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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8. 주의 고통과 우리의 친교 [구속의 심리학] / 오스왈드 챔버스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1021
 
8. 주의 고통과 우리의 친교
주님의 운명 (마 26:36-41; 4:1-4)
주님의 제자로서의 우리의 운명 (마 20:22-23; 벧전 2:21)
주님의 두려움 (마 26:42-43; 4:5-7)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두려움 (빌 3:10; 요 12:27)
주님의 헌신 (마 26:44-46; 4:8-11)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헌신 (눅 12:49; 골 1:24)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의 주의 고통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적어도 그 고통에 대해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 고통은 하나님과 사람(Man)이 하나가 되어 죄를 직면하며 겪는 고통이다. 겟세마네에서의 우리 주의 고통은 주의 십자가가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와 다른 만큼 우리가 거쳐야 할 고통과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 체험을 통해서는 겟세마네의 고통을 전혀 알 수 없다. 겟세마네와 갈보리는 주님께만 해당하는 유일한 것이다. 겟세마네와 갈보리는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우리는 성도들의 전형적인 체험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성도의 삶이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삼년 전에 주께 있었던 유혹을 고려하면서 겟세마네에서의 고통을 읽어야 한다. 세 가지의 유혹이 있었다면 겟세마네에서는 세가지의 고통이 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눅 4:13). 마귀는 다시 돌아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을 유혹하였다. 그러나 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두려워 했다고 말하는 그러한 경건한 모양을 한 신성모독을 주의하라. 주님의 마음에는 그러한 종류의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주님은 십자가를 목적으로 이 땅에서 오셨음을 가장 강력하게 언급하셨다 (마 16:21).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의 두려움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과연 인자로서 주님께 맡겨진 소명을 완성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였다. 만일 인자로서 이 소명을 이루지 못하시면 구세주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주의 고통을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주의 고통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에 계신 것을 주목하도록 하라.
주님의 운명 (마 26:36-41; 4:1-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 26:36; 참조, 마 4:1-4).
세례를 받으시면서 인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전인류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세상의 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셨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은 죄로부터의 회개의 세례인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던 것이다.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의 형체로 내려오셨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눅 3:22) 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주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천사가 나타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21) 라고 선포하셨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운명이다. 그 어떠한 사람도 주님과 같은 운명을 가질 수 없다. 즉 어떤 사람도 구세주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오직 한분의 구세주만이 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의 고통의 오묘함은 주의 운명을 성취하는 것과 관련된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만족하실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온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이 사셨던 것처럼 살게 될 때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육신하셔서 누구든지 그분의 아들을 통해 주께서 사셨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계속 안에서는 성령과 사람이 항상 일치되는 것이다. 아담은 성령께서 내재하시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계속적인 자유 의지적인 순종의 선택을 통하여 그의 순진함이 거룩으로 변하도록 의도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이를 거절하였다. 대신 그는 마귀와 옳지 않은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인류에 죄의 성향을 끌어들였다 (참조, 롬 5:12). 죄가 들어왔다는 뜻은 사람의 몸을 성전으로 삼으시던 성령께서 더 이상 사람의 몸에 거하지 않으시고 떠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신이 사람을 떠나신 것은 아니었다. “엘로힘”이란 단어는 인간의 육체와 교통하는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 인간이 육체 가운데 교통하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로 이 땅에 나타나셨다. 주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는 인자이신 주님께 임하셨다. 성령의 임하심은 우리 주님께서 주의 소명을 받아들이셨음을 인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엘로힘”을 대표하셨으며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이 인자의 인격(위격)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어깨에 얹혀진 이 세상의 죄가 십자가 상의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떼어 놓았다. 갈보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는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께 하시는 절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5).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절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아버지를 향하여 “하나님(God)”이라고 부르신 적이 없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은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을 아시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요 19:30).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은 이제 하나님과 인류가 인자의 인격(위격) 안에서 영원히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성령은 누구에게든지 임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누셨던 실제 교통을 우리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교통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고통을 통해서이다. 에베소서 4:13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받은 인류를 그린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주님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인류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람(one Person)이다.
