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신학 포인트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여름 어느 날 제 은사님 한 분이 제게 물으셨습니다. “왜 이론신학자들은 이 시대 성도들의 고민에 대답하려 하지 않아요?” “왜 조직신학은 오늘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지 않습니까?” 저는 대답했습니다. “해야죠. 당연히 해야죠!” 기독교 신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시대와 함께 흘러갈 수 없는 신학의 훈고학적 고집을 이해할 것입니다. 신학이 불변의 진리를 그 속에 품은 까닭입니다. 그러나 신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또한 변화된 시대와 씨름하는 신학의 벤처적 관심도 이해할 것입니다. 신학은 박제된 진리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진리를 품었고, 어느 시대의 어떤 목마름도 능히 채워줄 능력의 진리를 그 속에 품은 까닭입니다. 시대의 아픔과 물음에 대답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은사님의 정당한 요구에 응답하고자, 신학자의 시대적 책임에 응답하고자 <기독교 사상>의 소중한 지면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저같이 바탕일천한 신학자에게 이 일은 가능한 일이 아님을 절감합니다. 21세기 변화된 시대의 정신은 무엇일까? 그 정신의 물음을 주시는 주님의 대답은 무엇일까? 오늘 교회와 강단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오래 전부터 자신에게 물어온 질문이지만 답은 모호하기만 합니다. 제가 보는 신학 포인트들이 과연 이 시대 교회의 앞길에 제대로 찍은 점선이 될 것인지…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의 판단과 비평이 동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집단지성의 과정, 집단영성의 과정으로 열매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는 것이 적어서 짧게 쓰겠습니다. 전문성이 적어서 쉬운 이야기로 쓰려 합니다. 관심을 끌기 위해 과장스런 표현도 사용할 것 같습니다. 종종 발견하실 글의 경망스러움에 대해 미리 용서를 구합니다.
삼위일체신학의 부흥 요즘 미국신학계에서는 삼위일체론이 부흥을 누리고 있습니다. 최근 10여 년 동안 삼위일체론에 관한 글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듯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 어려운 교리가 이처럼 환한 신학적 조명을 받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울 때 가장 난해한 3대 교리를 들라면 삼위일체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교리, 그리고 성령론이며, 그 중에 으뜸이 삼위일체론이라 했습니다. 삼위일체론에 관한 우스개 소리가 있지요.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는 순간 이단이 된다.” 그래서 신학의 대가들도 삼위일체론은 마지못해 다루는 것이 대세였고, 다룬다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다루지 못했고, 그 정의에 맞는 해석을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학계에 삼위일체론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적 삼위일체론(Social Trinity)의 바람 삼위일체 신학이 오늘날 미국 신학계에서 이처럼 붐을 이루게 된 것은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의 출현이 가장 큰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이 이론을 영어로 Social Trinity라고 부르는데, 직역하자면 “사회적 삼위일체”라고 해야 하겠지만, “사회”라는 단어는 그 이론의 깊은 뜻을 담아내지 못하기에 뜻을 살려 공동체적 삼위일체로 부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정통 삼위일체 교리의 정의는 한 분 하나님, 세 분의 위격입니다.(One Godhead, Three Persons) 공동체적 삼위일체는 이러한 삼위일체의 해석에 있어서 삼위격의 개별성을 강조하고 있고, 또한 일체성을 공동체성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체성을 더 강조해 온 로마 가톨릭 신학이나, 또 로마 신학을 계승한 종교개혁자들의 삼위일체신학과는 구별되는 면이 있게 되었습니다.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이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삼위일체는 공동체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위 하나님은 인격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계시다는 주장입니다. 이 말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이 말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미국 복음주의신학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에 가보니 이러한 대세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삼위일체는 공동체”라는 말에 대해 목회자들은, “다 아는 이야긴데?” 하실 것이지만, 그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신학자들이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의 가장 주된 신학자로는 늘 시대적인 화두를 잡고 신학을 주도해 온 몰트만(Jurgen Moltmann) 교수를 들 수 있고, 영국의 David Brown, Colin Gunton 외 여러 신학자들이 있고, Thomas R. Thompson, 과정신학의 Joseph Bracken, Donald Gelpi가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남미의 Leonardo Boff, Dumitru Staniloe 외 여럿이 있고,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에 관해 중요한 박사논문을 쓴 Cornelius Plantinga, Jr., 또 존재론 시각으로 삼위일체를 다룬 John Zizioulas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을 둘러싼 논쟁 사회적 혹은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에 대해 반대하는 분들의 가장 큰 이유는 삼신론의 위험입니다. 성 삼위가 독립적인 존재라면 삼위일체의 또 한 축인 삼위의 본질적 일체성이 간과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또한 반대론자들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 이러한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이 없거나 적었다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다수의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자들은 그래서 사회적인 삼위일체론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반면 이 새로운 삼위일체론에 대해 찬성하는 신학자들은 삼신론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플랜팅가(Cornelius Plantinga Jr.) 