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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11. 주의 승천과 우리의 연합 [구속의 심리학] / 오스왈드 챔버스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633
 
11. 주의 승천과 우리의 연합
누가복음 24:50-51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사도행전 1:9-10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주의 변모의 절정 (요 17:4)
우리의 초자연적인 구원 (행 2:33)
완성된 주의 변화 (마 28:18)
우리의 거룩하게 된 안전 (요 14:13)
계속되는 주의 신실함 (행 7:56)
우리의 단순한 만족 (요 17:23)
변모 사건 이후에 우리 주님의 삶 가운데서 발생한 모든 사건들은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 후로부터 우리 주의 삶은 모두 대속적이었다. 변모의 사건까지는 주께서는 가장 평범한 삶을 보이셨다. 그러나 변모 이후로부터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생소하다. 즉, 겟세마네, 십자가, 부활로서 우리의 인간의 삶 가운데서는 이러한 체험들이 없다. 변모 사건 이후로부터 우리는 주께서 사신 삶 보다는 주께서 우리가 주의 생명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여는 방법을 다룬다. 우리 주께서 승천하실 때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인류를 향해 문을 열어두셨다. 주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문이다. 주의 부활 때문에 우리 주님은 모든 개인들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 (요 17:2). 주의 승천에 의해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시게 되었다 (마 28:18).
주의 변모의 절정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
주께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을 다 이루시고, 순종에 의해 주의 자연적인 생명을 영적인 생명으로 변화시켰을 때 주께서는 땅이 더 이상 주님을 붙들 수 없는, 모든 것이 영적인 곳인 변화산 상으로 오르셨다. 주의 참된 속성, 즉 주의 근본적인 신성이 자연적인 것을 통과하여 터져 나왔고 주님은 변모하셨다. 주님은 주의 이 땅에서의 삶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 구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임재가 창세 전에 주께서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영광으로 주를 인도하시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영광을 뒤로 하고 다시 산에서 내려와 타락한 인류와 자신을 일치시키셨다. 그 이유는 갈보리는 통해 새롭게 세워진 인류를 태어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으로부터 하늘로 오르셨다면 주님 혼자만 오르셨을 것이다. 그러했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표준이 되는 사람의 삶을 보여주고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로 사는 것이 얼마나 멋진지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었을까? 우리에게는 우리 앞에 놓인 이상(ideal)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우리가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것을 아는데 주님처럼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산으로부터 하늘로 오르지 않으셨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주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되 주의 영광이나 신성에 대해 말씀을 나누지 않고 이제 곧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관건인 주의 죽음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다. 십자가상에서의 주의 죽음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트셨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가 나타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을 공격했다. “너는 인자로서 결코 해 내지 못할 것이다. 신성으로는 해 낼 수 있겠지만, 성육신한 상태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주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은 인류를 구속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인자로서 해 내셨으며 이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한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효과적으로 인간의 삶에 이루어진 것이 중생이며 성령은 이 놀라운 구속을 우리 속에 실제 현실로 나타나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산에서 승천하시면서 변모는 완성되었다. 승천은 변모의 절정이기 때문에 변화산에서의 변모와 승천의 두 장면은구체적인 부분에 있어서 유사한 부분이 있다. 이제 우리 주님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주의 원래 영광으로 돌아가신다. 이제 주님은 약속대로 모든 변모의 완성으로 곧바로 나아가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로서만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로서 하나님께 돌아가신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담은 무너졌고 죄는 제거되었으며 죽음은 멸망되었다. 원수의 능력은 마비되었고 인자의 승천으로 인해 누구든지 하나님의 보좌로 직접 아나갈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주께서는 승천하시면서 그의 팔을 펼치셨다. 그 팔은 부활하신 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주의 못자국난 손을 보여 주신 팔이다. 따라서 승천과 함께 주의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주님을 본 것은 주의 못자국난 손이다. 못자국난 손은 구속을 상징한다. 천사들은 선포하길 다시 오실 예수는 “바로 똑같은 예수”로서 그에게 속죄의 표시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속죄는 인류 전부가 속죄되었다는 뜻이다. 구속은 완성되었고 누구든지 우리 주께서 이루신 모든 놀라운 일들을 통해 아무런 방해나 저지없이 하나님의 보좌로 직접 나아갈 수 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뿐만 아니라 (요 1:18) 또한 인자로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계시다.
우리의 초자연적인 구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3)
구원은 인간의 속서에 하나님께 속한 위대한 특성이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초자연적이지 않은 구원이란 없다. 인간의 사랑과 신의 사랑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둘은 서로 많이 틀리다. 또한 인간의 덕과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이 말도 진리와는 실제로 거리가 멀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사실에 맞게 조절해야 한다. 죄가 들어오더니 인간과 하나님의 사랑, 사람의 덕과 하나님의 속성 사이에 균열을 만들었다. 지금 인간의 속성 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신성의 잔재이며 굴절이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덕은 인간의 속성이 이룰 약속이 아니라 한때 인간의 속성이었던 것의 잔재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본래의 고결함의 잔재를 우리가 종종 보게 되는 이유는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것들의 올바른 기원을 바르게 추적하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신성에 속한 특성과 인간에게 속한 특성 사이에 매우 뚜렷한 구분을 두신다. 요한복음 15:13절은 자신의 생명을 친구를 위해 내려 놓을 수 있는 인간의 사랑을 언급한다. 그러나 로마서 5:8절은 신적인 사랑을 언급하며 그 사랑의 원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려 놓는다. 이 사랑은 인간의 속성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의미가 인간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도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한다. 그러나 용서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용서는 전적으로 신의 속성에 속한 것이며 이 용서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날 때 이는 기적이다.