우리는 여기서 체험이 아니라 계시를 다루고 있다. 계시는 우리의 믿음이 영양분을 받아 자라날 수 있는 곳이다. 체험은 우리의 믿음이 올바른 선상에 있도록 격려한다. 계시와 체험을 연결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 주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 사탄의 첫번째 공격은 물리적 영역에서 있었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의 사탄의 공격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께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인자이신 우리 주님을 향한 것이었다.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님은 만질 수도 없고 오직 인자로서의 예수님께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인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그의 마지막 공격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공하도록 하라. 그렇다면 나는 너를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인류 중에 한 사람도 구원할 수는 없겠지. 네 제자들을 보라. 잠들어 있으며 심지어 당신과 깨어있을 수 조차 없다. 이제 너는 십자가에 못박혀 너의 몸은 고문을 받고 갈갈이 찢겨 고통으로 마비될 것이며, 네 영혼은 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달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움과 혼돈 가운데 처하게 될 것이다. 너의 모든 인격은 인류의 죄의 무게로 인하여 숨이 막히고 짓이겨질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그 과정을 이겨낼 수 없다.” 이때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말을 듣고 따랐다면 십자가는 단지 위대한 순교자의 죽음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영생으로의 길은 절대로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로서 십자가를 통과하셨다. 따라서 누구든지 거듭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주님을 향한 사단의 도전은 주님은 인자로서 그 일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로서만 그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할 경우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손도 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 임했던 두려움은 그가 십자가에 이르기 전에 죽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주님은 인자로서 우리를 위한 문을 열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을 두려워하셨다. “그의 경외하심(두려움)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죽음으로부터 구원 받으셨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에 있어서 완벽하게 승리하셨으며 자신을 완벽하게 다스렸다. 몸의 고통이 주님의 마음을 혼미하게 했을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주님의 마음은 태양 빛처럼 맑은 상태였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 19:26). 주님은 그의 본질적인 인격성인 영 안에서 이미 승리하셨기에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겟세마네 동산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고통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자로서 얻은 놀라운 승리이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한 주님의 절규는 핍절한 상태 속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의 절규가 아니다. 그 절규는 예수 위에 얹힌 죄의 무게에 의하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찢겨나는 성령의 절규다. 겟세마네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의 구세주로서의 운명을 완성하기 위한 고통이다. 이제 막이 거두어짐으로써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쉽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 무엇을 지불하셨는지를 보게 되었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우리의 운명 (마 20:22-23; 벧전 2: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마 20:22-23).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성향에 의하여 결정된다. 우리 주님의 운명은 주님의 성향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우리의 운명은 미리 정하여져 있지만 우리는 어떤 성향에 의해 통치를 받을 것인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우리의 성향을 바꾸고자 한다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해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향을 바꾸시기 위해 주의 주권적인 은혜의 기적으로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구속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성향을 주실 수 있다 것을 의미한다. 거듭날 때에 성령은 우리 안에 완전히 새로운 성향을 넣으신다. 우리가 그 성향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게 될 것이다.
어떤 한계 내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거듭나기를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완벽한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은 없다. 사람의 의지는 자신의 의지보다 더 큰 힘을 만나 항복하게 되는 때가 온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하나님만이 완전한 자유 의지를 행사하실 수 이는 유일한 존재시다. 한편,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자유롭게 하신다. 결과적으로 거듭난 이후에 우리의 순종은 가치가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속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그는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로운 권한도 갖게 된다. 물론 순종할 능력도 갖고 있다. 만일 우리에게 불순종할 힘이 없다면 순종할 힘도 없는 것이다. 죄를 지을 수 있는 힘이 제거된다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순종이란 전혀 가치가 없을 것이다.
주의 제자로서의 우리의 운명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께서 받으신 잔과 세례는 누구든지 하나님과 완벽한 하나됨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입구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며 거룩케 하신다. 그러나 그 후 우리가 서게 될 위치는 우리의 순종과 아버지의 처분에 따라 달라진다. 구원에 관한한 하나님은 사람의 조건을 보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구원 이후의 주의 성도들이 서게 될 자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우리는 모두 주의 잔과 세례에 의하여 구원 받는다. 그러나 각 개인이 취하게 되는 자리는 전적으로 주님을 향한 순종에 달려있다. 우리는 주님의 잔과 세례에 의하여 거듭난다. 즉 주께서 자신의 소명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거듭날 수 있다. 우리가 거듭나기 위하여 치루어야 하는 고통이나 고난은 따로 없다.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떠한 고통과 희생도 우리의 죄를 속죄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희생을 통해 주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로 거듭난다. 그러면 우리는 그곳에서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주의 성령이 계시고 주님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를 수 있다. 반면에 우리의 인간적 속성의 힘으로 새생명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시작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그렇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과거의 우리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흔들린다. 성경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여진다는 사실을 계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능력있는 성향을 누구에게든지 원하기만 하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불순종에 대하여 매우 엄하시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는 주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주님의 성향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옛 속성은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하였다. 만일 네가 나의 죽음을 수단으로 하여 내 생명으로 들어오면 네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없는 생명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한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나면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요구 사항들을 확실하게 요구하신다. “나를 따르라.” 이는 중생한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님 앞에서 정상적인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았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주님께 사로잡히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이룰 수 없다. 당신은 위로부터 거듭난 후에 주님을 따르기를 노력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신 일을 우리의 죽을 육체를 통하여 삶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가? (빌 2:12-13).