교수는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배척한 다신론들은 신들끼리 서로 무관하거나 갈등과 지배관계에 있는 신들이기 때문에, 아가페 사랑을 통한 공동체적, 본질적 일체성을 지닌 기독교의 성 삼위는 그 인격적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삼신론이나 다신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성 삼위 하나님이 세 분의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이방종교에서 믿는 여러 신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공동체적 일체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교리에 삼신론, 다신론 종교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 분의 하나님의 관계성이란 우리 인간세계에서 볼 수 있는 불완전하고 외연적인 관계성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으로 서로의 개별성을 공유하며, 그 본질이 상호간 연락되는 관계성이기에 이들을 단지 셋이다 라고 말하며 다신론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옳지 못한 비판이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자들이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핵심 단어로 희랍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가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상호침투 (mutual-penetration)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분 하나님의 개별적 본성들은 개별성으로 남아있지 않고, 상호 침투하며 공유되어지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찬성론자들은 그간의 신학이 철학적 일원론과 제왕적 수직문화의 영향으로 삼위일체의 공동체적인 본질을 잘 나타내지 못했음을 비판합니다. 삼위일체의 본질은 확고하게 구별되는 인격(robust and distinct personality)을 가진 세 신격체의 공동체적 연합인데, 과거 철학과 문화의 영향으로 신학자들이 그것을 잘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 등에 의해 시작된 희랍의 존재론에서 참다운 존재는 부동이며 하나이며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복잡하거나 나누어지거나 운동하는 존재는 열등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존재론은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일체성, 단순성, 부동성의 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문화적으로도 유럽의 정치제도가 제왕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인 계급구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도 이러한 1인 절대권력의 형식을 갖는 것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의 절대적 유일신론의 신학도 삼위일체의 일체성과 성부론적 강조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삼위일체의 참된 의미는 그러한 문화적인 영향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보면, 이제 민주화되고, 다원화된 21세기의 철학과 문화 속에서 이제 우리는 비로소 세 분 하나님이 지니신 개별성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삼위성은 이전 시대의 철학과 문화가 볼 수 있었던 신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에 이제야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지지울러스(John Zizioulas)라는 신학자는 삼위일체가 발견한 인격(Person)이라는 신학적 개념이야말로 실체니 본질이니 하는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론의 범주들을 넘어서는 혁명적인 범주라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의 삼위 하나님을 나타내는 “위격”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희랍어 휴포스타시스 (hypostasis)인데 이 철학적 개념이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로 번역되고 통일될 때 희랍철학자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깨달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가장 바탕에 있는, 근원적인 존재인 휴포스타시스가 다름 아니라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세기, 다원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 인격주의 시대에 비로소 그것을 우리는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찬성론자들은 공동체적 삼위일체가 성서적 삼위일체론이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성경에 보면 세 분 하나님의 인격적 독립성과 교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삼위일체의 공동체성의 가장 분명한 예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예수님의 기도를 보려고 합니다. 제가 볼 때 마태복음 26장 39절, 마가복음 14장 36절, 누가복음 22장 42절에서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분명 성부 하나님과 의지적으로 구별되는 독립적 인격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시며 또한 예수님은 본질적인 아가페적 공동체성을 통해서 하나됨을 지키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 분 하나님의 의지적 개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일관된 의지가 가능한 것입니다.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이 유행하는 배경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이 왜 이렇게 유행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문화사적 시대정신의 변화를 들 수 있지만 그 외에도 진지한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로, 성령님의 복권(?) 노력을 들 수 있습니다. 성령운동이 무르익으면서 이제 성령님을 신학적으로 복권(?) 시키자는 요청이 강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 속에서 성령님의 위상은 늘 약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심지어 현대 삼위일체론을 부활시켰다고 말할 수 있는 바르트의 신학 속에서도 성령의 위상은 그야말로 셋째입니다. 