철학을 주의하라. 사람들은 복음 선포자의 말을 듣는 것보다 철학자의 말을 듣는 것을 훨씬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복음 선포자는 하나님의 조롱과 날카로운 매질을 언급하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큰 간격이 있다는 계시를 노골적으로 말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계시를 받아들인다면 이는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나야 함을 의미한다. 복음의 메시지는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그 순간에 위로부터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적으로, 우리는 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 속에서 죄를 무시하지 않는 요소는 양심이다. 성경은 지식이나 감정이 아니라 양심을 먼저 다루신다. 성령께서 어떤 사람을 취하셔서 죄를 책망하시면 그는 당장 좌절하게 된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만이 하나님의 앞에서 설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기회가 없음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죄의 책망이 임하면 오직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자살하거나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얕고 피상적이기 때문에 실체에 대해 생각하기를 귀찮아 한다. 우리는 현실적인 안락에 사로 잡혀 안일함과 평안함을 누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오시면 우리의 삶의 균형이 흔들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령이 계시하는 것을 무시하고자 한다.
구원은 언제나 초자연적이다. 성령은 연합을 깨뜨렸던 주범을 다루심으로써 나를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다시 인도하신다. 설득하려는 복음 선포는 위험스러운 것이다. 즉,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자연적인 선상에서 주께서 그들을 개발시켜줄 것이라는 개념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먼저 파괴되어야 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평화와 즐거움을 곧바로 만들어내시지 않으신다. 주님은 고통과 비참과 죄책감과 좌절을 야기시키신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만일 이것이 주께서 행하시기 위해 오신 모든 것이라면 나는 주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께서 오신 모든 목적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여 주의 아버지와 초자연적인 연합을 가져오시기 위해 오셨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즉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길 때 (믿음은 지적 행위가 아니라 전인격적 행위다), 승천하신 주님은 성령에 의해 그 사람을 주의 아버지와 하나가 되도록 이끄신다. 이것이 초자연적인 연합이다.
기독교 신앙 생활의 두개의 중심은 체험과 계시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의 선상에서 사고를 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결코 하나님과 만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빌 2:12-13).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을 취하여 그에게 주의 놀라운 신적 구원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은 성령에 의해 우리 맘에 부은 바 되지만, 우리는 순종으로 주의 속성과의 연결을 유지해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 중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전부 하나님을 소망하는 점에서 옳기 땜누에 현실적으로 어떻게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틀린 가르침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바른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우리가 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의 육체를 통해 역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순종이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구원에 대해 황홀함에 빠진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에 감격한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주께서 지금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가다듬어 주님께 순종하기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우리는 이 썩을 육체 안에서 살 때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생명을 우리의 손가락 끝까지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승천하신 주님께서 모든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살과 피가 하나님의 아들이 주님 자신을 우리 안에서 나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는 반-기독교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는 부정하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되며, 현실의 삶은 조롱으로 침으로 뱉는 신조를 외치는 셈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하신 것을 우리의 삶으로 부정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신성모독이다. 만일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그후 우리는 우리가 주의 생명에 순종하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 성령의 신실함은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모든 부분을 만지심으로서 우리가 양심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시는데에서 잘 나타난다.
완성된 주의 변화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 참조, 마 11:27)
마태복음 11:27절에서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계시는 전부 아들에게 달려있고 주님은 아버지를 계시하는 유일한 중개자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8:18절에서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주님은 나를 성도로 만들 권세를 가지고 계신가? 만일 그러한 권세가 없으시다면 주님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오해한 것이며 또한 나를 나쁜 길로 인도한 것이다. 주께서 땅 위에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가? 내가 추구해야 하는 “땅의 평화”는 어떠한가? 주께서 그것에 대해서도 권세를 가지고 계신가? 내 입술로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나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땅의 평화”를 조롱하며 비웃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은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의 삶은 주께서 아무런 권세가 없는 것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도적으로 자신 안에서 전능, 전지, 무소부재의 능력을 제한하셨다. 지금 주님은 완전한 충만함으로 그러한 능력들을 다 가지고 계시다. 주님은 신으로서 그러한 능력들을 언제나 가지고 계셨다. 지금 주님은 인자로서도 완벽한 충만함으로 그러한 능력들을 소유하고 계시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로서 모든 능력을 가지신다. 이 의미는 누구든지 주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주께서 뭐든지 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거룩하게 된 안전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 14:13)
이 구절은 우리의 구원이 완벽하게 안전한 곳에 놓여 있음을 말해 준다. 이 말씀과 함께 우리 주님의 다른 언급은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오, 그래.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구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 보라! 나는 당신의 그렇게 하기를 도전하고 싶다. 우리 주님은 또한 “너는 뜻을 가지고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즉, 당신의 뜻을 다해 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뜻을 다해 기도를 드리는 때가 거의 드물다. 따라서 거짓 감정이 만들어지기 쉽다. 당신이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고 성령의 소생케 함을 체험하면 당신은 당신의 기도 가운데 피해야 할 것을 알게 된다. ‘구하는 것’ 즉, 뜻을 가지고 기도하는 부분보다 더 빨리 영적 부패에 빠지는 부분이 없다. 복잡하게 구하지 말라. 여러 가지 것들을 구하기를 멈추고 단순하게 기도하라. 우리 주님은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구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그것에 대해 기도할거야” 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해 기도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종종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라고 말하였다.
