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주의 영화와 우리의 영광
주의 이전의 하나님의 본체 (요 17:5)
우리의 현재의 자랑 (갈 6:14)
하나님께 합당하신 주님 (고전 15:28)
우리의 효력있는 영광 (롬 8:30)
주님의 신실하신 하나님의 얼굴 (요 1:34)
우리의 영구적인 영광 (요 17:24)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기독교 체험이 있어야 하지만 더 많은 것이 있어야 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고맙게도 기독교에 관심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도 하지만, 주님께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만일 우리가 정확하게 진리를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경험적으로 우리를 중생시키셨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감상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태어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련한 것 중에 무엇을 변화시켰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이 점이 제일 먼저 완벽하게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26:18절에서 묘사된 체험이 있다. 우리는 새생명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후 우리는 새생명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내용들에 의해 교훈을 받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체험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체험할 수 없는 그러한 것 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워야 하며, 우리의 체험에서 비롯된 편견에 따라 선택해서는 안된다.
주의 이전의 하나님의 본체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오셨다. 주께서 오신 “다른 곳”은 완벽한 신격(deity)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 되신 존재가 아니셨다. 주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빌 2:6). 원래의 완벽하신 신성 안에서의 하나님의 “본체(form-형체)”는 우리가 몸에 의해 이해하는 그런 본체가 아니라 “영광”, 즉 하나님의 온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인간의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본체다. 우리는 그 본체 안에서 “삼위일체”로 불리는 완벽함을 본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적 단어는 아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고의 격렬한 갈등을 거쳐 만들어진 용어로서 하나님의 신성을 사람의 단어로 언급하고자 하는 매우 결정적인 시도이다.
신성의 한 요소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성육신된 아들이 되었다.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죄가 되는 아들’로부터 분리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다른 말로 하면, 절대로 성육신의 교훈과 구속의 교훈을 분리하지 않도록 하라. 성육신은 구속을 목적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를 없이하시려는 목적만으로 성육신하셨음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성육신하지 않으셨다.
인자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사역을 마치면서 완벽한 신격(Deity)으로 귀착하실 것이다 (고전 15:28; 참조, 요 17:5). 이 부분은 우리의 언어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개념으로 붙들려고 할 때 어려움에 봉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속성은 전능, 무소부재, 전지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속성은 거룩이라고 계시하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창조하신 것 중에 가장 연약한 것, 즉 갓난 아기가 되셨음을 계시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념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모두 우상 숭배자들이다. 우리는 이사야가 조롱하던 그 당시의 백성들이 행하던 것을 지적으로 행하고 있다 (사 24:9-20). 우리의 이상(ideal)은 우리가 허용하는 범위 이상으로 우리를 지배할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이상의 감옥 안으로 가두려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계시를 갓난아기들에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거듭나 주님을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두뇌의 주인으로 모실 만큼 정중하고 겸손한가? 우리는 성육신하신 하나님께 하듯 성육신하신 이성(Incarnate Reason)에 기꺼히 순복하는가? 성육신하신 이성은 주 예수님이시다. 누구든지 성육신하신 이성과 어긋나는 이성을 행사하면 어리석은 자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취하여 절대로 우리 자신의 인간적 이성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언제나 주의 말씀을 주의 생명으로 해석해야 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구원을 체험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주님을 믿는 것은 이 세상과 육체와 마귀와 하나님, 사람, 성경 등에 대해 가지신 주님의 관점에 우리가 정신적, 도덕적으로 온전히 헌신함을 포함한다. “또한 나를 믿으라”는 의미는 주께서 주님의 지성을 아버지께 순복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지성을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복함을 뜻한다. 이는 우리의 이성을 행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이성에 우리의 이성을 순복하여 행사하라는 뜻이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 우리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지니셨던 이전의 본체를 언급하고 있다. 인간은 그것이 무엇인지 어떠한 개념도 가질 수 없으며 단지 계시다. 오늘날 널리 퍼진 사악한 가르침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Person)을 분해하려는 이단이 모든 곳에 슬며시 들어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로서의 입장에서 주의 기도 가운데 주께서 가지셨던 이전의 영광을 다시 취할 것을 구하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사오니” (요 17:4). 그 일이 무엇이었는가? 인류를 다시 회복시키는 일이며, 인류를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이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하라고 주신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아무 때나 (at-one-ment; 오스왈드 챔버스는 속죄(atonement)라는 단어가 아무때나(at-one-ment)로 번형되면서 속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감을 암시하고 있다. – 역주 ) 당장에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 놓으셨다. 이제 그 일은 완성되었다. 먼저는 주의 뜻 안에서 완성되었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 – 역주), 이제 곧 실제로 완성될 것이다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 역주). 우리 주님은 주께서 가지셨던 하나님과의 이전의 영광으로 다시 있게 될 것을 기도하신다. 주님의 기도 속에는 인간적인 연결은 없고, 최상의 신성이 있다.