그래서 몰트만과 같은 신학자는 성령님의 복권을 위한 신학적 노력으로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을 일으켰습니다. 몰트만은 성부로부터 발원하는 성령이시지만, 예배에 있어서는 성령님으로부터 시작되는 또 하나의 삼위일체론의 역사를 발견하며, 중세 요아킴(Joachim of Fiore)의 삼위일체론의 세 시대구분을 극복하는 온전한 삼위일체론적 구속사를 풀어갑니다. 그래서 성령의 창조, 성령의 구속을 신학적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끌고 가는 신학적 틀이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입니다. 둘째로 오늘의 교회의 공동체 운동이 공동체적 삼위일체론 속에서 그 필연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학의 관계성과 공동체의 뿌리를 하나님의 본성에서 찾으려는 신학적 요청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어느 후배 목사가 물었습니다. “지금 교회가 셀교회로 나아가고 가정교회로 나아가면서 공동체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기본이 약합니다. 왜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학은 뭐합니까? 이러한 현장에 답을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 후배 목사의 질문에 깊은 공감을 가졌습니다.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변화되기 때문에 공동체 운동을 한다면, 꿩 잡는 게 매니까 하는 식의 실용주의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실용주의의 문제는 그 방향성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텍스트에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멈출 때 교회는 타락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삼위일체가 공동체니까 그렇겠지요.” 셋째로,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들이 언제나 신비와 역설로 끝나는 것에 반해서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은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명쾌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역사상 어느 신학자도 명쾌한 설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반해서 공동체적인 삼위일체론은 명료한 대답을 합니다. 삼위일체요? “그것은 세 분 하나님이 본질적인 사랑으로 결합된 나눌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은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가 사용한 소위 핵가족의 비유에 주목합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레고리는 아담과 이브와 셋의 예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가 다른 신학자들의 비유와 다른 것은 세 인격의 예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기억, 의지, 사고력 등등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비유는 거의 대부분 한 인격 속에 일어나는 정신적 작용들을 예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전통적 삼위일체론은 삼위의 이해에 약했던 것입니다. 일체성에 집착한 결과입니다. 결론 난 논쟁은 아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입니다. 삼위일체 정통 교리에 대해 우리가 발견한 가장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체취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드러나는 삼위 하나님의 위대한 공동체성을 제 관계성의 이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저는 15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화가인 루블레프(Andrei Rublev)의 삼위일체 그림을 좋아합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을 찾아왔던 세 천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는 많은 성도들은 그들을 세분의 하나님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가지를 소망합니다. 신학자 몰트만(Jurgen Moltmann)이 담대히 말했듯이, 우리 역사가 끝나는 날에 우리를 그 날까지 인도하신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게 될 것을 마음에 소망해 봅니다. 그분은 어떻게 생기셨을까요? 너무 뵙고 싶습니다.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의 교훈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을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할 때 무엇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그것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입니까? 저는 몇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신앙생활의 본질로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추구해야 합니다. 요즘 말씀묵상 운동을 보니 말씀묵상의 본분을 넘어(?) 하나님과의 교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Q.T.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현대 예배를 보면 그 속에 즐김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정말 예배에 거룩함이 없고, 예배의 본질이 훼손되고 있다며 예배학자들이 염려를 많이 하는 것을 봅니다. 분명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예배가 드러내는 본질적인 의미가 하나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영적 교제로서의 예배입니다. 구약의 제사 예배를 보십시오. 거기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고 엄격한 준비의 과정이 있습니다. 번제단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갖고, 물두멍에서 회개의 시간을, 일곱 촛대 아래에서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받고, 떡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향단에서 진정한 기도를 올려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최종적인 예배의 과정이 있는데, 그것은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는 그것을 지향합니다. 