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주님의 변모와 우리의 비밀
우리 주님의 자세 (눅 9:28) - 기도는 언제나 변모시킨다.
제자들의 자세 (눅 9:32) - 자연적인 것은 잠들어야 한다.
우리 주님의 면모 (눅 9:29) - 성육신하기 전의 영광
제자들의 면모 (눅 9:32) - 실체를 대하면서
우리 주님을 방문한 자들 (막 9:4) - 영광 받으신 분과의 대화
제자들의 주목 (눅 9:32) - 그들이 주의 영광과 주의 동반자들을 봄
우리 주님의 관심 (눅 9:31) – 영광의 주제(theme)인 주님의 죽으심
제자들의 놀람 (막 9:5-6) - 정신나간 제안들
전능하신 하나님의 설명 (눅 9:35) - 하나님의 성육신
제자들의 경외 (눅 9:34) - 하나님의 말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 심리학이란 기독교 문화에 물든 인간의 속성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의 신비함과 놀라움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신 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죽을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야 하는 새생명의 특성들을 알기 위해서 주님을 연구해야 한다.
사도 요한의 복음서는 주님의 변모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복음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높은 영광의 관점으로부터 기록되어 있다.
성경의 계시는 우리 주님을 한 사람의 개인으로 보지 않고 전인류를 대표하는 분으로 본다. 세례를 받으실 때 우리 주님은 죄를 담당하는 소명을 받아들이셨다. 성령께서 인자(the Son of Man)이신 주님께 내려 오셨고 하늘로부터는 주님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변화산에서 주님께서 변모(Transfiguration)하실 때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세례와 변모의 사건은 우리 주님이 누구신지를 계시하여 준다. 그리스도인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신성을 아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주님의 사역 중 변모 사건은 실제로 그 중간에서 발생한다. 변모 사건은 주님의 승천으로 완성된다. 만일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십자가와 부활이 없이 변모와 완성이라는 두 개의 산봉우리만 있었을 것이며 이 산봉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어떻게 발달할 것이지를 묘사한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였고 죄는 죄는 실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죄를 다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모든 인간들을 위한 구속의 발판을 마련한다.
우리 주님의 자세 - 기도는 언제나 변모시킨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8).
우리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기도는 하나님의 실체가 인간의 삶에 접목되는 지점이다. 위로부터 거듭나기까지 솔직히 우리에게 기도라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가르침 및 우리 주님 자신의 개인의 삶에 있어서 기도는 일로 간주되었고 또한 주님이 떠나신 후에도 성령에 의하여 기도는 일로 강조되었다 (참조, 요 14:12-13).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로서 하신 기도는 놀라울 정도로 의미가 깊다. 만일 기도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인자 간의 최고의 교통이라면 우리의 삶에서 기도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기도란 종종 단지 하나님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기도에 관한 우리 주님의 관점에 의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주의 자녀들이 모든 구체적인 일들에 완벽하게 순종하며 하나님과의 최고의 교통을 나누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를 개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출생 후에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자세 - 자연적인 것은 잠들어야 한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2).
자연적인 것들은 잠들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려 한다면 우리는 위로부터 거듭나 새로운 왕국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자연적인 지혜가 아닌 하늘의 능력으로 분별해야 한다. 자연적인 것은 죄악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적이지도 않다. 하나님의 구속이 죄를 해결하였고 죄로부터 구원하였다면 자연적인 것은 희생 되어야 한다. 시므온이 예수님의 어머니께 말하였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눅 2:35). 이는 죄 때문에 찌르는 것은 아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연적인 어머니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에게로 들어오는 놀라운 과정에 있어서 마리아는 우리 인간의 속성을 대표한다. 자연적은 것은 승화하여야 하며 영적인 것에 순복되어야 한다. 자연적인 것은 자신을 내세워서는 안된다.