내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주께서 친히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그대로 나는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주님은 온 인류의 운명을 주님과의 관계에 달려있게 하셨다. 인류의 운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니라 그분의 신격(Deity)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신성(Divinity)와 신격(Deity)를 조심스럽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의 신학 사상에 의하면 신성은 하나님께 속한 속성이지만, 신격(Deity)은 인자(사람)시며 하나님의 아들(신)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명을 다 마치신 후에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리시는 신적인 권세를 의미한다. 이를 신성과 구분하여 신격으로 부르고 있다 – 역주).
우리의 현재의 자랑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자랑(Glorying)이란 외적으로 하나님의 명예와 관련된 내면적 기쁨의 체험이다. 바울은 그의 자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한다. “다른 것으로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기쁨은 행복도, 유쾌함도 아니다. 기쁨은 주변 상황과는 젼허 관계없이 내 피 속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삶 가운데 보여주신 기쁨은 주의 속성의 모든 힘들이 아버지의 속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누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즐거움으로 하나님께서 인자로서의 그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셨다. 창조된 목적을 그대로 이룰 때 기쁨을 체험한다. 바울은 우리의 기쁨은 우리가 성도로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성도가 되는가?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삶과 교훈에 대해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 것인가? 거듭난 자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거듭남으로 인해 어떤 차이가 발생했는지 그의 언어의 한계 속에서 당신에게 말해 줄 것이다. 거듭남은 완전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났음을 알리는 표시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실제로 역사하는 새로운 힘, 새 생명, 새 성향을 당신 안에 가지고 있는가?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과 기쁨과 생명을 구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눅 11:13). 우리가 성령을 구할 때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주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약속에 예수님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그토록 쉽게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행하신 일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주께서 친히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 절대로 강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주께서 치르신 모든 것이 항상 우리의 신앙 생활의 배경으로 있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그 이유는 이 문을 통해 모든 새생명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고전 2: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정상적인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흠없는 완벽한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주께서 사셨던 삶의 본이 전부라면 이는 우리를 약 올리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 가운데 사람이 정직하다면 그는 절대적인 절망만 할 것이다. 산상수훈의 팔복 설교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결국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삶이 아닌가? 이때 우리가 하나님과의 완전한 하나됨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모든 것이 설명된다. 우리는 주의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과의 완전한 하나됨에 들어갈 수 있다. 당신은 그 자리에 들어갔는가? 당신이 누구이던 상관없다. 타락한 사람이던, 도덕적인 사람이던 상관없이 누구나 주의 죽음의 문을 통해 하나님과의 하나됨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즐거움의 최고봉이라는 사실에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멈추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이루기 시작하다. 이제 삶의 가장 큰 목적은 사람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람을 향한 공감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수렁에 처박는 일들이 종종있다. 이들은 필요를 기회로 만드는 대신에 소명으로 만들어 버린다. 모든 계명 중에 중에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눅 10:27)이다.
실체의 바탕은 구속이지 이성이 아니다. 이성은 우리가 실체 위에서 일하는 방법의 바탕으로서 도구다. 논리와 이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생명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들이지만 생명 그 자체는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 사람의 지식은 사람을 이끌 힘이 없다. 지식은 사람을 세련된 위선자로 만들던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일 경우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도록 돕는 노예가 된다 (요 7:17).
하나님께 합당하신 주님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 15:28).
이 구절은 요한복음 17:5절의 기도가 이루어진 내용을 담고 있다. 아들이 이룬 구속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모든 것이 주께 굴복하게 되었다. 온 인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될 때 인자는 완벽한 신격으로 귀착하시면서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 모든 것이 아직 주님께 복종한 것은 아님을 기억하라. 구속은 개인적인 구원과 우리의 몸의 구속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세계, 즉 땅 뿐만 아니라 모든 물리적인 우주가 조금도 빠짐없이 전부 구속되어 “새하늘과 새땅”이 됨을 의미한다. 이 의미는 모든 위임되었던 권위는 사라지고 하나님이 완벽한 권위가 되셔서 “만유의 주”가 되실 것을 뜻한다. 감사하게도 만유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 하에 놓일 날이 오고 있다.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을 기다린다. 그때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계실 때 하나님 앞에 서셨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시다. 그분은 온 인류를 대표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류를 보려면 예수님의 삶을 보라. 구속에 의해 인류는 그곳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인류가 실제로 그곳에 도달할 때 인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계시지 않으며 다시 완벽한 신격이 되실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복종하고 하나님은 만유의 주로 계신다. 그때 우리 주님의 기도는 응답될 것이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 그 영광은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의 효력있는 영광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0).
