려움 없이 바로 주의 입이 전달하고자 한 것이라고 확증한다.53)
이제 문제는 성경의 독자 내지는 청자가 그들과 전혀 다른 시대에 형성된 성경이 신적 근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이다. 칼빈은 한편으로 이것을 “동일한 성령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았다. 즉 선지자가 자신의 임무를 깨달아 수행하도록 인도한 성령과 현재 성경을 읽고 있는 독자들을 움직이는 힘도 동일한 성령의 역할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그들의 소명을 확실하게 깨닫도록 인도한 영이 동일하게 오늘날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들의 임무를 필요로 했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에 확증시켜 주었다.54)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동일한 영의 계시를 통해서 그의 제자들과 선생들에게 동일하게 자신이 성경의 원저자임을 입증해 보였다.”55) 그러므로 하나의 성령으로 언제나 동일하게 머물기 때문에 성경의 저자인 선지자들과 독자 사이에 놓여있는 시간적·공간적 간격을 뛰어 넘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깨닫게 되고 인정하게 된다. 성령이 선지자들이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증언하도록 유도했다면 그 성령이 지금도 인간의 증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포를 인식하도록 이끈다. 이처럼 칼빈은 원칙적으로 성령의 역할로서 영감과 조명을 구분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성령의 영향은 지금 현재도 성경의 독자들이 성령에 의한 붙잡힌 상태를 통해서 주관적 확신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칼빈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표현은 우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성령의 간섭 아래서 성경을 인지한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말 건넴을 받은 자이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에 서 있고, 이 믿음 안에서 그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선택받지 못한 자와 달리 하나님에 의해서 말 건넴을 받은 자는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성경 원저자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있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 모든 자에게 보여지나 실제로 선택받은 자들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성령의 조명을 받을 때 그들은 성경 곳곳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된다.56)
성서의 범위와 관련하여 그는 분명하게 바울이 의미하는 ‘모든 성경’이란 구약성경만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러한 배경에서 칼빈은 어떻게 사도들의 문서를 다루어야 하는지 문제제기를 통해 구약과 신약은 본질상 동일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사도들의 문서는 더 분명하고 명료하게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완성된 구원의 형태와 방법을 보여 준다. 칼빈이 디모데후서 3장 16절 주석에서 성령의 역할로서 ‘받아쓰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에 나타난 그의 논증은 이미 강요에서 언급한 것에 상응한다. 그가 말하길, “성경 안에서 움직이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율법과 예언이 인간의 임의로 이루어진 가르침이 아니라 성령이 불러 쓰게 한 것이다.”57) 여기에서 분명하게 ‘받아쓰다’는 동사가 문자가 아니라 독트리나(교리 내지는 율법과 예언의 내용)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미 강요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독트리나는 인간의 임의성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바탕에 둔 것으로, 성경이 지닌 이러한 신적 기원이 비로소 구약과 신약의 문서를 하나로 묶는 근거이다. 이러한 칼빈의 논증을 통해서 볼 때 그가 축자영감설의 증거를 대고자 이 구절을 증거로 내세웠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는 이 구절에서 성경의 권위를 보증하기 위한 축자영감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단지 독자가 성경의 권위를 성령을 통해서 인증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힐 뿐이다. 또한 이 구절에서 성경의 무오류를 보존한 성경의 저자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하고 초자연적인 능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선포되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또한 독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양신혜 l 박사는 총신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종교학과 석사과정을 마친 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칼빈의 “성서 영감에 대한 이해: 한국장로교 분열에 나타난 성서 영감과 성서해석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논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백석신학교에 출강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