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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21세기 신학 포인트(2)
2013-07-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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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신학 포인트(2)
인간은 영이다
“21세기 신학 포인트”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글들의 성격은, 오늘날 변화된 시대정신의 코드를 읽고, 거기에 관한 기독교 신학의 응답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지난 호 글에서는 “하나님은 공동체이시다”라는 포인트를 다루었습니다. 공동체 운동이 교회의 대세가 된 이 시대에 저는 거기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삼위일체를 진정한 원형적 공동체로 이해하는 신학의 흐름을 소개했습니다.
이번 호 글에서는 낙관적 인간관과 종교개혁의 인간관이 부딪치는 이 시대에 대한 신학적 응답으로 저는 “인간은 영이다”라는 포인트를 다루고자 합니다. “인간의 영”을 통해 이 모순관계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너무도 부족한 이 글에 대해 여러분의 관심과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김성원 올림
withsungwonkim@hotmail.com

21세기 복음주의 강단의 인간론적 혼란
오늘날 복음주의 설교들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은 혼란스럽습니다. 한편에서는 전적인 인간긍정의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종교개혁적인 인간부정의 메시지가 혼재하는 모습입니다.
인간긍정의 메시지의 대표주자로는 미국의 죠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님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분의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어 보면, 너무나 은혜롭습니다. 또 격려와 힘을 얻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구름 떼 같은 성도들이 체육관에 모이며, 그는 오늘날 빌리 그래이엄을 잇는 차세대 미국 기독교계 리더로 인정받는 분위기입니다. 전 세계에서 그의 설교를 방송으로 듣고, 인터넷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신학교 학생들에게도 오스틴 목사님은 설교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설교를 비판하는 분들은 오스틴 목사님의 설교에는 신학이 없다고 합니다. 특히 설교 내용 가운데 죄의 문제와 십자가가 빠져 있다는 지적들을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의 인간관이 오늘날의 긍정적 인간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의 설교 속에 나타난 인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결심하고 노력함으로 변화되는 인간,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비전들을 성취하는 인간입니다.
한편, 부정적 인간관의 대표 격으로는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을 들 수 있습니다. 편지를 쓸 때 “당신의 무익한 종”이라고 사인했던 죠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의 자기부정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또 저는 몇 년 전에 장례예배에 참석했다가 주례 목사님의 집례와 말씀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장로교 소속의 이 목사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이야기만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유족에 대한 위로라든지, 돌아가신 분에 대한 추모라든지 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이 빠진 그의 설교는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는 개혁주의의 위대한 전통을 그대로 실천하려는 시도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오면서 저는 같은 목사로서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얼굴이 뜨겁도록 미안하고 언짢았지만, 인간에 대한 그의 이러한 의도적인 무관심이 저로 하나님 앞에 선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생각하게 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한 것을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강단의 혼란은 자연스럽게 성도들의 인식의 혼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기도수련회를 인도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참가자들에게 한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대답이 어땠냐 하면, 나이 드신 분들 (특히 남자 분들)은 별 예외없이 “죄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반면, 젊은이들과 몇몇 여자 집사 권사님들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둘 다 이해되는 측면들이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 둘은 상극에 해당하는 관점이라 하겠습니다.

신학적 인간론의 뿌리깊은 혼란
교회강단과 성도들의 이러한 인간관의 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우연도 아닙니다. 신학 인간론의 역사 자체가 이러한 혼란과 논쟁을 품고 왔기 때문입니다. 5세기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과 펠라기우스(Pelagius)의 논쟁은 바로 인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성악설을 주장한 어거스틴과 원죄를 부인하고 성선설을 주장한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어거스틴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펠라기우스의 관점을 다시 수용하여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로 그들의 입장을 정리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인간의 책임과 선행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율법주의로 전락하게 되고, 인본주의, 이성주의로 변질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16세기에 이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고 나온 것이 종교개혁이 아니었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종교개혁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반성이었으며, 인간 본성의 악함에 대한 어거스틴의 고백의 재현이었습니다. 이것이 검은 옷을 입고 살았던 청교도주의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러나 희랍정교회 속에서는 또 다른 신학적 인간론의 흐름이 있었는데, 그들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로서 이해했고, 인간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신성한 존재가 될 수 있다(Theosis, Divinization)고 주장했습니다. 웨슬레 학자인 랜디 매독스(Randy Maddox)에 의하면 18세기의 웨슬레 운동은 이러한 정교회 신학적 전통에 서서 인간의 참된 변화(Real Change),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9,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신학적 인간론의 이러한 긴장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긍정적 인간관을 전개하였지만, 바르트(Karl Barth)는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없다”(homo peccator non capax verbi divini)고 하면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인간의 죄성을 예언자적으로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가 보는 것처럼,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바르트의 신학적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오늘의 복음주의 신학은 다시금 낙관적 인간관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대로 로버트 슐러(Robert Schuler) 목사님도 이러한 낙관적 인간관을 신학적으로 옹호하고 설교하는 분입니다. 수년 전에 그의 목회학 박사 논문을 보니까, 그는 종교개혁의 본질로서 인간의 회복을 주목하고 믿음 안에서 비전을 성취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의 긍정적 사고방식의 설교는 이러한 신학적 배경을 깔고 있었습니다. 종교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ckson)도 종교개혁 자체에서 이러한 긍정의 인간관을 발견합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인 그의 책 Young Man Luther에서 에릭슨은 종교개혁자 루터가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문제 많은 자아를 긍정할 용기를 얻었다고 결론 맺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simul justus et peccator)라는 종교개혁의 테제(thesis) 자체가 이러한 인간관의 혼란을 품고 있는 셈입니다.

