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주님이 받으신 유혹과 우리가 받는 유혹
히브리서 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브리서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주님의 홀로 계심 (마 4:1-2)
믿음으로 깨어계심 (마 4:3-4)
소망 가운데 기다리심 (마 4:5-7)
주의 사랑의 방법 (마 4:8-10)
마귀를 한계 (마 4:11)
내적 순교 (벧전 4:12-13)
인간의 생각의 함정 (마 11:6)
지혜의 빛 (요 12:16)
놀라움의 자유함 (눅 17:21)
유혹의 한계 (고전 10:13)
유혹은 죄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혹을 당하게 되어 있다. 유혹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모욕일 수 있다. 유혹이란 우리가 목표하는 최고의 것을 지름길로 이루려는 것이다. 철이 어떻게 단련되는지를 아는 것은 유혹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된다. 철은 시험 과정에서 부하가 걸린다. 이러한 방법으로 철의 내구력은 측정된다. 유혹은 어떤 외부 세력에 의해 한 인격체가 소유하고 있는 속성들이 시험을 받는 것으로써 시험의 결과로 더 고상하고 성숙한 성품이 나타날 수 있다.
위의 정의는 우리 주님이 당하신 유혹을 설명한다. 주님은 자신의 위격 안에 흠없는 거룩함을 소유하고 계셨다. 주님은 사람들의 왕이셔야 했으며 세상의 구세주이셔야 했고, 사탄은 이 선상에서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온 외부 세력이었다. 유혹의 시기는 영적으로 최고의 상태를 누린 직후에 찾아왔다 (참조, 마 3:16-17; 4:1). 이 기간은 힘을 측정하는 기간이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사탄에 유혹을 직면하셨지만 이기셨다. 예수님께 던진 사탄의 유혹은 주께 주어진 사명을 쉽게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상 죄를 져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셨고 그 즉시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광야로 이끄셨다. 그러나 주님은 시련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격성을 그대로 보존하셨다. 주님은 유혹을 받으셨으나 “여전히 죄가 없으셨다” (히 4:15).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유혹들은 우리 인간의 속성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 유혹들은 자연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매력이 없다. 우리가 거듭나 주님의 형제들이 될 때까지는 주님이 받으신 유혹과 사람이 받는 유혹은 서도 다른 영역에 속한다 (참조, 히 2:11).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들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받은 유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으로서 받으신 유혹들이다. 주께서 일반 사람으로서 유혹을 받았다는 언급은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만 성경은 주께서 그렇게 유혹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유전이 없이 태어나셨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일반 사람들처럼 유혹을 받지는 않으셨다. 주님이 당하신 유혹은 오직 성령에 의하여 위로부터 거듭나 초자연적인 중생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된 주의 형제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주님이 당하신 유혹들에 대한 기록은 주님을 헤아려 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거듭나게 되면 어떤 유혹이 올 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되면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유혹이 우리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구원받아 거룩하게 되면 유혹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유롭게 풀림으로써 유혹을 받는 자리로 가게 된다. 거듭나기 전에는 죄의 노예 상태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유혹을 받을 만큼 자유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로 거듭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유혹이라고 부르시는 것으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받으신 유혹들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듭난 성도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유혹을 면제시켜 주시는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각 개인의 생명들 안에서 유혹을 당하신다. 이때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유혹 가운데 주께 충성하길 기대하신다 (참조, 눅 22:28).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가 우리의 몸된 삶에 달려 있다. 당신은 우리 안에 계신 주의 생명을 둘러싼 여러 유혹들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에게 충성하겠는가? 성도의 인격성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붙들고 있다. 그에게 유혹은 우리 주님께 왔던 유혹과 같은 선상에서 온다. 그 유혹은 성도의 인격성이 붙들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으신 다른 방법으로 완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주님의 홀로 계심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 4:1-2).
하나님의 영은 한가지 목적을 위해 우리 주님을 광야로 이끄셨는데, 즉,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시는 것이었다. 이는 주님을 시험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주되심(mastership)이 무엇인지를 계시한다.
홀로 계신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강한 자를 만나 그를 이기고 그를 묶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이기는 권세”를 주신다. 히브리 기자는 “당신이 유혹을 받으면 예수님을 본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그 대신 “예수께로 가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께서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것이라”고 한다. 즉, 유혹을 승리하여 이긴 우리 주님의 완벽한 능력이 우리의 것이다 (참조, 히 2:18).