구원은 주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한 주권적 선물이다.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없는 인생을 살아왔던 많은 사람들이 인자께서 그 소명을 완성함으로 인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자기 중심적인 그릇된 삶이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토대 위에 서 있는 삶이 아니었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일을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는 것이다. 영원한 구원은 이 일을 하느냐에 따라 얻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가치는 이 일을 얼마나 해 내느냐에 따른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우리의 위치도 이 땅에서의 이 일을 얼마나 잘 해 내느냐에 좌우된다.
주님의 두려움 (마 26:42-43; 4:5-7)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마 26:42-43).
제자들은 구속과 관련하여 인류를 대표하고 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탄의 조소는 “너는 결코 할 수 없다. 네 제자들은 네가 아는 최고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잠들어 있다. 변화산 상에는 너는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어야 했다. 그러나 너는 변화산에서 내려와 인류를 구속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나는 네가 그렇게 할 수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겟세마네에서 우리 주님의 두려움은 인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인류의 구속이 불가능하여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인류의 이상형으로 여길 수는 있어도 구세주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겟세마네 고통은 인간이 겪는 고통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겪는 고통이다. 우리 주님은 사람의 동정심을 원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고통은 인간의 동정심으로는 근처도 갈 수 없는 무한하게 깊은 경지에 있다.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어둠이 깊었고 새인류를 대표하는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무엇을 하시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주님은 기도하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주님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주의 마음은 담대함을 얻었다. 십자가 상에서 우리 주님의 마음과 정신은 이미 승리하신 가운데 계셨다. 주님께서 어머니에게, 요한에게, 자신을 죽인 살인자들에게 보여주신 마음과 정신은 주님의 승리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 주님이 사단에게 승리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더 중요한 점은 주께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승리를 얻으셨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자께서 겪으시고 승리하신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누구든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이 주장하는 대로 인류의 구속주이시던지 아니면 헛된 망상가이다. 이에 관한 증거는 각 개인의 체험 속에 있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두셨는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당신 안에서 형성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사셨던 삶을 당신도 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삶을 당신 안에서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당신은 주께서 당신 안에서 이 일을 이루시도록 허락하는가?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두려움 (빌 3:10; 요 12:27)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의 섬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계시와 그 계시로 인한 믿음의 체험들을 잊지 않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 어떠한 것도 잊지 않는 것이다. 제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또한 성령의 세례를 구하는 이유가 사람들 가운데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네가 나의 제자가 되길 원한다면 네 자신에 대한 네 권리를 내게 양도하고 매일 네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다 (참조, 마 16:24).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십자가를 질 수 없다. 하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을 구속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 우리 자신에 관한 우리의 권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양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주의 마음을 두신 것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즐거움이던, 과학이던, 어떤 관심이던 이 점을 고려해 보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세상에서 이러한 종류의 일을 하실까? 아니면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마귀가 하는 일인가?” “이것이 맞을까” 라는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세상에서 이런 일을 하실까?”를 고려하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하지 않으실 일이 아니라면 건드리지 말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릇된 것만을 내려 놓는다면 더 이상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안한다고 해서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빼고, 주님이 이 곳에 계시다면 행하시게 될 바를 우리로 할 수 있도록 하신다. 우리는 “왜 내 맘대로 하지 말라는 것이지. 그것은 나쁜 것도 아닌데!”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형편없는 말인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잘못된 것만을 내려 놓겠는가? 사랑은 얻은 것이 아니라 희생으로 측정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결코 “왜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라고 주님께 따지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단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조건은 이러하다” 라고 말씀하신다 (참조, 눅 14:26-27, 33).
주님은 당신이 당신 자신에 관한 모든 권한을 양도할만한 가치가 있으신 분이신가? 우리가 주님께 뭐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주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지적하실까? 그렇지 않다. 주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간교한지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우리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어두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참조, 마 10:26). 제자로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하는 점이다. 당신은 오늘 과거 어느 때 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되었다면 우리는 주님을 주와 선생으로 모시고 사는가? (참조, 요 13:13, 눅 6:46). 주님께 우리 몸을 완전한 주인이신가? (고전 3:16-17). 우리는 우리 몸에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 몸으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우리 몸 안의 주의 부활의 능력을 알아야 한며 주님과의 사귐 가운데 우리 몸으로 주의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구원과 관련해서는 ‘만일’이 없다. 그러나 제자도에는 ‘만일’이 있다. 제자도의 조건은 누가복음 14:26-27절과 33절에 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6-27).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33). – 역주) 만일 우리의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이 땅의 가장 가까운 관계들이 부딪힌다면 그때 당장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주장과 다투는 주장들을 미워해야 한다. 이러한 미움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비교된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려 놓아야 한다. 내려 놓음은 자신 성찰보다 무한하게 더 가치가 있다.