인간론 혼란의 근원인 성경?
그런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다양성 내지는 혼란의 근원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선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무익하고, 선을 행하는 자도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12)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역시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야 하는 존재입니다.(빌 2:12) 그러나, 또한 성경은 인간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며,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이 아들까지도 내어주신 천사도 흠모하는 존재입니다. 동방교회 신학의 모토가 되는 베드로후서 1장 3-5절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성인들(saints)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왕된 제사장들이며,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립니다.(벧전 2:9)

통일된 성경적 인간관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인간관의 다양성을 보면서, 성경은 신학보다 크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느낍니다. 신학은 논리로서 진리를 밝히지만, 성경은 언제나 논리적 정합성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학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결국 그 시대의 신학이며, 인간의 신학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편적 진리들을 온전히 담기에는 부족한 그릇인 것입니다. 과거 제가 합리주의자였을 때 이것은 성경의 부조리이며 흠이었지만, 이제 저는 그것을 성경의 “크기”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잘 쓴 어느 조직신학보다 크며, 칼빈의 기독교강요보다 크고, 웨슬레의 신조보다 큰 것입니다. 그리고 이 크기의 차이가 새로운 시대의 신학에 주는 소망이 됩니다. 21세기, 여러 인간관을 거쳐 온 지금에 혹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정리된 인간관을 허락하시는지를 겸손히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와 함께 성경의 인간관을 다시 정리해 보자면, 우리는 성경의 인간관을 구원 전과 구원 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소위 자연인으로 있을 때, 우리의 본성은 완전히 부패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우리의 본성은 재창조되어 선한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9) 이것이 신학이 제시할 수 있는 인간론 문제의 시간적 해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성경은 먼저 자연인들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성을 가진 인간임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용서와 칭의의 구원을 받아야만 합니다. 루터의 깨달음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복음주의 인간관이라 하면 정녕 이와 같은 죄성의 인간관입니다. 그러나 또한, 성경은 믿는 성도들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인간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 신인류입니다. 죄성 그대로 용서받고 칭의받아 성도가 된 그 사람은 또한 거듭나게 되는데 이 거듭난 인간의 모습은 변화된 인간, 전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이것이 존 웨슬리가 본 인간입니다. 이 새로운 인간은 심지어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자입니다.(벧후 1:3-5) 주님께서 친구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요 15:15) 이들이 땅에서 매면 주님께서 하늘에서도 매어주시고, 이들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주시는 그런 사람들입니다.(마 16:19) 이들은 주님보다도 큰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요 14:12) 그러므로, 성경은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 성악설을, 믿는 자들 가운데서 성선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남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신자의 죄악입니다. 일반론적인 정리가 최종적인 인간론의 해답이 될 수 없는 것은, 신자의 속에 있는 죄악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죄악이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 가운데 죄악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늘어날수록 성도들이 짓는 죄악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난감한 문제 앞에서 신학과 강단은 곤혹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는 말씀을 격려성 차원의 말로 격하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으며, 혹은 다른 극단에 있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죄악을 진정한 죄악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이 둘 모두는 참된 신학이라 볼 수 없습니다. 전자는 불신앙으로, 후자의 입장은 이단으로 떨어진다는데 있습니다.