성경은 사탄이 들어오게 된 것은 사람의 책임임을 계시한다. 사탄은 사람과 마귀 사이에 대화의 결과다. 이 의미는 하나님께서 마귀를 직접 다루시지 않고 사람이 마귀를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드시 사람이 사탄을 패배시키고 그를 정복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성육신하심으로 인하여 사탄은 정복 당하였다.
내적 순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교회사를 보면 내적 순교와 외적 순교가 병행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외적인 순교에 대하여 친숙하지만 그러나 내적 순교는 무한하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내적 순교를 다룬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7). 즉, 주님은 의도적으로 영광의 자리를 내려 놓으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를 나눈다면 우리는 영광을 구하는 대신에 자신을 죽이고 내 자신에 대한 나의 모든 권리를 내려 놓아야 한다. 이러한 내적 순교가 철저하게 있지 않고서는 마귀의 유혹이 어느새 우리를 사로 잡을 것이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라고 말한다 (벧전 4:12). 내적인 갈등은 성도인 우리가 우리 주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어떤 시험을 당하셨는지를 이해할 때 설명된다. 사탄은 예수님께 이 세상의 왕이 되라고 유혹하였고 또한 하나님이 정하시지 않은 방법으로 인류의 구세주가 되라고 유혹하였다. 마귀는 우리에게 나쁜 것을 하라고 유혹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넣으신 생명을 잃어버리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가치있는 존재가 될 가능성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나면 마귀는 중점적으로 무너뜨리려고 공격하는 요새가 있는데 바로 예수님께 공격하였던 것과 같다. 즉, 우리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깨어계심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 4:3-4).
우리 주님께서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우리에게 주신 세가지 유혹에 관한 그림은 하나로 요약된다. 그것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네 방법대로 하나님의 일을 해보라. 너의 아들된 특권을 주장하라”는 것이다. 첫째 유혹은 이기적인 나라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명하여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너는 굶주릴 필요가 없다. 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배부르고 하라. 그러면 사람들의 왕이 될 것이다.” 사단이 맞는가? 요한복음 6:15절을 읽어보자.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하였는가? 바로 오천명을 먹이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향하여 그토록 커다란 동정심을 가지신 예수님께 사탄의 제안은 매우 멋진 비전이었음에 틀림없다. 잠깐이라도 예수님은 그러한 순간을 생각하여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러한 방법으로 왕이 되려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주님은 지름길을 제안하는 유혹을 단번에 거절하였다. 그리고 고난을 피하지 않는 길고 먼 순종의 길을 택하셨다.
주님께서 유혹을 받으실 때 우리 주님은 개인적으로 유혹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자신 안에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계셨다. 중생한 사람들마다 주 안에서 자기 자리를 발견하여 설 것이며 사탄의 이러한 유혹을 똑같이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의 생각의 함정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1:6).
세례 요한의 깊은 낙심은 위대한 사람의 낙심이었다 (마 11:11). 메시야의 전령관의 역할을 했던 요한은 하나님께서 메시야에 관해 그에게 알려준 놀라운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지 않는 것 같자 오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 3:11-12). 지금 요한 경우는 자신의 생각 또는 계시를 선택하여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첫째 유혹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찾아온다. “잘 생각해야 한다. 너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이곳에 있다. 따라서 그들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것들을 택하여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오늘날 이러한 선상에서 사람들의 아우성은 대단하다. “사람의 필요를 먼저 채우라. 하나님께 대한 계명은 전혀 신경쓰지 말라. 사람에 대한 계명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참조, 막 12:29-31). 이러한 조언은 그럴 듯하고 옳게 들려도 그 중심에는 사람의 필요를 먼저 앞세우는 사탄의 유혹이 들어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사람의 생각과 지혜로 계산하여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필요를 끊임없이 앞세우고 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누가 틀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생각들과 인본주의적인 방안들이 보좌에 앉아있는 한, 사람의 필요를 먼저 만족시키는 일은 표면적으로는 가장 멋진 일처럼 보이게 된다. 사탄의 모든 유혹은 우리가 성령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틀림없이 옳게 느껴진다. 우리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머무는 것만이 이러한 사탄의 유혹들이 그르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인들보다 더 우리의 문명화된 삶의 조건들을 자세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인간의 생각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함이 우리의 보좌 중심에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기독교의 증거는 세상에 보여주는 선행들이 아니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인간의 선한 속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선한 행위들이 표출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 세상의 문명 속에도 칭찬할 만한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 자연적인 덕들은 한계가 있다.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 개혁가가 아니시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먼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만일 사회 개혁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면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사회 개혁은 올바른 일반인들이 하는 사역 중에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인들도 그 일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가장 의미있는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예배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첫째 의무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구세주의 뜻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주께서 가장 큰 고통 가운데 계셨을 때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 26:41). 하나님의 명령에만 집중하라. 다른 곳에서 들리는 제안들을 듣지 말라. 잠들지 않고 깨어 기도하려면 하나님을 계속 예배하라. 이 세상의 일반 백성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 하도록 하라.