다른 과정을 소홀히 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최종적인 과정에 집중함으로써 오늘날의 예배는 예배의 본질을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는 드리는 예배에서 만나는 예배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찬양, 하나님을 뵈옵는 말씀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신앙생활의 본질로서 우리는 또한 성도의 교제를 추구해야 합니다. 몰트만이 말한 대로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이 내다보는 종말은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교제 속으로 초대받는 사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과 교회의 사역의 본질로서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주목하게 됩니다. 성도의 교제, 영적 교제의 빛 아래에서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들여다 볼 때 우리는 많은 것이 달라져야 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아도 교제중심의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가대의 찬양 후에 박수를 치는 것이 이제는 거절할 수 없는 일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는 예배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면도 있겠지만, 화목제의 경우처럼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어주는 거룩한 행위로 자리매김하는 새로운 의미부여도 가능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목사가 행복해야 성도가 행복해!” 저는 덧붙여 말하고 싶습니다. “부교역자가 행복해야 교회가 행복해!” 사역의 이름으로 교제가 희생될 때 그 곳에는 많은 문제와 비극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역의 이름으로 잊힌 가정생활, 자녀, 배우자, 동역자, 성도들… 교제의 회복이 있어야 하겠고, 교제의 틀과 전제 속에서 소위 사역이라는 것이 재정립되어야 하겠지요. 요한일서 1장 3절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저는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블스 목사의 사모가 고백한 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동역자들과 함께 교회사역에 모든 것을 바쳤을 때, 수년 후에 그들 대부분은 사역을 떠났고, 살아남은 자신의 가정을 제외하고 다른 동역자 가정들은 이혼으로 끝났다는 그 고백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등한시했던 까닭이었을 것으로 저는 짐작합니다. 저 또한 일중독자이며, 관계성에 약하디 약한 한국남자이지만, 교제, 그것은 시대의 화두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목적이 이끄는 교회”의 시대가 저물고, 이제 “교제가 이끄는 삶,” “교제가 이끄는 교회”의 시대가 왔습니다. 셋째로,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은 새로운 공동체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동서양의 사회 모두는 공동체의 모델로서는 실패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동양의 공동체는 그 긴밀한 농경사회적인 유대감을 가지고 있지만, 개개인 구성원들의 개성과 의견을 존중하고, 여성과 약자들의 인격을 존중하는데 실패했던 권위주의 사회였습니다. 개인 간의 거리라는 면에서 그들은 가까웠지만 개인의 인격이라는 면에서 실패한 사회였습니다. “짜장면으로 통일”하고, 회의에서 상급자들이 말하고 끝나는 사회는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중국영화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엄청난 숫자의 군인들이나 신하들을 볼 때 답답한 마음을 느낍니다. 시대는 이미 그러한 권위주의의 낌새라도 싫어한다는 것을 우리는 광화문 촛불들을 통해서 봤습니다. 다른 한 편, 서양의 사회는 모래알과 같은 개인주의로서 실패했습니다. 그들의 사회는 자신의 이익에 기반한 계약적인 사회로 밖에 자리매김할 수 없고, 거기에는 본질적인 나눔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How are you?” “I am fine” 하는 공식화된 인사말을 나눌 때마다 서구문명의 모래알, 유리벽의 슬픔을 저는 느낍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진정한 인격적 존중과 개별성의 인정과, 깊은 나눔과 하나된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그런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까? 아니면 유교적 권위주의에 편승하면서 질서와 효율성의 이름으로 꽁꽁 얼어붙은 또 하나의 한국사회입니까? 아니, 과거의 한국입니까? 지금 한국문화는 그것을 지나쳤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을 묵상해 볼 때, 교회에 주는 교훈과 경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적 삼위일체 속에는 상호존중이 살아 있습니다. 성부의 독재(monarchy of the Father)가 살아 있지만, 또한 구원에 있어서 성자로부터 시작되는, 예배에 있어서 성령으로부터의 시작되는 역사들이 있습니다. 순종이 있지만, 권위주의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는 새로운 공동체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저는 후에 이 시대 리더십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해 간단히 써 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너무 늦기 전에 유교적 유산들을 극복하고 진정한 성경적 공동체를 세울 때입니다.
못난 글을 맺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론을 공동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이 교회에 주는 교훈은 너무도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위일체론적 영성이라 할까요? 그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그것을 좀 더 깊이 묵상할 소망을 가집니다. 이 글에 대한 여러분의 비평과 그를 통한 교제를 소망합니다.
김성원 l 교수는 서울신대와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를,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철학적 신학을 전공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학위 논문은 Social Trinitarian Pneumatology in Process를 주제로 하여 복음주의적 성령론을 과정철학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를 하였다. 기독교 영성과 시대정신의 이해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올해 초부터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