삼분법적 인간이해와 인간의 영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또 다른 해결책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론 문제의 입체적 해명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간관은 다양합니다. 대체로 구약성경은 통일적인 인간이해를 보여주고 있고, 신약성경은 주도적으로 영혼과 육신을 구분하는 2분설을 말하지만, 바울의 서신 가운데서는 영, 혼, 육의 3분법적 이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영혼육의 삼분설적 인간이해는 인간본성에 대한 가장 입체적인 이해입니다. 이러한 입체적 인간 속에는 혼과 육과 함께 영이라고 하는 기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영이라고 하는 것을 실체적으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몸이 있고, 정신의 영역, 즉 혼이 있듯이, 영이라 불리는 보이지 않는 기관(organ)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분설적 인간이해와 인간의 영에 대한 실체론적 이해는 구원받은 성도 안에 죄악이 있다는 힘든 사실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믿을 때 구원받는-거듭난-부분은 인간의 영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이 새로운 피조물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아무 느낌이나 감흥이나 계시가 없더라도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의 기관이 이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거듭나고 완전히 새로워진 그리스도인에게도 죄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있는 죄악이란 그의 육신이나 그의 영혼에 남아있는 죄악된 삶의 흔적과 습관들인 것입니다. 마치 암이나 종양들이 인간의 몸 속에 있으나 그것을 인간의 본질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은 거듭난 거룩한 영이며, 여전히 죄악이 있을 지라도 그것은 거룩한 영적 본질과는 구별되는 혼과 육의 질병인 것입니다. 질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이듯,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그 본질상 성도이며, 거룩한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의 영에 관한 성경의 증거들
인간의 영이 실체적인 기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의 몇몇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요한복음 3장 1절이하의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예수님의 이 가르침 속에서 거듭나는 것으로서 인간의 영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몸으로 난 것이 몸이듯, 영(성령님)으로 난 것이 영(인간의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관련구절은 로마서 8장 16절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이 구절에 보면, 우리의 영은 증거하는 주체로서 소개되고 있으며 성령과 구별하여 존재함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세 번째,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방언을 영의 언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방언이 인간 영의 언어라면 인간의 영은 실재하는 것이고, 그러한 언어를 말하는 인간의 영은 하나의 실체적 기관임을 알게 됩니다. 넷째로, 마태복음 26장 4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졸고 자는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 말씀하시면서 “마음(영)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도와 소원의 주체로서 인간의 영이 있다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인간의 영의 실재성을 가리키는 여러 구절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에 관한 신학적 무지
인간의 영이 실재적이고 실체적인 것임을 많은 목회자들은 이미 알고 있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신학의 선배들은 이러한 인간의 영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무시해 왔습니다. 칼빈(John Calvin)의 기독교 강요(Christian Institues)에 보면 그는 인간의 영을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 즉 혼(Soul)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웨슬레(John Wesley) 선생은 영혼을 하나로 보아 이분설적 인간관을 지켰습니다. 복음주의 신학 전통 속에서 정통적인 인간관은 거의 이와 같은 이분설적 인간관이었습니다. 인간의 영은 신학 속에서 언제나 하나의 유비(analogy)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신학자 아놀드 콤(Arnold Come)이 쓴 좬인간의 영과 성령좭(Human Spirit and Holy Spirit)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느꼈던 실망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는 책의 제목이 무색하게도 영이라고 하는 개념을 개개인의 정신적 잠재성의 실현(realized potential)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결론 맺고 있었습니다. 하기야 그의 바르트(Karl Barth)적 신학 성향에 따라 성령님 자신을 종속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인간의 영이야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성령님과 인간의 영에 대한 이와 같은 무지함과 무관심은 콤 자신이 그 책에서 고백하듯 서구신학의 합리주의, 논리주의적 한계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합리적 신학을 뛰어넘는 이와 같은 범주들은 서구 신학자들에게는 금기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서구적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가운데서 성령과 인간의 영은 체험되고 회자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영에 대한 신학적 관심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서구문명이 이성과 합리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소위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로 진입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영성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과정신학자 존 캅(John Cobb)은 인간의 영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인간의 중심으로, 또 내적 통일원리로 이해합니다. 비록 철학적인 것에 머무르기는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영이라고 하는 개념이 더 이상 신학과 철학에 낯선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영이 실재라면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만일 인간의 영이 혼과 구별되는 실체론적 기관이라면 그 결과와 영향은 지대할 것입니다.
1. 거듭남에 대한 명쾌한 설명
만일 인간의 영이 실재한다면, 그것의 가장 직접적인 열매는 거듭남에 대한 분명한 이해일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났다고 하지만 그 본질적 변화에 대해서 말하지 못합니다. 종교개혁신학은 칭의의 설명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지만, 아직도 중생의 신학에 대해서는 모호한 것입니다. 중생이 인간의 “태어남”에 해당하는 본질적인 변혁이라면, 무엇이 그처럼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인지요? 성도들의 삶 어디를 들여다보아도 우리는 본질적 변화를 발견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이 실재한다면, 우리는 짧고 명쾌하게 그 변화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었던 영이 살았다라고 말입니다.

