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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21세기 신학 포인트(3)-저자의 해석학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818
21세기 신학 포인트(3)
저자의 해석학
“21세기 신학 포인트”라는 사뭇 거창한 이름으로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글들의 성격은, 오늘날 변화된 시대정신의 코드를 읽고, 거기에 관한 기독교 신학의 응답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지난 10월호 글에서는 “하나님은 공동체이시다”라는 포인트를 다루었습니다. 공동체 운동이 교회의 대세가 된 이 시대에 저는 거기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삼위일체를 진정한 원형적 공동체로 이해하는 신학의 흐름을 소개했습니다.
또 11월호 글에서는 낙관적 인간관과 종교개혁의 타락한 인간관이 부딪치는 이 시대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저는 “인간은 영이다”라는 포인트를 다루었습니다.
“인간의 영”을 통해 이 모순관계를 극복을 제시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객관적 해석학이 무너진 이 시대에 성경해석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 봅니다. 기독교 신학의 대안으로 저자의 해석학(hermeneutics of the author)을 제안합니다. 부족한 이 글에 대해 여러분의 관심과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김성원 올림
withsungwonkim@hotmail.com


21세기는 성경해석의 위기
근대학문의 객관성에 대한 신념이 시대적으로 무너지고, 해석학 역시도 해체주의와 힘든 씨름을 하고 있는 시대가 오늘의 시대, 소위 포스트모던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 해석학 가운데 성경 해석학이 가장 힘든 것은, 텍스트를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으로 선언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로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텍스트의 의미가 가능한가라고 묻는 시대에 그 텍스트는 하나이며, 각각의 텍스트는 하나의, 그것도 절대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이 파괴적인 시대정신과의 대결에서 정말 학문적으로 지켜내기 힘든 영역이 성경해석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농담 반진담으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옛날에는 성서신학자들이 은혜로웠는데, 이제는 조직신학자들이 더욱 은혜가 있는 것 같네요.” 조직신학자들은 원리를 다루고 교리를 다루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본문과 직접적으로 씨름하는 성서신학자들의 해석학적 고뇌를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약간의 무심함이 더해진다면 더욱 “은혜”로울 수 있겠지요. 참고로, 제가 그런 조직신학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무심함을 자랑하는 저에게도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성경해석학의 문제입니다. 그것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텍스트 자체가 지닌 어려움
성서해석학이 당면하는 첫 번째 문제는 텍스트의 문제입니다. 우선, 기독교의 성서는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텍스트는 사본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우상숭배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원본의 보존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저도 그 말에 깊이 동의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텍스트의 원본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신앙의 대상, 즉 우상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법궤가 우리에게 없듯이, 우리에게 성경의 원본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서 주장하는 우리에게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사본학적으로 볼 때, 그동안 기독교회가 발견하고 보존해 온 성서의 사본들은 그 양에 있어서 다른 문서와 비교할 수 없이 풍부한 것이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 구약의 사본들은 그 내용이 서로 일치하기 때문에,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도 그 내용의 전승이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약의 경우에도 5000개가 넘는 사본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들의 내용 역시도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습니다. 어느 기독교 변증가 가이슬러(Norman Geisler)의 글을 보니 사본들의 내용은 99.5%가 상호일치하고 있으며, 어느 것이 원문인지 확실하지 않은 0.5%의 내용들 가운데서도 교리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 성경의 사본이 하나도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2세기와 3세기 교부들의 저서들 속에 인용된 성경의 본문들을 모아보면 신약성경 본문 전체를 복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요한 2서와 3서에 나타난 딱 일곱 구절만이 없다고 하는군요. 이러한 사본학적 증거들은 너무도 탁월한 것으로, 원본이 없는 문제를 학문적으로 보완해주는 것입니다.

역본이 안고 있는 어려움
그러나 이러한 사본의 거의 완벽한 보존과 일치성이 텍스트 자체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은, 역본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의미의 왜곡과 변화라고 하는 해석학적 상식 앞에서, 우리는 성경의 역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빠짐없이 전달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을 말할 때 복음주의자들이 사본이 아니라 “원본의 무오성”으로 말하는 것은 정직한 지적 고백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은 “무지한” 조직신학자라 할지라도 계시론의 일부로써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욱 정직히 말하자면, 원본의 무오성이란 해석학적인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신학적인 주장입니다. 원본을 본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곤혹스럽습니다.

