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주의 십자가와 우리의 제자도
하나님과 죄의 충돌 (행 2:36)
내 자신을 그리스도께 희생으로 드림 (롬 12:1-2; 마 16:24; 눅 9:23)
하나님과 사탄의 대립 (요 12:31-33)
그리스도를 위한 나의 고난 (골 1:24; 고후 1:5; 빌 3:10)
하나님과 구원의 중심 (고후 5:14)
내 자신 안에서의 하나님의 성찬 (행 20:24; 고전 15:30)
계시와 체험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믿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를 체험할 수 없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처럼 성육신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나 중생에 의해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옴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인격적인 성령께서 이 땅에 강림하심이 무엇인지 체험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의 내재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그의 모든 생각을 이러한 계시 위에 기초를 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중생케 하시는 능력을 체험한 후 가장 거룩한 믿음 안에서 그의 사고를 세워 나간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할 수 없다. 교리를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교리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그 믿음을 위해 순교라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체험을 강조한다. 그들은 성경의 모든 계시를 체험을 중심으로 취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던 이러한 관점들은 한쪽으로 치우질 위험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표준으로 삼는 사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역사적인 구속의 완성을 위해 33년간 수고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표준을 보여주는 삶을 사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께서 사신 것처럼 살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육신의 방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이 땅에 오지 않았다. 주님은 이미 존재하시는 신성으로부터 오셨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어떻게 우리가 주님이 사셨던 그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우리는 흉내나 맹세나 의례나 교회 회원이 된다고 하여 하나님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중생할 때 주의 생명이 우리에게 들어옴으로 우리는 그 생명에 들어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주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십자가는 사람의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십자가다. 하나님의 십자가는 결코 사람에 체험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순교자였다고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오늘날 주님을 순교자로 보려는 경향이 자주 있다. 주의 생명이 매우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속죄와 십자가가 제대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성경의 위대함과 생동력이 무시되고 있다. 주님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된 사건이다. 인류는 누구든지 주님의 죽음을 문으로 해서 하나님과의 연합에 들어갈 수 있다. 십자가는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의 중심이며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이다.
하나님과 죄의 충돌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 2:26).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다. 십자가는 순교자의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는 죄악으로 가득한 인류를 대신하시는 예수님의 대속이다. 십자가는 예수님께 우연하게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주님은 십자가를 목적으로 오셨다. 성육신의 모든 목적은 십자가, 즉 “창세로부터 죽음을 당한 어린양” (계 13:8)이다. 십자가는 시간을 초월한다. 실제 십자가 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의 속성을 역사적으로 계시한 사건이다. 하나님의 속성의 상징적 그림은 완전한 자기 중심적인 원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혀 그러하지 않ㄷ. 하나님의 속성의 상징적 그림은 십자가로서 그 팔이 무한한게 펼쳐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계시다. 우리의 십자가는 체험이다. 만일 우리가 잠시라도 십자가의 기본적인 계시를 무시한다면 우리의 체험이 어떠하든 우리의 믿음은 파선될 것이다.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다. 종종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져야 하는 유형의 십자가로 오해한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주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께서 정해주시는 특권이 된다. 우리는 절대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도록 부름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20세기의 감정과 감상으로 십자가를 성스럽게 만든 후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매우 아름답고 슬프게 들리게 하였다. 그러나 쇠 못이 박힌 목재 십자가를 지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고 흉칙한 모습이다. 실제 십자가가 그렇다면 우리는 외부적인 십자가는 우리가 지는 실제 십자가보다 더 흉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우리 주님의 손과 발을 찢은 십자가는 우리의 생각만큼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니란 말인가?
당신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죄에 내리신 심판에 동의하는가? 죄와 죄악은 다른 것이다. 죄는 유전이다. 죄악은 우리가 책임져야 할 행위다. 죄는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서 우리가 어쩔 수 없다. 하나님께서 구속 안에서 죄를 다루신다. 십자가는 하나님와 죄의 충돌을 계시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것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죽일 것이다. 다른 선택은 없다. 우리 안에서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 죄가 죽던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이 죽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 상에서의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에 신학적으로 동의한다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당신은 당신의 생명 속에 있는 죄와 정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는가? 동의한다면 그 순간에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구원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에 동의하는 문제이며 의지의 문제다. 당신은 지금 그 판결을 받아들이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정죄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의 삶에서 현실이 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손가락 및 모든 몸을 통해 나타나지 않는다면 실제로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종교적 사기다.