2. 기독교 인간관의 해결
만일 인간의 영이 실재하는 무엇이라면, 그것의 큰 열매는 또한 신학적 인간관의 문제해결입니다. 이제 신학은 거듭난 신앙인들 속에 있는 인간의 죄성을 분명히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본성을 의로운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원죄와 인간의 거룩성을 한 인간 속에서 충돌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중층적인 인간의 구조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자들의 성선설을 여전히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에 죄악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영이 가진 “본성적 선함”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종교개혁적 인간관의 경고를 우리는 언제까지나 깊이 간직하면서도, 웨슬레적 성화의 과정도 전적으로 긍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화는 죄악된 본성을 가진 인간의 가망없는 내적 투쟁이나 케직사경회가 말하는 것처럼 성령이 우리의 본성과 충돌하는 사건이 아니라, 거듭난 영이 가진 선한 본성의 확장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의 수많은 선한 약속들과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요구들을 무시하지 않고 진정으로 받아들여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참된 기독교 심리학의 정립
인간의 영이 실체적인 것이라면, 또 하나의 귀중한 열매는 신학적 심리학의 독자적 정립입니다. 지금까지 신학은 세속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따라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고 설명해 왔습니다. 그 결과, 신앙의 놀라운 심리적 영향과 치유효과에 대하여 제대로 된 설명이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Sigmund Freud)적 심리체계 속에서 신앙이란 기껏해야 초자아(Super-ego)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적 초자아란 인간에게 심리적 강박으로나 작용하는 성가신 것이며, 본능(Id)의 체계 위에 생성된 부차적인 것(super-structure)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복음이 가진 놀라운 해방과 치유의 기능을 설명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인간의 심리 속에 영이라고 하는 기관이 존재한다면, 이 모든 것의 설명이 가능하게 됩니다. 영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인간의 초자아 따위와는 구별된 인간의 참된 본성이며, 성령님의 자리이며 통로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근본적인 인간의 본능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정신건강을 추구하는 아래로부(bottom-up)의 세속적 심리치료의 방향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영으로부터 시작하는, 위로부터(top down)의 진정한 정신건강과 치유의 길을 해명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영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전인성을 재정의할 수 있게 되고, 전인성(the self)를 향한 기독교의 대안을 내어놓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전인성이란 인간의 영을 중심으로 지정의와 우리의 몸이 화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은 몸과 단지 대립하는 플라톤적(Platonic) 개념이 아닙니다. 영을 따라가는 길은 때로 몸과 대립하고, 그 유한함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결국은 그 것의 본질적 기능을 회복하는 길이며, 진정한 자아실현의 길입니다. 그 이유는 영은 성령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영의 논리는 성령의 논리입니다. 영을 이끄시고 영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심성의 각 부분들을 갈등구조로만 이해하는 세속적 심리학자들의 이해와는 달리,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영적 자아의 각 부분은 사랑으로 조화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4. 기독교 영성신학과 운동의 방향성 제시
인간의 영이 실재하는 무엇이라면 많은 기독교 영성훈련과 운동의 이해와 초점도 달라질 것입니다. 인간의 영과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초점을 둘 때 우리의 영성적 훈련과 실천들은 비로소 정확한 방향성을 갖게 마련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성령론적 영성이며, 인간의 영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기독교 영성훈련을 보면, 서구 영성가들의 훈련은 주로 우리의 개념을 바꾸는 이성적인 훈련이 많습니다. 또 찬양사역과 말씀사역의 방향을 보면 성도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의 수련에 초점을 둘 때 이러한 사역들의 방향은 달라집니다. 진정한 영성의 문은 지식이나 감정이 아니고 인간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교육하여야 하겠고, 인간의 감성을 위로하고 치유하여야 하겠지만, 진정한 영적 성장은 인간의 영이 성장할 때 완성되는 것임을 이제는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맺음말
결론 난 논쟁은 아니지만, 저는 인간의 영을 실재하는 인간의 기관으로, 또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로 받아들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저는 영의 실재성을 붙들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서 저는 더 이상 21세기 복음주의 신학의 인간론이 다시 한번 부분적 인간학으로 전락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인간은 이성이다.” “인간은 의지이다.” “인간은 본능이다.” 부분적인 인간이해에 집착해 온 과거의 인간론의 역사였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인간론의 코드는 다시금 감성과 체험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또 한 번의 감성주의, 본능주의, 경험주의, 낭만주의가 합리성을 대신하여 인간론의 왕좌에 오르고 있습니다. 감성과 주관적 경험들이 지배하는 문명이 겪어야할 질풍과 노도의 혼란이, 수많은 촛불들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으로 갔으면 합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이 모든 인간관의 종합을 보고 싶습니다. 지난 수세기동안 교회는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해 왔습니다. 이제 그분의 자리인 인간의 영을 생각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