주님의 헌신 (마 26:44-46; 4:8-11)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 26:44-46).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막 14:41). 이는 즐겁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주님은 마귀가 할 수 있는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전인류의 대표자로서 자신이 맡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절대적 확신과 함께 십자가는 절대적 승리임을 확신하셨다. 인자로서 우리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그의 고통의 깊음을 다 지나시면서 모든 곳에서 승리를 얻으셨다. 주께서는 사람의 몸을 얻으셨고 사람의 마음과 영혼와 영을 얻으셨다. 인간의 인격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속되었으며, 따라서 사람이 악한 죄인이든 부자 청년처럼 깨끗한 사람이던 상관없이 인자에 의해 만들어진 길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놀라운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이 의미는 인자의 영, 즉 인자에 의해 대표되는 전인류의 영이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 연결되었다는 뜻이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8). 주님은 아들이셨기 때문에 아들이 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없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고 따라서 고난을 통해 구속주로서 순종을 배우셨다. 주님의 고통은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바탕이다. 주의 고통은 우리의 빛과 자유와 즐거움의 바탕이다. 주의 십자가는 누구든지 쉽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주님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에 헌신되었다. 예수님의 최고의 순종은 사람의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교회는 사람의 필요를 소명으로 삼을 때 방황한다. 필요는 절대로 소명일 수 없다. 필요는 기회일 뿐이며, 소명은 하나님의 소명이어야 한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헌신 (눅 12:49; 골 1:24)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4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히 12:29).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과적인 역사 안에서 이 땅에 오실 때 아픔과 혼란과 재난을 가져 오신다 (마 10:34). 인간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나타나는 처음 결과는 대혼란이다. 만일 인간의 생명이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면 갈보리는 헛소동이다. 이성이 인간의 삶의 바탕이라면 성경은 허튼소리이며 계시라기 보다는 간교하게 꾸며진 이야기다. 또한 구속이 필요없고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순교자일 뿐, 그는 하나님께 얻어 맞고 멍들고 고통 받은 사람 중에 하나라는 말이 맞게 된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면 우리는 갈보리가 필요없다는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시면 당장 주님은 혼란을 야기시키신다. 그 이유는 온 세상의 시스템은 주의 구속의 반대로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주님 당신의 세상 시스템, 특히 종교 시스템이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구속을 위해서 그러한가? 아니다.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토대 위에서 우리는 주의 고난에 일치되어 동참할 수 있다. 그러나 원하지 않으면 꼭 그럴 필요는 없다. 고린도전서 13장과 마태복음 5:43-48절은 가장 실천적인 기독교 진리를 담고 있다. “내게로 오라 …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8, 29). “그후 가서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참으라.” (참조, 살전 5:14).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받은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이 우리를 비방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불같은 분을 냈는지 생각해 보라! “그를 생각하라” (히 12:3). 우리는 얻어 맞을 필요는 없지만 맞지 않으려 할 때 그 타격은 주님께로 간다. 우리는 손해를 피하려고 할 것이며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당신을 잘 했다고 칭찬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당하면 주님께서 당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2 마일을 갈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절대로 우리의 의무는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께 함께 2 마일을 가겠는가? 당신은 온 맘을 다해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고 하는가, 아니면 단지 중요한 중심 인물이 되려고만 하는가?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주의 멍에를 매고 주께 배우기를 기대하신다.
성도의 헌신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는” (골 1:24) 것이다. 물론 구속을 위해 채워야 할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고난 받으셨는가? 사람들이 그를 오해했기 때문인가? 사람들이 핍박했기 때문인가?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오직 한가지만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 바로 사람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허락없이 맘껏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부 이루시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으셨다.
우리는 어떻게 남은 고난을 채울 수 있는가? 요한일서 5:16절은 한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일 5:16) – 역주). 그것은 중보기도다. 사람들에게는 기도 시간이 없다. 따라서 기도를 위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른 중요한 시간으로부터 시간을 가져와야 하는 점을 기억하라. 우리가 기도하는 즉시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가시와 찔레처럼 있었던 것들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관점을 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스스로 똑똑하다고 느끼지는 않게 될 것이다. 중보 기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에 우리가 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로서의 우리의 헌신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선호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한 주의 관심에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기를 기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