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님의 세례와 우리의 소명
주님의 세례
세례 요한의 기대들 (요 1:26-34)
예수님의 자세 (막 1:9-11)
예수님께서 친히 받아들이신 사명 (눅 3:21-23)
예수님의 역할 담당 (마 3:13-15)
우리의 소명
하나님의 기대들 (히 2:9-10)
성도의 자세 (고전 1:26-29)
성도들이 친히 받아들여야 하는 사명 (행 20:24)
예수님 안에서 성도의 역할 (빌 3:10)
주님의 세례
나이 삼십세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성숙하였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분의 나이는 30세였다. 즉, 모든 면에서 성숙한 상태였다. 삼십년 동안 주님은 공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다. 세례 요한의 선포와 함께 예수님은 등장하셔서 죄로부터의 회개의 세례인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세례를 어떠한 형식으로 받아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성령의 세례를 설명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주님은 세례를 받으시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 즉 세상의 죄를 담당하시는 소명을 받아들이셨던 것이다. 이 소명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하는 소명으로서 아무도 취할 수 없는 소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그것이 인자(Son of Man)에게 맡겨진 소명이었다. 주께서 세상 죄를 담당하심으로 인하여 누구든지 죄가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되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악(sins)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다고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sin)를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담당하셨음을 계시한다 (참조, 고후 5:21; 히 9:26). 이는 무한하게 심오한 계시다. 성경 전반에 걸쳐 계시되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심으로 세상의 죄를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죄와 일치시킴으로써 담당하셨다는 사실이다. 즉,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담은 그 큰 죄덩어리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시고 자신의 위격 안에서 담당하셨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알고 계셨다. 주께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셨음을 드러내며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죄에 일치가 되셨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보여주는 처음 사건인 것이다. 즉, 세례를 받으시면서 주님은 역사 속에서 공적으로 분명하게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셨다.
요한의 기대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요 1:26-28, 32-34).
구약에 근거한 요한의 기대들은 우리 주님이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마 3:10-12).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세례자시다.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 그분은 나의 죄를 포함한 모든 세상 죄를 담당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참조, 요일 2:1). 그분은 나를 주님 자신처럼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요한의 세례는 이러한 역사를 일으킬 수 없었다.
하나님의 기대들 (히 2:9-10)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 2:9-10).
우리 주께서 주의 소명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기대는 사람들을 ‘구원 받은 영혼들’로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한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되면 그는 단지 구속의 놀라운 효력에 동참한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의 모든 자녀들이 구속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가치있는 존재가 되기를 기대하신다.
우리는 구속의 계시와 구원의 의식적 체험을 실질적으로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구속은 완벽하게 완성되었고 마무리되었다. 각 개인이 이 구속에 연결되는 문제는 각 개인과 연관된다. 온 인류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 의해 정죄를 받으며 또한 십자가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도 사람에게 죄의 유산을 물려 받은 사실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정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죄의 유전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 이해하면서도 주님을 거절할 때 시작된다. 주님을 거절하는 순간부터 그는 정죄의 인을 받기 시작한다. 요한복음 3:19절은 정죄에 대한 최종적인 말씀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하나님의 기대가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서 성숙되어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서 형성되는 것과 우리가 새사람을 입는 일은 함께 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그분의 날개로 우리를 덮으시며 (눅 1:35), 우리 안에 형성되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시다 (갈 1:15-16). 주님의 생명이 우리 인간의 속성 안에 형성되면 그 생명은 주님의 기록되지 않은 기간처럼 조용히 성장한다. 우리는 비록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더라도 마리아가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을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면서 우리의 일상의 삶을 신중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수만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자연 생명을 칼로 찌르기 보다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찌르기를 선호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기 보다 우리의 자연 생명의 인상을 드러내길 원하는 것이다. 새사람을 입는다는 뜻은 우리의 자연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명령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신 주님께 우리의 모든 영역을 다스릴 수 있도록 주께 충분한 기회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도록 주께서 우리의 자연 생명을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주의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끈다는 의미이며 또한 우리 주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효력이 나타나는 것이고, 주께서 받아 들이신 소명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소명은 죄와 일치가 되어 죄를 담당하시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 드리는 것으로서 주의 영광스러운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일반 복음주의 선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사실에 대해서만 감사하고 더 이상 나가지 않고 거기서 멈춘다. 우리는 스스로 거룩을 향하여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거룩’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소명을 받들어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의 죽을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도록 하는가? 이 뜻은 우리의 인간적 속성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철저하게 순복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각, 계획, 상상, 지식 등이 그리스도께 철저하게 사로잡혀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자세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막 1:9-11).