인류의 대표자였던 아담에게 이 점이 필요했다. 그는 순종에 의해 자연적인 생명을 영적인 생명으로 바꾸었어야 했다. 즉, 그는 땅과 바다와 하늘의 모든 생명을 다스릴 수 있었지만 자기 자신만은 다스려서는 안되었다. 하나님이 그를 다스리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의 자연적인 생명은 영적인 생명으로 변할 수 있었다.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온 인류를 대표하였다. 만일 아담이 계속적으로 자유의지적인 선택으로 순종을 함으로써 그의 순진함을 거룩으로 승화시켰다면 인류의 변모는 적절한 때에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불순종하였고, 자아-실현의 성향인 죄성이 인류에게 들어왔다. 즉, 내가 내 자신의 하나님이 되려 했던 것이다. 이 성향은 수천만가지로 역사한다. 우아한 도덕성 안에서도 역사하고 끔찍한 비도덕적인 일들 가운데서도 역사한다. 그러나 그 뿌리는 한 가지로서 내 자신에 관한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 성향은 우리 주님 안에 전혀 없었다. 자아-의지, 자아-주장, 자아-추구 같은 것이 주님 안에 전혀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우리는 아담이 본래 있었던 위치로 되돌아갈 뿐만 아니라 아담이 있어보지 못하였던 관계로까지 가게 된다. 즉, 우린느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는 위치까지 간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워질 수 있도록 여러 사항들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처음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구원받고 거룩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기 시작하신다. 하나님은 주의 독생하신 아들에게마저도 하나님의 요구 사항을 면하게 해 주지 않으셨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도록 광야로 인도하셨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께서 주님 위에 내려오시자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에게서 보호의 손을 거두시고 마귀로 하여금 최악을 행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아 거룩케 된 후에 성도의 삶이 실제로 시작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로부터 손을 떼시고 세상과 육체와 마귀가 최대의 악을 행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확신하시는 바는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오랜 인간의 속성 안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여섯 살이던 육십세이던 인간적 속성은 수 천년 동안 인간을 통해 내려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속성에 따른 덕 많은 사람들도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현명한 지혜를 소유한 자들도 아닌 “갓난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오직 위로부터 거듭난 자들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주님께서는 오직 거듭난 자들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두 가지 사실 위에 선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고 그 계시를 공적으로 고백하는 자들 위에 교회가 선다 (마 16:13-19).
우리 주님의 용모 (눅 9:29) - 성육신하기 전의 영광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29).
우리 주님은 성육신하시기 위해 주의 영광을 내려 놓으셨다. 변모는 그의 영광을 다시 보여준다. 예수님의 깊게 숨겨진 속성은 완벽한 신성이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누리실 때의 그 깊게 숨겨진 예수님의 속성은 갑자기 변화산 상에서 터져 나왔다. 예수님의 속성은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히 하나된 상태를 보여주었다.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성육신하셨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위격)을 분석을 통해 분해해 보려는 그 어떠한 경향도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참조, 요일 4:1-3). 오늘날 성육신하기 전의 주의 영광을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 분석에 의해 예수님의 위격을 분해하려는 시도들이 오늘날 많다. 즉, 사람들은 성령을 따라 주님을 알기를 거부하고 그들 자신의 생각의 논리로만 주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교훈이 바른 교훈인지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하게 들리는 교훈이라도 그 중심 내용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좌에서 밀어내는 것이면 잘못된 가르침이다.
제자들의 면모 - 실체를 대하면서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2)
변화산 상에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 그때의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벧후 1:16).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와 같은 수준의 동료가 아니시다. 그분은 완벽한 왕중의 왕이시다.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놀라운 같은 위엄을 계시한다. 제자들은 이제 충분히 깨어 났으며 얼굴과 얼굴로 그 실체를 대하고 있다.
지적인 생각과 이성으로는 결코 실체를 접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지적 생각과 이성은 생명의 도구들이지 생명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실체를 접할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기관은 양심이다. 성령은 언제나 먼저 양심을 다루신다. 지식과 감정은 인간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후에 따라온다.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내려와 마귀가 가득찬 계곡으로 내려갔다. 그들이 산에서 본 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지난 후였다. 그들이 산에 본 것들은 그들의 현실적 삶의 체험으로 역사되어야 했다. 오직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 의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주를 아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주님이 누구신지 알때까지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안에서 주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다. 마침내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지극한 위엄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마 28:18). 우리는 이러한 주의 위엄을 우리의 지능이나 이성으로 알아낼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보혜사 성령의 실제 증거에 의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실제로 알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살리시는 영을 부여하셔야만 했다 (참조, 눅 24:16, 31). 우리가 우리 주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주의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우리 주님을 방문한 자들 - 영광 받으신 분과의 대화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막 9:4).