소망 가운데 기다리심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5-7).
마귀의 유혹은 엄청난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뭔가 초자연적인 일들을 하라. 기적과 기사를 행하여 사람들을 사로 잡으라. 그들은 놀라움 가운데 마음이 동하여 네 발 앞에 꿇어 엎드릴 것이다. 눈부신 왕국을 세우라.” 우리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심 시키려는 의도로 기사나 이적들을 행하신 적이 없다. 그러한 방법으로 자신을 믿도록 하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으셨다.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붐을 일으키는 수단들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을 생각을 흔들어 놓고 흥분시킨 후에 주님께 굴복하도록 하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언제나 차분하게 생각해 보도록 제안하셨다. “시간을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 보라” (참조, 눅 9:57-62).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를 만드실 때 그들의 내면의 감각을 훈련하신다. 따라서 사람들을 황홀에 빠뜨리거나 어떤 신비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홀리지 않으신다. 대신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가장 직설적인 제시를 하신다. “나의 제자가 되려면 이러한 조건들을 갖추어야 한다” (참조, 눅 14:26-27, 33).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자신의 선택을 통해 전인격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한 유혹은 “쇼 사업”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주의 제자들에게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이 어디에 놓이던 주님의 만족이 되라는 말씀이다 (참조, 행 1:8).
지혜의 빛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요 12:16).
우리 주님이 받으신 유혹은 성경에 조심스럽게 기록된 것으로서 주의 생명이 우리 안에 형성될 때 우리에게 임할 유혹이 어떠한 것인지를 미리 알리기 위함이다. 주님께서 받으신 둘째 유혹은 거룩의 체험 후에 다가오는 엄청난 덫이다. “이제 너는 구원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네 안에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신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분명히 너를 통하여 세상을 뒤집을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너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며 모든 악령 들린 자들이 너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너를 통하여 모든 병든 자들이 치유를 받게 될 것이다.” 사탄이 우리 주께 말했다. “만일 네가 사람들을 홀리기 위하여 기적과 기사를 사용한다면 너는 당장 사람들의 왕이 될 것이다.” 똑 같은 종류의 유혹이 예수님의 형제인 교회와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온다. 그러면 하나님께 기사와 기적이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게 들린다. 지난 20세기 동안 기독교는 종종 이러한 유혹에 굴복하여 가장 무절제하고 무질서한 적이 많았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유혹은 지난 수십년 이상의 방언 운동에서 많이 나타났다. 참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사로 잡혔던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탄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들을 보며 오히려 그 일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행하셨지?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주시요 선생이시다. 그분에 대하여 놀라야 하는 것은 그분이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주님의 삶이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 얼마나 부끄러운 실패의 삶인지를 생각해 보라. 우리 주님께서는 기적과 기사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위해 정해진 목적은 우리가 주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모든 세상적 지혜에는 유혹이 함께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의 빛으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신다. 당신은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받는 유혹 가운데 계속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하겠는가? 아니면 주님을 배반하고 “나는 이제 구원받아 거룩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을 기대한다”라고 고집하겠는가? 이러한 주장은 인간적 지혜의 입장에서 볼 때 옳고 지혜로운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성령의 빛으로 분변할 때 사단의 유혹이다. 주님이 권면하신 대로 깨어 기도하라!
주의 사랑의 방법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8-10).