정경화의 어려움
텍스트 자체와 연관해서 또 하나 우리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문제는 성경의 정경화에 관한 것입니다. 정경(Canon)이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인한 성경을 말하는데, 캐논이라는 말은 길이를 재는 자로 쓰인 갈대에서 비롯했다고 합니다. 즉, 정경이란 교회의 믿음과 실천의 기준이 되는 성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신교가 인정하는 66권의 성경이 한 권의 성경으로 묶이기까지 길고 긴 교회의 역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서 66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에서는 어거스틴(Augustine)이래로 66권외에도 14-15권의 책들을 추가로 정경에 포함시켜 왔습니다. 개신교의 66권 정경은 16세기 종교개혁에 이르러서야 루터(Martin Luther)가 연옥의 존재에 관한 논쟁 등의 과정에서 외경(Apocrypha)들을 정경에서 제외하여 정해지게 된 것입니다. 바실레이아디스 (Petros Vasileiadis) 교수에 의하면 예전 안에서의 성경을 강조하는 희랍 정교회에서도 한 권으로 된 정경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찾는 어려움
성경해석학의 두 번째 문제는 본문의 의미를 찾는 어려움입니다. 소위 “문자적 의미”를 발견하는 과제이자, “원 의미”(original meaning)를 찾는 문제입니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에 언어로 된 텍스트는 공통적이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의미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해석의 첫걸음은 언제나 그 언어표현에 대한 언어학적 접근일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언어의 객관적 측면에 대한 이해는 객관적 해석에 대한 신념을 낳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2세기 안디옥학파(Antiochian School)로부터 시작하여 근대 해석학에 이릅니다. 하나의 인상적인 예를 든다면, 철학자 후설(Edmund Husserl)의 초기 현상학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물의 본질, 텍스트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이론화해 갔습니다. 그러나 후에 후설은 자신이 제1철학(die erste philosophie)라고 불렀던 이러한 절대주의적 해석학을 결국 포기하고 소위 생활세계의 현상학으로 나아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객관주의적 인식과 해석의 실패는 근대 인식론의 완성자인 칸트(Immanuel Kant)가 일찍이 예견한 것으로, 사물 자체(Ding an sich)를 우리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이 칸트의 분명한 결론이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주관(subject)과 객관(object)이 분리된 두 실체(substance)라는 식의 근대적 존재론과 인식론의 틀 속에서는 그 누구도 주-객의 멀고먼 다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텍스트의 배경이해에 관한 어려움
성경해석의 세 번째 문제는 본문에 대한 상황적, 문화역사적 이해의 어려움입니다. 과거 해석학을 공부하면서 저는 “사실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라는 랑케(Leopold von Ranke)사학파의 담대한 선언을 인상 깊게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사학은 또 다른 근대적 낙관주의의 산물로써, 실증적인 역사 연구를 통해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역사적 예수 연구입니다. 과학적, 실증적 역사학이 발전하면서 신학자들은 그것을 성경의 본문에 적용하여 예수님에 대한 정확무오한 역사적 인식에 도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예수전기들이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희극적인 것은, 이 전기들이 그려내는 예수님의 모습들이 모두 다르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텍스트에 쓰인 언어는 문화의 산물이며, 언어가 기록하는 사건들은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분명 문화적, 역사적 실증연구들이 텍스트의 이해에 기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텍스트를 하나님의 계시로 포착하는 객관적인 도구나 틀이 되기에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역사학이라고 하는 도구 자체가 주관성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역사학적 성서연구는 한계가 있다고 했던 양식사학파의 대가 신학자 불트만(Rudolf Bultmann)의 말은 정직한 고백입니다. 불트만이 실증적 역사연구의 방법론을 떠날 때, 신약학자 래드(George Elden Ladd)의 표현대로 불트만이 역사로부터 날아오를 때(flight from history),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할지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해석자는 자신이 가진 전이해(pre-understanding)를 가지고 텍스트를 보게 되며,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대한 원리적 이해의 어려움
성경해석의 네 번째 문제는 본문에 대한 신학적/원리적 이해의 어려움입니다. 해석학에 있어서 원리적 혹은 신학적 이해란 텍스트 전체에서 그 텍스트의 의미를 바라보는 해석학적 입장이나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종교개혁자들이 성서를 성서로 해석하라고 강조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적/신학적 접근이 텍스트에 대한 다른 이해보다 안전한 것은, 해석자 개인이 가진 전이해(pre-understanding)나 지평(horizon)을 넘어서서 본문 전체가 가지고 있는 지평에서 개개 본문의 부분들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 전체의 내적 일관성의 관점에서 개개 본문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적 접근 역시도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문제란, 이러한 방법론이 본문 자체의 논리적 일관성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러한 방법론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특정한 관점은 본문이 가질 수 있는 다른 관점이나 다양성을 무시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루터가 그의 깊은 성경연구를 통해서 