내 자신을 그리스도께 희생으로 드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참조 마 16:24; 눅 9:23).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 우리는 거룩하지 않은 것을 제단에 드릴 수 없다. 바울이 말한 “형제들”은 성도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들은 거룩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우리 주님은 주의 십자가에 의해 주의 생명에 들어간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때 “죄를 양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죄를 양도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면 죄를 맡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다. 이는 “네 자신에 대한 네 권리를 내게 양도하라”는 뜻이다. 우리의 십자가는 세상 앞에서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권리를 영원히 내려 놓았으며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하늘과 땅과 지옥 등 어느 곳에서든 우리는 주의 것이지 더 이상 내 것이 아님을 나타나는 표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권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주께 드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재능들과 소유들을 드릴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우리가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주셨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줄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아무런 책임을 질 수 없게 된다.
이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죄는 주의 십자가에 의해 다루어졌다.) 자연 생명으로 언급되는 것을 다루신다. 자연 생명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로 상징된 생명으로서 말살이 아닌 희생이 되어야 한다. 희생의 개념은 우리가 가진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주님과 우리의 것으로 영원히 만드시는 것이다. 당신은 그러한 희생을 했는가? 성도인 당신은 주님께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양도했는가? 혹은 주의 구원을 받아들였지만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주께 양도하기를 끝까지 거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거룩은 거룩한 생명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따로 구별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19).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삶의 일반적인 문제들과 시련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과 시련들은 그리스도인이던 아니던 있게 마련이다. 또한 양심 때문에 당하는 아픔도 우리의 십자가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라는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오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권리를 부인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이는 우리 자신에 대한 권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양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뜻을 세워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셨던 것들에 우리가 마음을 쏟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과 관련한 것들만을 행한다. 이 세상에는 우리 주님과 상관이 없는 수백 수천의 옳은 것들이 있다. 그것 중에는 우리 주님께서 “눈” 또는 “오른 손”으로 묘사하는 관계들이 있다. 우리의 오른 손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것들 중에 하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이 네가 나와 동행하는 것을 방해하면 잘라 버리라” (참조, 마 5:29-30)고 말씀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뒷걸음질 친다.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을 반대하지 않지만 주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양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권리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권리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내게 좋은 것들을 포기할 의향이 없으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내게 합법적인 것들을 어떻게 포기합니까!”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포기할 수 없다면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라. 자연적 생명 속에서도 사랑의 대상을 위해 최고의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사랑에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스개 소리며,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욕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질 때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바로 이 사랑이다. 만일 우리가 주의 십자가를 통해 중생의 체험에 들어갔다면 바로 이러한 사랑이 제자도의 조건이기도 하다 (눅 14:26-27, 33). 제자도와 관련해서 항상 ‘만일’을 주목하라. 제자도에는 절대로 강요가 없다. “누구든지 만일 내게 오려거든 … 이것 저것을 미워하라. … 그렇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가 혹시 매우 매력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현대 문명에 가장 요긴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라도 주께서 말씀하시길 “그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 사람은 구원은 받고도 제자가 아닐 수 있다. 사람들은 항상 제자도를 발로 차 버린다. 우리 주님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말씀하시기 보다는 지금 이 세상에서 주께 가치있는 존재가 될 가능성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리 중에 몇이나 예수 그리스도께 가치가 있는가? 우리의 자세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많은 의무를 느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들을 포기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사치라고 생각한다. 이들 중에는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받을 것만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께 내 자신을 드리는 희생은 계시가 아니라 체험이다. 나는 주님께 내 자신을 희생하였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여러가지들 때문에 주께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권리를 양도하기를 거절하였는가? “내 삶에는 너무나 많은 관심거리들이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모든 것을 내려 놓을 것이라고는 기대치 않으실거야.” 언제나 감상적으로 당신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했던대로 당신이 정말로 그러한지 자신에게 말하도록 하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어떤 종류의 엉터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영적인 실체야말로 정말 필요한 것이다. 당신은 “내 모든 것을 바치네” 라고 노래하며 그렇게 된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어색할 뿐이다. 요점은 당신은 하나님께서 조장하시는 상황 가운데서 참으로 모두 드리느냐 하는 것이다. 당신이 다 내려 놓는 즉시 당신은 우리 주님과 깊게 하나가 되어, 무엇을 희생되고 있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립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 12:31-33).
이 세상 왕자와 사탄은 유사 용어다. 사탄은 마귀의 나타남인데 이에 대해서는 사람이 책임이 있다. 즉, 사탄은 사람과 마귀의 교제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창 3장). 우리 주님은 베드로에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마 16:23)라고 하셨지 “마귀야,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후 주님은 사탄을 정의하셨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자기-연민이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2).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마 16:23)라고 하셨다. 베드로의 호소는 자기-유익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 세상 신은 이 기초 위에서 모든 것을 다스린다. 자아-실현은 그의 다스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약 4:4). 세상은 그 삶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고려함이 없이 구성된 시스템이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의 마음이 이 세상 신에 의해 눈이 가리워져 있다고 말한다 (고후 4:3-4). 자아-실현에 기초한 착하고 깨끗하고 옮바른 삶 보다 더 효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에 마음을 막는 것이 없다. 사탄적이라는 것이 꼭 비정상적이고 혐오스러운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탄적으로 잘 처신해 나가는 사람은 도덕적이고 의롭고 교만하고 개인적이다. 그는 절대적으로 독립적이기에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 이 세상 신은 십자가에서 영원히 심판받았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자아 실현을 함께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자아 실현은 밖에 버리고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탄의 대립은 드러낸다. 자아 실현의 성향은 우리 안에서 사탄으로 마귀가 나타난다. 우리가 십자가에 들어갈 때 우리는 사탄을 밖에 남기고 들어간다. 사탄은 십자가 안으로 한발자국도 들어설 수 없다.