요한복음 17:5절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완벽한 신격의 초월적인 계시를 본다. 요한복음 17:22절에서 주님은 두번째 영광을 말씀하신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예수께서 자신의 위격 안에서 온 인류를 품으시며 대속을 위한 인자가 되셨을 때 주님은 어떤 영광을 가지고 계셨는가? 그때 주의 영광은 무엇이었는가? 주를 보았던 자들마다 “그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였는가? 아니다. 이사야는 그분은 철저하게 볼품없는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다”(사 53:2)고 말하였다. 이 말이 사실일까? 당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 말이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최고를 볼 때 우리는 사랑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틀리다. 주님 당시의 사람들은 최고의 존재를 보았지만 그분을 미워하였다. 주님이 가장 사랑스러우신 분임을 볼 수 있으려면 위로부터 거듭남으로써 내면이 수술을 받아 변화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자신 안의 신성을 효과적으로 감추심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을 멸시하였다. 주의 영광은 실질적 거룩함의 영광이었다. 무엇이 거룩인가?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타는듯한 변모된 도덕성이다. 다른 종류의 거룩은 거짓이거나 위험하다. 고등 기독교 삶(오스왈드 챔버스가 살던 당시의 영국에서 성결과 개인적인 거룩을 강조한 기독교 운동이었다 – 역주)은 추상적인 면으로 쇠퇴할 경향이 높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거룩을 보면, 우리는 거룩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거룩은 우리의 발로 오염되지 않은 길을 걷는 것이며, 우리의 혀로 더러운 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우리의 이성으로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며, 우리의 몸의 기관들로 더러운 거래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마음으로는 더럽운 삶을 살지 않는 것이며 상상으로도 더러운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다고 하시는 실질적 거룩이다. 이것이 바로 성결케 되었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라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효력을 나타내는 성결의 실질적 체험이다.
이것이 우리의 효력있는 영광이다. 바울은 의롭게 됨과 그후의 영화로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말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주님의 즐거움은 지금 현실적으로 체험된다. 이 즐거움은 우리의 의식적 체험을 초월한다. 그 이유는 주님의 즐거움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식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에 달린 명예는 하나님의 명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주의 놀라운 구속에 의해 우리 안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는가? 주님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습관을 가졌는가? 현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실질적 거룩의 영광이 지금 이곳에서의 성도의 영광이다. 먹던 마시던 복음을 선포하던, 우리 안의 온전한 새생명이 삶의 모든 면에서 나타나는 것이 성도의 현재 영광인 것이다.
주님의 신실하신 하나님의 얼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창세기 1장 2-3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서 창조가 시작된다. 요한은 우리를 그 장면으로 이끌어 간다. 또한 잠언 8장을 보라. 말씀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였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하여 육체가 되셨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 우리 주께서 자신에 대하 말씀하신 모든 것은 다음 구절과 완벽하게 일치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30). 예수님은 “나와 인류는 하나이니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또한 어디에서도 “사람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사람 안에 계셨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위격(Person) 안에서 사람의 육체로 나타나셨으며 따라서 주님은 모든 사람들 안에서 같은 사건을 발생시키는 중심부가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이를 위한 주님의 산고 진통은 성육신과 갈보리와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에게서 나온 개념들을 증명하려고 하듯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표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들은 “이성은 하나님이며 논리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죄는 적극적인 행위라기 보다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결함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신성모독은 처음에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다”라는 매우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주장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며 당신도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예수님은 우리가 뒤로 남기는 길이 아니며 바른 방향을 보여주는 지표도 아니다. 예수님은 방법(길) 그 자체다. “내 안에 거하라.” 주님 안에 거하면 결과적으로 주께서 인간의 마음의 가장 깊은 심연을 만족시키신다. 주께서 당신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만족시키셨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당신은 기독교 사역을 하는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왜 그토록 힘쓰는지 설명할 수 있는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아니라면 우리가 하는 기독교 사역은 부패한 종교 상업주의를 소개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마 23:15). 우리는 왜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발생한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이 거듭나는 자리까지 갈 때까지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매일 우리에게 실제로 경험되는 성령에 의해 발생된 영혼을 위한 열정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줄 알기 원한다면 주 예수님을 연구하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 14:9). 주님이 육체로 계실 당시에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보았는가? 그들의 자연적인 눈으로 보았는가? 아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 그들의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의 눈이 열리면서 주님을 알아보았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이성에 의해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새생명에 의해 주님을 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신 얼굴이다.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본 사람 중에 더 이상 예수님을 의심한 사람이 있었던가? 다음과 같은 어리석고 고통스럽고 짜증나게 하는 전혀 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을 고려해 보라. “죽음 후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알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거칠고, 아무런 가치가 없고, 틀리고, 어리석고, 고통스런 질문이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성령에 의해 주님과 접하도록 하라. 그러면 그러한 질문들은 불가능해 질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1). 하나님의 얼굴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는 항상 한 가지 간단한 요점으로 돌아오게 한다. “내게로 오라” (마 11:28).
우리의 영속적인 영광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 17:24)
이제 우리 주님이 우리가 보게 될 영광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대양의 물방울 같이 하나님께 흡수되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구속된 영광의 사람이 하나님과의 상호 사랑에 의해 변모될 때까지 우리는 주님과의 완전한 하나됨으로 들어올려진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의 영광은 무엇인가?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나누었던 영광”이다. 우리의 영속적인 영광은 우리 주의 구속의 결과로서 우리가 구원받고 거룩하게 되고 구속받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것들의 영광으로 들어올려지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상상할 수 없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던 내용이다. 이는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가질 수 있는 영광이 아니라 앞으로 갖게 될 영광으로서 주의 영광을 친히 보는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