예수님께서 성육신하기 전의 충만한 영광으로 서 계시고 있을 때 구약의 언약의 두 대표자들이 나타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야 할 일들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후 주님은 그 영광을 뒤로 하시고 다시 산에서 내려와 악령 들린 소년으로 상징되는 타락한 인류와 하나가 되셨다. 만일 주께서 변화산 상에서 변모하신 후 단지 성육신하시기 전의 영광으로 돌아가셨다면 주님은 인류를 그대로 내 버려둔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했다면 주님의 생애는 단지 최상의 이상적인 삶으로 인류에게 남았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상적인 삶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분의 교훈은 참 좋았지. 우리는 속죄와 관련될 필요가 없고 사도 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거친 교리와도 관계가 없지. 십자가의 도를 개인적으로 적용할 필요는 더더욱 없구. 우리에게는 산상수훈만 있으면 되었을거야.” 나는 이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삶의 본이 되기 위해서만 오셨다면 주님은 인류에게 가장 큰 고문을 주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주요 목적은 우리를 가르치고 또한 삶의 본이 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들어 올리고 주의 가르침대로 행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 위하여 오셨다.
제자들의 주목 - 그들이 주의 영광과 주의 동반자들을 봄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 9:32).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들을 자신들의 눈과 귀로 목격하였다. 변화산의 사건과 겟세마네 사건은 제자들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자리에 증인들로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우리는 베드로 서신과 요한의 복음서에서 왜 예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가셨는지 그 이유를 볼 수 있다. 기독교의 믿음은 신이 된 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신 그리스도 안에 서야 한다.
우리 주님의 관심 –영광의 주제(theme)인 주님의 죽으심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눅 9:31).
변화산 상에서 방문자 둘이 있었다. 모세와 엘리야였다. 이 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가운데 있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들이 나눈 대화는 주님의 영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대화 내용이 영광의 장면과 너무나 대조되지 않는가? 그들의 관심은 전부 주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관건(issue)”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실 관건에 대하여 말하였다. 즉, 인류의 구속이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사건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인류의 구속이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속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책임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구속을 적극적으로 무시하거나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있게 될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시 주의 영광을 내려 놓으셨다. 변화산 상에서 내려와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치루셨다. 어떤 목적으로 이렇게 하셨는가?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일로 인해 누구든지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인간의 체험 가운데 구속이 나타내는 가장 위대한 효과다. 우리 주님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임이 아니다. 주님의 죽음은 온 인류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완전한 하나가 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찢겨진 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주께서 사셨던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다. 우리는 주님께서 사셨던 삶을 칭찬하고 본받는다고 하여 주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삶은 너무나 순결하고 거룩하여 그러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망만 남긴다. 우리는 주의 죽음을 수단으로 하여 주의 생명으로 들어간다. 성령이 우리를 영적으로 사로잡기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면 성경이 왜 주님의 죽음에 대하여 왜 그렇게 많이 언급하는지 의아해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언제나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들에게는 수수께끼다. 왜 바울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라고 말하는가? (고전 2:2). 그 이유는 만일 예수님의 죽임이 바울이 말하는 것과 같이 주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의 의미가 없다면 부활도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이 완벽한 인간의 삶의 멋진 본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이 이루기는 전혀 불가능한 예수 그리스도의 흠없는 거룩한 삶을 우리에게 제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는 우리를 약을 올리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완전히 새로운 성향을 넣으실 수 없다면 우리에게 그분이 사셨던 놀라운 삶을 생각해 보라고 부탁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구속에 의해 주어진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성향을 넣어 주실 수 있기에 그 성향으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우리 주님께서 33년의 생애를 사셨는지 알 수 있다. 주께서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입구를 마련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표준으로 삼으시는 사람의 삶은 어떠한지를 보여주셔야만 하셨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죽음 후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삶이다. 우리가 죽은 후에는 그러한 삶을 살 기회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서 주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주님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면 성인 군자의 죽음도 아니다. 주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십자가로서 사람이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주님을 흉내내는 길이 아니라 주의 십자가에 일치되는 길이어야 한다. 이것이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의미다. 주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주의 생명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를 흉내내라는 교훈을 듣지만 이처럼 황당한 교훈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세 발자국도 떼기도 전에 벌써 예수님 안에는 전혀 없었던 정욕, 교만, 시기, 질투, 미움, 악, 분노 등이 우리 마음 속에서 발생한다. 그러면 우리는 좌절하게 되고 주님처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게 된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어떻게 살라고 교훈만 하러 오셨다면 차리리 그분은 이 땅에 오지 않으시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거듭남으로 주님을 구세주로 먼저 안다면 우리는 주께서 교훈만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분은 그분께서 교훈하신대로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들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즉, 우리에게 올바른 성향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지, 단지 못된 근성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시다. 주님이 주시려는 이러한 모든 축복에 들어가는 길은 주님의 죽음을 수단으로 하는 길 밖에 없다.
