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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10. 주의 부활과 우리의 생명 [구속의 심리학] / 오스왈드 챔버스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921
 
10. 주의 부활과 우리의 생명
선포된 주의 부활 (막 16:5-8)
우리의 영생 (요 20:22)
주의 부활과 운명 (눅 24:26)
우리의 경험적인 생명 (빌 3:10; 롬 6:23)
주의 부활 신성(요 20:17)
우리의 모든 생명 (골 3:1-4)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계시로서 받은 진리들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들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거룩하게 하심을 체험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신적 계시들을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신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우리는 주의 운명과 주의 신성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중생케 하는 힘들이 어디서 오는지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생생한 체험 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받은 마음을 강조한다.
선포된 주의 부활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막 16:5-6).
우리 주님은 죽으시고 장사지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위 구절은 놀랄 수 없는 부활의 선포다. 부활과 관련해서 질문이 생긴다면 그 질문은 거듭남의 필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생긴다. 우리의 일반 상식과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계시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다. 우리는 진리를 찾으려면 혼(soul)을 잃어야만 한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신학에서 ‘혼(soul)’은 영이 몸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본다. 특히 혼은 이성의 활동으로 세워진다. – 역주). 우리는 위로부터 거듭나야 우리 영안으로 성령을 받아들인다. 그후 또 다른 혼, 즉 이성을 다시 세우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상식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실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계시가 말하는 사실들도 받아 들인다. 우리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눈으로 보았어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기 전에는 믿지 않는다 (요 20:29).
우리의 영생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 20:22).
영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7). 즉, 영생이란 주께서 이 곳에 계실 때 주의 인간의 몸으로 나타냈던 생명이 영생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말씀하신다. 주의 생명은 자연적인 출생으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주의 생명은 오직 주의 십자가를 수단으로 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 우리 주의 십자가는 주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주의 부활은 이제 주께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요 17:2).
겟세마네에서의 사탄의 총공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자로서 주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물론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에게는 아무 것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사탄의 도전은 인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감당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한 영혼도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절망적으로 패하였다. 십자가상에서의 인자의 죽음에 의해 구원의 문이 열렸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 문을 통해 하나님의 존전 앞으로 곧바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부활하심으로 인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주의 생명을 부여하실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날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생명을 받고 우리의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옴으로 인해 소생하게(quickened) 된다. 이것이 주의 부활을 통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놀라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 알고자 하여” (빌 3:10).
성령, 구원, 영생은 서로 교환이 가능한 용어들이다. “성령”은 지금 이곳에서 인간 안에서 역사하는 영생의 경험적 이름이다. 영생을 현실로 만드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당부에 의해 성령이 들어오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뭔가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조롱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우리 안에 경험적으로 실제가 되도록 만드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속죄를 우리의 체험으로 적용하시는 진행의 능력을 소유하신 신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오셨다. 즉, 우리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하시고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며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성령을 받을 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신 모든 일들을 우리 안에서 경험적으로 실제가 되도록 하신다.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이다. 우리의 신조들은 우리에게 성령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눅 11:13). 당신은 무능한 삶을 사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실체에 접하라! 하나님께 성령, 곧 주의 영생을 구하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죽을 육체를 통해 예수님의 생명을 나타내기 시작할 것이다. 어느날 우리는 주님의 몸과 같은 몸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우리 주의 부활의 효력을 맛볼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을 수 있으며 주의 구원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주의 부활과 운명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 24:26).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주님은 주의 생명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이 될 것을 알고 계셨다. 이 세상에서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소금의 자격이 되지 않는다. 가장 멋진 사람들은 고통하는 자들이다. 마귀는 그들의 고통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비방하도록 한다. 하나님은 한가지를 추구하시는데 그것은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주님 자신께 어떤 희생이 치루어지더라도, 또한 주의 자녀들에게 어떤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상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죄의 가능성에 대한 책임을 지셨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신 증거는 십자가다. 하나님은 고통하시는 하나님이시지 차가운 경멸 가운데 저 위에서 다스리는 분이 아니시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8). 주님은 아들이 되는 것을 배우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아들이셨기 때문에 온 맘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선택하시고 고난을 받으셨다. 주의 부활 운명은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끄시기” 위해 고통을 받으시고 영광에 들어가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잘못된 것을 위해 긴장이나 고통을 강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구원과 영생은 하나님께서 치르신 대가 때문에 우리가 얻기는 쉽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느낀다면 이는 우리의 인간적 교만을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어린아이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구원에 관한 놀라운 계시를 받을 수 있으며 부활하신 주 예수의 생명을 부여받는 체험을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어려워하는 자들에게 절대로 공감하지 말라. 하나님보다 사탄에게 공감을 하는 것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쉽다 (마 16:23). 그 누구도 하나님보다 사람들에게 더 자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람의 완고함을 공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어렵게 만드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집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우리 주님은 완전하게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셨다. 그 생명은 주께서 성육신하기 전에는 누리지 않았던 생명이다. 주님은 전에 경험치 않았던 생명으로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전에 여러 부활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부활들은 모두 전에 있던 같은 종류의 생명으로 소생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과 사람들과의 완전히 다른 관계로 부활하여 일어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께 주님 자신의 운명을 누구에게든지 줄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한다. 즉, 우리를 하나님이 자녀로 만드실 수 있다. 주의 부활은 우리가 우리의 옛생명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된 생명으로 일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 우리가 …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 되리라” (롬 6:4-5).