그 다음 우리 주님은 타협의 유혹을 받으셨다. “현명한 타협을 함으로 너는 사람들의 왕이 될 수 있고 이 세상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다. 무엇이든지 폭넓게 수용하는 나라를 세우라. 이 세상에는 악이 있지만 그 악을 지혜롭게 사용해 보라. 죄에 너무 세게 대항하지 말고 마귀나 지옥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사람은 반드시 위로부터 거듭나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지 말라. 내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너그럽게 봐 주고 “필요 악”이라고 불러달라. 죄는 반역이 아니라 병이라고 말하라. 내 앞에 꿇어 엎드리고 나를 경배하라. 내 관점에서 세상을 보라. 그러면 내가 물러날 것이요 이 세상은 너의 것이 될 것이다. 사회적인 나라를 세우도록 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좌에서 몰아내기 위한 첫째 작전은 마귀가 전혀 안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마귀는 뒤로 물러난 후에 평화를 선전하는 운동이 펼쳐진다. 이때 교회는 그 평화 운동 앞에 항복하고 성공을 타협하게 될 것인가? 물론 그렇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평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에 의해 이 선상에 있는 유혹이 노출되면 그 유혹은 모든 유혹 중에 가장 끔찍할 정도로 간교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유혹에 굴복한다는 것은 정욕을 우상화 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이 “정욕(lust)”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단순한 부도덕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욕이란 “나는 당장 그것을 원한다”는 마음이다. 나는 내 욕구를 당장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유혹들은 정욕을 우상화하는 면이 담겨져 있다. “사람의 필요를 먼저 채워주면 너는 당장 이 세상의 왕이 될 것이다. 기사와 기적을 사용하라. 너는 당장 인간들의 왕이 될 것이다. 악과 타협하라. 자연적인 세력들과 현명하게 조화를 이루라. 당신은 당장 인간의 왕이 될 것이다.” 이러한 유혹에 대한 우리 주님의 모든 답변의 중심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 6:38). 즉 “나는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내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는 유혹은 모든 유혹 중에 가장 간교하다. 이러한 유혹은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과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 그러나 당신은 반역자에게 조르거나 설득한다고 해서 그 영혼을 얻을 수는 없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조르고 설득해 본들 그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언제나 분명한 선을 긋는다. 주님의 자세는 시종일관 단호하다.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나 거룩이 없는 그러한 뼈대 없는 맹목적인 친절한 사랑에 의해 세워질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의 배경은 거룩이다. 주님의 사랑은 타협하는 사랑이 아니며, 우리 주님의 나라는 오직 중생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수단으로 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생 후에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의 필요를 알려야 한다. 만일 구속의 필요를 무시한 채 단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관용하며 사랑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다.
놀라움의 자유함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당신 안에서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로 이 세상 나라와 타협해서는 안된다. 마귀의 유혹은 우리를 타협하게 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마귀의 유혹에 따라 타협하게 되면 마귀와 같은 그런 존재 및 지옥 같은 곳이 없다고 가르치게 된다. 죄라는 것은 단지 약점일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들이란 깊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불쌍한 아기들 같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따스하게 대하면 된다. 하나님의 부성(fatherhood)를 선포하고, 만인 구원론과 인류의 형제됨을 가르친다. 섭리의 친절을 높이며 인간의 고상함을 격려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유혹들에 대한 기록은 어디로부터 사단의 공격이 들어오는지 계시하여준다.
오늘날 기독교 내에서는 너무나 많은 행사들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곳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보좌에서 밀려났고 여러 세상 기교들과 지혜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결과적으로 시련과 어려움이 오면 대부분의 우리들은 어쩔줄 모르고 패배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이미 이러한 여러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다.
마귀의 한계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 4:11).
승리의 표시는 성공적으로 유혹을 통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 주님께서 조금이라도 실패하셨다면 천사가 나아와 수종들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유혹의 기간을 지난 후에 무엇에 애착을 갖는지를 보면 그가 유혹에 이겼는지 패배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유혹을 이겼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 더 깊은 애착과 감사를 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유혹은 반드시 온다. 우리는 유혹을 당하기까지는 유혹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과 다투거나 변명하지 말라.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주님께 절대적으로 충성하라. 그러면 어느새 사단의 공격은 물러가고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높고 순결한 사랑으로 하나님께 애착을 느끼게 될 것이다.
유혹의 한계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하나님은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주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혹 가운데서 우리를 구하신다. 유혹은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온전하게 성숙하는데는 유혹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받지 아니하는 특별한 시험을 당하고 있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가 겪는 유혹들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며 인류에게 공통으로 주어진다. 유혹과 싸워 이겨야 하는 이 수고를 포기한 사람들은 부끄러움에 처하게 된다. 다른 수천만의 사람들도 우리가 겪는 똑 같은 유혹들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우리는 마귀에 의하여 우리 주님께 제시되었던 세 가지 유형의 유혹의 그림을 다루어 보았다.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권면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쉽게 기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대가를 치루셨다. 우리는 우리의 집중력이나 재능이나 이치에 근거하여 기도하지 않고 주의 구속을 근거로 하여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