사람의 속성을 기독교화 하는 것은 실제가 아닌 것에 포장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표준이며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수단으로 하여 주의 생명을 받는다. 주님의 교훈은 우리 안에 계신 주의 생명에게만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주의 죽음이 왜 강조되어야 하는지 설명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주의 탄생을 선포하지 않고 주의 십자가를 선포한다. 그러면 우리는 주의 부활의 생명의 능력과 기이함을 친히 체험하게 된다.
제자들의 놀람 - 정신나간 제안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막 9:5-6).
베드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말을 했을까? 당신도 말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숨막히는 위대한 비전을 본 후에 우리의 육체의 힘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그 비전을 이루어보고자 할 때 우리도 베드로가 하였던 똑 같은 실수, 곧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헛소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서신들을 보면, 정신이 나간 듯한 흥분의 내용들은 없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허상을 다 제거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주의 죽으심을 보았으며 주의 죽음과 일치되는 과정을 통과하였다.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선물로 받는 체험을 한 후 베드로가 말한다. “우리는 지금 흥분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산에서 주님과 함께 있었으며 주의 위엄을 목격하였다.”
완전한 성결의 비전과 성령의 세례에 관한 비전을 현실로 되어진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다. 현실 속에서의 실현은 현실 그대로 닥쳐보아야 안다. 실체는 현실 가운데서 그 실체를 그대로 드러낸다. 예수님께서 마귀들린 소년을 고치셨을 때 제자들은 주님께 여쭈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막 9:2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셨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영적으로 집중하지 않고는 이러한 능력이 나타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아무 능력이 없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능력에 집중하는 대신에 우리 자신의 기질로부터 나온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아무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결코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멋진 비전들을 실체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비전이 당신에게 주어지면 당신은 그 비전을 실체로 만들 수 있도록 현실이라는 계곡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산꼭대기에 있도록 지음을 받지 않고 계속에서 수고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영적으로 깨닫는 영광스러운 산 정상의 시간이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의 빛을 본 이후에 계곡으로 내려와 이 땅의 모든 현실을 직면하는가? 혹시 현실을 직면하게 되면 당황 가운데 주님을 향하여 가졌던 믿음을 잃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위하여 장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시면서 십자가로 가셨다. 주님은 주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멋 훗날이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엡 2:6). 십자가는 우리가 한쪽으로 통과하여 다른 한쪽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으로 들어가면 그 생명에 거하게 된다. 그 생명의 특징은 하나님을 향하여 깊고 심오한 희생적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우리 주님이 누구신지 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강한 확신을 갖는다. 주님과의 실제적인 관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언제나 역사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설명 - 하나님의 성육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 9:35).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들렸던 똑 같은 그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며 말씀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평범한 나사렛 목수로 알려진 이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입고 오신 분이다. “그를 들으라.” 우리 중에 몇 사람이나 주님을 듣는가?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듣게 되어 있다. 즉 우리 속의 성향이 우리가 무엇을 들을 것인가를 결정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성향을 바꾸시면 우리는 주님이 듣는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제자들의 경외 - 하나님의 말씀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눅 9:34).
둘러 싼 구름이 검어지고 어두워질 때 감사하게도 성도들은 자신들이 단지 “주님 발 앞에 먼저” 밖에 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서 두려움에 빠지면 그들에게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