우리의 경험적인 생명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참조, 롬 6:23).
영생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어떤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선물”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 아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생명은 죽음의 방법으로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실 것이다. 하나님의 솓구치는 생명은 그 즉시 하나님과 관련없는 것들을 죽도록 미워한다. 우리는 고갈을 체험한다. 지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샘이 마르는 것을 체험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생명은 이제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가리치는 것을 깨닫는다. 그후 성령은 주의 부활의 능력을 드러내어 우리에게 체험하게 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면 신체적 고갈은 언제나 다시 원래의 위치로 회복될 것이다. 고갈은 하나님께서 항상 회복시키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회복은 흥분으로 들뜨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차고 넘치는 생명력의 공급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을 깨닫는다. 이 사실은 먼저 우리에게 계시로 임하는 것이지 체험으로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경험에 의존해서 살 때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께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부여할 권한과 권위를 주었다. 우리의 신앙 체험은 주의 생명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 “나의 모든 (신선한) 근원이 주께 있습니다” (참조, 시 87:7).
당신을 고갈시키는 것들을 조심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해 마련한 것들을 벗어나서 행할 때 당신은 고갈된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곧 바로 힘을 탕진하면서도 주의 생명이 에너지를 공급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한 것들 안에서 행하면 자연적인 고갈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에 의해 신속하게 회복되며 따라서 우리는 피곤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독교의 계시로 가르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당신은 주의 부활의 능력을 아는가? 당신은 주의 부할을 당신의 심오한 삶의 중심에 두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언제나 실체 되시는 주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주의 부활 신성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요 20:17).
인자로서 부활하신 주님은 인류의 특별한 대표자와 대화를 나누신다. 그 대표자는 다름 아닌 주께서 일곱 귀신을 내어 쫓으신 여인이다. 우리 주님은 같은 분이셨지만 주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형용하기 어렵게 변화되셨다. 그래서 마리아는 처음에 주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후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마라아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녀는 너무나 큰 기대와 흥분 가운데 주의 발을 붙들었다. “주께서 다시 오셨으니 모든 것이 잘 될거야!” 마리아는 지금 그녀가 주님과 갖는 관계는 자연적인 감각으로 분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부터 부여되는 생명에 기초한 관계라는 것을 배워야 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께로 올라간다.” 새로운 관계는 이제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관계였다. 주의 부활 신성이란 주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과 하나됨의 관계는 오직 십자가와 부활로만 가능하다. 아무리 연약한 성도라도 그가 “내려 놓을” 의사만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신적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전능한 능력은 우리를 위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은 어린이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주를 의지하는 삶이 된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하다. 성도의 삶의 특징은 스스로 자신을 정결케 하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부를 내어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비닐 하우스 안에서 식물들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만드시고 계시다.
우리의 모든 생명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1-4).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굶긴다.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할 수 없다. 우리 중에는 멋진 영적 체험을 하였지만 절대로 그리스도인다운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인답게 생각을 하지만 그 생각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만 그리스도인처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 둘을 합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위대한 진리 위에 우리의 마음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났다면 우리는 위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 위로부터 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신비하게 들리고 먼 것처럼 들리지만 성도들에게는 자연스럽다. 우리는 언제나 성도를 알아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성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분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은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는 수수께끼같다. 진리는 지적으로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분별된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의 죽을 몸 안에서 역사한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살아있다면 우리는 변화하게 될 것이다. 자연적인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놀랍도록 변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골 3:3).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생명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의심과 불안은 영원히 사라진다. 만일 우리가 위의 것들에 마음을 둘 때 우리는 주 예수를 알므로 불안하지 않게 된다. 그 이유는 주님은 현재의 여러 불안한 것들로 인해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자연인에게 불투명한 것들이 하늘의 것들에 마음을 둔 사람에게는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한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에게 의심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의 평강은 금욕주의적인 평강이 아니다. 그의 평강은 그가 골로새서 3장의 내용대로 오래 살아왔기 때문이다. 즉, 그의 모든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모든 마음이 위의 것들에 있을 때 이 땅의 것들은 변모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를 위하고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이 주님 안에 있다. 따라서 주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신성의 모든 능력이 주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