도달한 원리가 “대속자 그리스도” “믿음으로 구원 얻는 칭의”와 같은 신학적 관점인데, 이러한 원리는 해석학적인 순환을 통해서 다른 본문들의 해석에 원리적인 시각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선행이라든지 인간의 자율성이라든지 하는 성경의 다른 메시지들을 억압하는 해석학적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의 복음”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러한 해석학적 접근의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본문이 하나의 일관된 원리나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원리적 접근은 늘 해석적 오류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해석에 필요한 과정들을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해석학의 이러한 과정들은 그 하나하나가 필수적인 과정들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성경본문에 접근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해석학적 어려움들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석의 객관성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시대의 해석학들이 나름대로 학문적 정직성을 가지고 두 손을 들고 포기하고 돌아서는 상황 속에서, 개신교는, 복음주의는, 어떤 근거로써 우리 손에 들린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을까요? 설교자는 어떤 방법으로 그의 해석과 메시지가 그 책의 메시지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요?

저자의 해석학(A Hermeutics of the Author)
제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저자에게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저자의 해석학”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여기에 책이 두 권 있습니다. 제 왼손에는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 한 권이 있고, 제 오른손에는 조정래 선생의 소설 『태백산맥』 한 권이 있습니다. 저는 이 두 책을 읽고 그 책의 내용들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시도합니다. 저의 해석학적 목표는 그 책의 원의미(original meaning)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먼저 이들 저자들의 원고를 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원고와 출판된 원고를 공들여 비교 대조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 결과 몇 군데의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사 측에서 의도적으로 바꾼듯한 몇 개의 단어들도 발견되었습니다. 저는 손으로 쓴 초고를 따라 내용수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본문의 내용들을 차근차근 음미하면서 그 문자적 내용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어렵습니다. 토지에 사용된 많은 토착방언들은 같은 한국 사람인 제게도 외국어처럼 다가오면서 곤혹스럽게 합니다. 결국 그 지역 방언을 모아놓은 사전을 볼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보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표현들은 그 의미가 객관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막연하기만 합니다. 그 다음 작업은 그 책을 넘어서서 전집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두 책들 다 재미있는 책들이었기 때문에 책장은 잘 넘어갔지만, 전체의 흐름을 마음에 새기는 일은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긴 책이기 때문에 반복해서 읽어야만 했고, 나중에는 아무런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길고 지루한 독서와 연구가 끝난 후에야 저는 비로소 제가 연구대상으로 정한 특정한 책 한 권의 의미와 역할을 어느 정도 잡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소설 『토지』와 『태백산맥』을 연구하는 학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저는 그 책의 다른 연구자들, 전문가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고, 많은 의견들과 이견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토지』에 대한 사회경제사적 이해와 『태백산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이해에 대해서는 공감이 가면서도, 그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가진 유장한 철학적, 인간학적 깊이가 일부 무시되거나 간과된다는 느낌도 가졌습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이러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이제, 나는 묻습니다. 내가 도달한 이 해석은 정당한 것일까요? 이 해석은 본문의 원의미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나의 해석학적 연구는 여기서 대체로 매듭지을 수 있는 것일까요? 연구를 마무리하고 싶은 나의 마음과는 별개로 저는 한 가지를 빠뜨리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저자의 의도입니다. 나의 해석은 저자의 해석과 과연 상응하는 것일까요? 물론 저자의 집필의도와 저자의 작품은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저자의 작품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면도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을 위해 나는 그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두 책은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해석학적으로 결정적인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한 책의 저자는 이 세상을 버렸고, 다른 한 책의 저자는 이 땅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박경리 작가는 외로운 사위와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을 뒤로하고 2008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조정래 작가는 지금 우리 곁에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조정래 