만일 우리가 거룩케 됨과 성령의 세례 등에 대해 헷갈린다면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책을 쓰셨고, “거룩케 됨(sanctification)”이나 “성령의 세례” 등의 표현은 하나님의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로 가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가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감히 가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정직하게 하나님께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베푸시기를 원하면 뭔가 놀라운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는 계시를 받는다면 당신은 우리 몸 안에서 성령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만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결과들을 주목하라. 썩어 없어질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친구던, 책이던, 관계던 다 떠나게 된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어렵다면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다.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보다 더 간단한 것이 없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강력하고 교만한 것들에 마음을 공감할 때 시작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자격이 되지 않음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빛 가운데 걸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과 하나님의 마음 중심까지 나아갈 수 있는 완벽한 자유가 있다. 주님은 주께서 가지셨던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삶이 주의 승천하심으로 인해 우리에게 가능하게 하셨다.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부탁하지 말라. 우리 주님은 “네 자신이 기도하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는 각각 가정이 있고, 주일 학교가 있고 공동체가 있고 나라가 있다. 우리 중에 몇이나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가? 이러한 기도의 책임을 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뜻을 가지고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두신 것이 아니면 우리의 뜻을 그것에 두면 안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요 14:13). “내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기독교의 속어도 아니며, 그럴싸한 헌신의 용어가 아니라 “내 속성 안에서”라는 뜻이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약 5:16). 어떤 사람들의 기도는 다른 사람들의 기도보다 더욱 효력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착각에 빠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의 열심을 의지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참조, 히 10:19).
계속되는 주의 신실함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행 7:56)
스데반은 승천하신 후의 주님을 본다. 그분은 같은 예수다 (참조, 계 1:7-15). 어떤 사람은 역사 속에 실제했던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 신적으로 영감된 상상의 개념이라고 한다. 그러나 승천하신 분은 속죄의 표시를 가지고 계신 “똑같은 예수”시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의 기록 속에서 승천하신 주님의 특성을 보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의 특성들을 발견할 것이다. 주님은 전능하신 능력 가운데 우리에게 똑같은 특성들 나타내실 것이다.
우리의 단순한 만족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요 17:23)
성령의 세례는 우리를 독자적인 개별성의 껍질로부터 우리를 구원한다. 인격성(personality)라는 의미는, 각각의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영이 깨워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말한다. 개별적인 자아 주장은 껍질이며, 우리 주님과 인격적으로 일치되는 것은 알맹이다. 개별적인 것들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인격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개별성은 모든 것을 ‘밀쳐내며’ 분리하고 고립한다. 어린이는 각각 개별적이며, 개별적이기에 독립해야 한다. 우리 주님은 결코 개별성이나 독자성으로는 정의될 수 없고 오직 인격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주의 모든 생애를 특징짓는 것은 인격성으로서 독자성이나 자기 주장이 없다. 자연적 생명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지면 개별성이 승화되는데 그 이유는 두 사람의 인격성이 서로 합쳐지기 때문이다. 일치는 지배가 아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하나됨은 지배로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됨은 이 둘을 지배한다. 자연 생명 안에서 개별성이 자기 주장을 하게 되면 균열이 생기고 관계 속에서 어려움이 발생한다. 영적인 생명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라고 말씀하셨다. 개별성의 자연적인 독립성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만일 내가 내 자신에 대한 권리를 하나님께 양도하면 내 인격성의 참된 실제 속성이 성령의 내재하심에 의해 하나님께 당장 반응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2)라고 기도하셨다. 바울이 우리에게 새로운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할 때 이는 가장 실천적인 내용을 권면한 것으로서 우리의 현실적 삶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하나됨에 가장 완벽한 조화가 되는 습관을 가지라는 뜻이다. 우리는 항상 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것을 아는 참된 만족이 임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 가운데서 무엇을 추구하시는지를 알기 원한다면 요한복음 17장을 읽으라. 주님은 기도하시길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신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가까우신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30).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구하신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그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생명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방해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절대로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 우리는 초자연적으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초자연적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하고 주님을 순종한다면 주님은 주의 승천하심의 자격에 의해 주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당장 주실 것이다. 그것도 가장 큰 능력과 만족 가운데 기쁨으로 가장 쉽게 주실 것이다. 주님은 승천하신 그날부터 지금까지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