그리스도를 위한 나의 고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참조, 고후 1:5; 빌 3:10).
이 고난은 세상으로부터 조소 외에는 아무런 이유없이 받는 고난이다. 이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다. 이 고난은 구속을 이루기 위해 받는 고난이 아니다. 구속은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구속과 관련하여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채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우리가 주님과 일치되는 체험을 한 후에는 마태복음 11:29절의 내용을 실천해 내야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가 예수님께 배울 때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투덜거리지” 않게 된다. 우리는 자아 연민에 빠져 “왜 이런 일이 내게 발생해야 합니까?”라고 말하지 않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의미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실천에 옮기라는 뜻으로서 온 맘을 다해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에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라는 뜻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전인격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보였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들을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나게 하신다. 즉, 고집세고, 교만하고 위선적이고 편견이 심하고 정욕적이고 모진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제 내가 너를 사랑한 것같이 그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과정은 이러한다. 우리는 우리를 이기려는 사람을 본다. 그러면 우리 안의 모든 논리적 힘이 “화를 내”라고 말한다. 인격적으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네가 모욕 받을 때 화를 내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드러내라”고 말씀하신다. 주의 제자란 자기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주님의 명예가 자기의 삶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이다. 겁쟁이는 무섭기 때문에 받아치지 못한다. 강한 자는 그가 강하기 때문에 받아치기를 거절한다. 겉으로 볼 때는 둘 다 같은 반응을 보인다. 이 부분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있어서 지독한 모욕을 당하는 부분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과 함께 2마일을 더 가라고 당부하신다. 우리가 한 대 맞으면 주님의 명예를 보호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 손해를 보고 모욕을 당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 그 모욕과 손해가 끼쳐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나님께 완전하게 맡기라. 당신 자신의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당신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부활 후에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산에서 가지셨던 교제의 시간으로 초청하지 않으셨다. 대신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할 일을 주실 때 그 사람의 자연적 재능에 잘 어울리는 일을 주실 때가 거의 없으시다. 바울은 용맹스러운 천재였지만 가장 무식한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그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하고 있는 증거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에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비참할 정도로 가장 별볼일 없는 사람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그들을 찾아오셨다. 주께서 우리를 주님과 친히 교제할 수 있도록 높이 올리실 때 주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한 주의 관심에 우리 자신을 일치시킬 것을 기대하신다.
하나님과 구원의 중심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4).
우리는 성별이나 기도나 헌신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완벽한 선물로서 거저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구원을 선물로 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어떤 것을 수백번이라고 하려고 할 것이다. 구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구원을 얻는 것이 우리에게 그토록 쉬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엄청나게 많이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사람의 교만이 거저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며 관심조차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사실은 계시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주의 구원을 체험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이 충돌과 함께 합쳐지는 지점으로서 충돌을 통해 생명의 길이 열렸다. 이때 충돌은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만이 언제나 고난 당하시는 자시다.
내 자신 안에서의 하나님의 성찬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참조, 고전 15:30).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그가 받은 사역을 완성시키는 것 외에 아무런 다른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를 꼭 필요로 하는 곳에서 그를 붙드는 사람들의 재촉에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 주님의 삶도 살펴보라. 주님은 마을과 도시를 지나면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의 이 땅에서의 삶의 가장 큰 특징은 예루살렘으로 그의 얼굴을 확고하게 향하셨다는 점이다. 주님이 어떤 곳에서 꼭 필요하신 분이라고 하여 그곳에 머무신 일이 없으셨다 (막 1:37-38). “이제 너는 다른 어떤 곳보다 이곳에서 가장 유용한 존재가 될 것이다” 라고 달콤하게 말하는 형제 자매들을 주의하라. 아마도 당신은 그곳에서 유용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당신은 먹을 수 있는 빵보다는 곰팡이가 낀 빵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어떤 목적을 가지셨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성찬, 즉, 우리의 평범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실제 임재를 나타내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참조, 요 7:37-39).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섬김에 대한 측정은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얼마나 유용한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상관없으며 섬김에 있어서의 성공과도 상관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이루어가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 17:18). 우리 주님의 첫째 순종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주님이 어디에서 가장 유용한지에 대한 고려도 아니었으며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로마서 12:1-2절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알 수 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