작가에게 연락하여 대화할 수 있다면, 『태백산맥』의 그 한 책을 해석함에 있어서 크나큰, 결정적인 도움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저자의 해석학”입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오늘날의 해체주의적 해석학에 입각하여 저자를 무시하고, 저자가 의미하지 않았던 의미를 그 작품에서 발굴하고 즐거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잠재의식의 해석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해석학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해석학이 이러한 예들과 다른 것은, 성경의 저자는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알고 있으며, 자신의 의도를 인간의 언어에 최선의 방법으로 담아낼 수 있는 신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성경의 저자가 살아 계시다면? 요한이나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성경의 제2저자는 오래 전에 이 땅을 떠나 영원을 향했지만, 성경의 제1저자이신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면? 그리고 만일 그분이 우리에게 성경 본문을 풀어 주시고, 설명해 주실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해석과정의 어려움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른 해석, 참된 해석에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해석학적 문제를 예견하신 듯,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당신이 이 글을 읽으시는 오늘날, 세계 기독교인의 약 70%가 은사주의적 기독교인(charismatic Christian)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의 현재적 역사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이 성령님의 세계에 눈을 떴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고, 그들이 언어와 개념의 한계들을 돌파하여 진리의 길들을 열어 왔습니다. 성경에 직접 나타나지 않는 삼위일체의 교리의 정립이 어떻게 하든 제국을 기독교의 이데올로기로 통일하려고 했던 세속 정치가인 황제의 채근 아래서, 오늘날 한국 국회처럼 정치싸움의 와중에서 통과된 소위 MB언론법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성령님을 향한 눈으로 보면 성령 하나님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에서 살았던 사시마의 주교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에게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참된 내재적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리는 공의회가 열리는 콘스탄티노플로 향했고, 그곳에서 부활교회를 개척하고 성령님의 하나님되심을 설교했고, 그의 설교를 통해 흘러간 은혜와 각성들로 인해 주후 381년의 오순절 날에 삼위일체의 교리가 교회가 깨달은 진리로 선포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독교회와 교리의 근본에는 성령님의 권위와 역사가 그 근거로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대에 기독교의 성경해석이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입니다.

오리겐(Origen)적 해석학인가?
날카로운 식견을 가지신 분들은 제가 말씀드리는 이러한 “저자의 해석학”에서 주후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Origen)의 체취를 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오리겐에게서 우리가 배울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성서의 신성(the divinity of the Bible)을 믿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았습니다. 그 결과로서 오리겐은 누구보다 성서를 사랑했고, 성서를 많이 읽었고 많이 가르쳤던 것입니다. 둘째로 오리겐의 위대성은 성경의 해석학적 문제들을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더 깊은 진리로 나아가는 문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신성에 대한 신뢰에서만 비롯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당대의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해석에도 정통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영적해석자”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충고입니다. 그는 기도하고 성경 보는 단순한 성경해석에만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원어성경을 읽기 위해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당대의 신학과 역사학을 통해서 그 성경의 진리들을 이해하고자 연구하는 성경연구자였습니다. 사실, 성경 본문이 지닌 깊고도 중층적인 의미구조를 파악하는데 한 길 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다 그런 것처럼, 마셔도 마셔도 다함이 없는 그 풍성한 의미를 파악하는 일에 방법의 제한이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해석학과 제가 말씀드리는 저자의 해석학 간에는 차이도 있습니다. 오리겐에게서 보이는 실수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철학적 사유에 과도하게 기대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텍스트의 풀리지 않는 표현이나, 역사적으로 오류처럼 보이는 기록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미가 있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신플라톤적 철학을 사용하여 사변적인 방법으로 성경의 의미를 건축해 나아가곤 했습니다. 이에 반해, 21세기 복음주의 성령론 해석학은 저자의 신성(Divinity of the Author)을 믿습니다. 우리가 깊은 사변으로 텍스트를 합리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신학적 정합성이나 논리성보다 더 크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해석적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썼던 관점대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것을 침묵하는 순종의 해석학입니다. 그때 그것은 우의가 아니라 영적입니다.
둘째로, 오리겐은 소위 영적 해석을 우월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성경 본문의 숨겨진 영적 의미는 다른 의미들을 추월하는 우월한 의미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자이신 성령님께 기대는 복음주의 해석학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자께서는 이미 기록된 본문과는 상관없이 임의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그러므로 저자의 해석학 속에서는 해석된 의미들의 조화 혹은 통일이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자의 해석학”을 통해서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영적” 해석들은 이미 드러난 본문의 의미와 별개가 아니라, 그 본문의 의미들을 받아 그것들을 심화시켜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오리겐의 해석학은 지식적 측면이 강했습니다. 지식적인 해석의 강조는 필연적으로 주지적인(Intellectualistic) 철학의 강조로 이어지며, 심하면 영지주의(Gnosticism), 즉 지식으로 구원받는다는 식의 길로 가게 마련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저자의 해석학”을 통해서 우리의 해석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교제의 영이신 성령님이시기에, 그때의 성경의 해석이란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열어주는 존재론적 해석의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그때 성경은 문자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창문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따르며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적 앎의 진정한 목표인 것입니다. 지식에 머물러 영지주의적인 경향성을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영적 해석과 확연히 구별되는 영적교제가 “저자의 해석학”에는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강조한 사랑의 해석학이며, 루터가 강조한 실천적 해석이며, 후기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해석학이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어렴풋이 이것을 그렸고 그러한 해석학적 이론을 정립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텍스트의 저자이신 성령님을 떠나서 그것이 완성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시작부터 있었던 저자의 해석학
이러한 영적 해석이 황당하게 들린다면 우리는 개신교 복음주의 해석학의 시작부터 성령님에게 기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과 사활을 건 논쟁 가운데 있을 때,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의 근거는 성경,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그것을 비웃었습니다. 성경을 모으고, 공인한 것은 역사적으로 로마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정경되기 이전부터, 아니 성경이 기록되기 이전부터 교회는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교회가 성경을 공인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교회의 책일 뿐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 종교개혁자들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었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신 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도 오직 성경을 말할 수 있는 결정적인 논거입니다. 종교개혁과 개신교 복음주의 성경해석학은 그 출발부터 성령님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나가는 말
해석학적인 절망과 혼란 속에 있는 이 21세기에 교회의 성경해석은 다시 한 번 성령님을 의지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애초에 오류와 오해투성이인 바벨, 즉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하신 말씀을 주신 것은 정녕 은혜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타락한 언어라고 하는 그 혼란스러운 매체에 당신의 말씀을 담아주신 것은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 인간 언어의 의미론적 부족함으로 인한 혼란과 논쟁들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불을 보듯 예견된 해석학적 혼란에 대한 하나님의 대안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저자 자신인 성령님이셨던 것입니다. 이제 성경 해석을 위해 성령님께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묵상의 물결이 퍼져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안심을 줍니다. 이제 성경은 전문가들의 손을 떠나, 루터가 소원한대로 평신도들의 손에서 진정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이 말씀묵상의 물결 속에서 너도 나도 성경말씀을 보고 해석하며, 그 해석에 따라 그들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해석학이 있기에 그러한 우리 시대가 그렇게 염려되지만은 않습니다. 성도들이 비록 텍스트의 문자적 이해와 배경 이해와 신학적 이해가 부족할지라도 그들이 그들 안에 계시고, 그들 가운데 계신 성령님 앞에 나가 깊은 묵상으로 귀 기울일 때 성령님께서는 같은 의미를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Come Holy Spir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