우리 주님이 받으신 세례는 주님께 예외적인 영적 체험이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체험이 있을 수 없다. 이 체험은 주님께만 발생하였던 유일한 체험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한분 밖에 없다. 우리는 주님의 구속을 통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요한의 세례는 죄로부터의 회개의 세례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세례를 받으셨던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죄와 일치되어 죄가 되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이며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아들을 기뻐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 죄를 지시는 소명을 맡으셨을 때 성령께서 그 위에 임하셨고 아버지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렸다. 성령은 비둘기 같이 주님 위에 내려 오셨다. 하지만 우리에게 오실 때는 불로 오신다. 성령께서 내려 오심과 아버지의 음성은 주께서 소명을 받아들이셨음을 인치시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주님의 세례는 같은 것을 나타낸다. 우리 주님은 순교자가 아니시다. 그분을 선한 사람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주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가장 천한 자리로 내려 오셨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주께서는 인류의 대표자가 되셔서 인류의 모든 죄 덩어리를 담당하셔야 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불리신다. 이러한 구속의 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히 5:8-9). 하나님의 아들만이 구속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신약의 계시를 우리 자신의 체험에 꿰어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옳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의 말씀의 표준에 맞게 우리의 체험을 끌어올리시도록 해야 한다.
성도의 자세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6-29).
위 구절은 성도들의 소명이다. 성령은 오직 이 선상에서만 우리에게 증거하실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재능이나 우리의 지식, 우리의 신체적 화려함, 우리의 통찰력이나 천재성 등, 우리의 자연적인 그 어떠한 것에 대하여도 증거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오직 주님의 구속에 의하여 우리 안에 창출된 것만을 증거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 집중하는가 아니면 성령의 증거를 분별하는가? 성령은 우리의 육체에 속한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며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을 증거하신다 (고후 5:16). 만일 우리가 육체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평가한다면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것들을 언제나 강한 것들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것들 위에 세우신다. 세상 제국은 강한 인간들 위에 선다. 그러나 아무리 강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가장 연약한 부분 때문에 제국은 무너진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베들레헴에서 가장 연약한 아기로 성육신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듭남에 의해 우리 안에서 주의 생명을 시작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 속성이 하나님의 아들의 고향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우리를 변화시킨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만을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위하여 이 아기를 길러주기 바란다”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육체적 생명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어떻게 자라나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 안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하는 새사람을 입고 있는가?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의 애착과 생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당신은 그분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은 그분과 동의할 수 없는 이 세상 지식과 지혜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다. 이 세상 지식과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마찬가지의 일들이 지금도 각 개인의 삶 속에서 발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세워 놓으신 경계선을 주의하라. 자연 생명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안돼”라고 말씀하신 것을 잠깐이라도 사모하게 되면 당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안된다”라고 하신 것을 완고하게 행하게 되면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경계선을 받아들이겠는가? 이 경계선은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개인의 야망을 이루려는 것을 막는 경계선일 수도 있다.
다음과 같은 자세를 취하라. 세상에서 멸시받는 것들과 친해져라. 이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뚜렷하게 연약해 보이는 것들과 친해져라. 주님의 구속에 바탕을 둔 것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결코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소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거절당하였던 하나님의 아들과 일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받아들이신 사명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눅 3:21-2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와 교통하셨다는 사실을 본다.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우리 주님은 마음 중심에서 주의 소명을 받으셨다. 따라서 아무리 간교한 작전으로 유혹이 찾아와도 주님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으셨다. 사탄은 주님 근처에도 오지 못하였다. 우리 주님께서 받아들이신 소명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시는 것이었따. 사탄의 목표는 주님으로 하여금 죽음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주의 소명을 이루어 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죄를 위하여 죽을 필요가 있겠는가. 십자가를 피해서 당신의 소명을 ‘지름길’로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그러나 주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에 지지 않으셨다. 우리 주께서 오직 한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오셨다. 그 목적은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위격 안에서 세상의 죄를 지시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 오신 것이지 멋진 본을 보이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성도들이 친히 받아들여야 하는 사명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바울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를 막을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은 바울의 마음을 짓누르고 그의 몸을 만신창이가 되게 하며 세상의 소망이 다 끊어지게 만드는 고난들이라고 하겠다. 당신은 이러한 소명을 받아들였는가? 아니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깊게 ‘의식’되기만을 신경쓰고 있는가? 성도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사명은 이 한가지 밖에 없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바울은 이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였다. 기쁨이란 행복과 다른 것이다. 기쁨은 사람이 피조된 목적을 완전하게 이룰 때 찾아온다. 반면 행복은 환경과 조건에 의존한다. 따라서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에 따라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때때로 모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을 얻기 위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받아들이도록 부탁하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야 한다. 당신은 예수님으로부터 다음 사명을 받았는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 (참조, 요 17:18).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 6:38). 예수님의 마음에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에 받아들인 소명은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소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멸시받고 천대받는 자들과 함께 하게 된다. 주 예수님으로부터 온 맘을 다해 자신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종종 천시와 멸시를 받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본 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부탁을 해서 기독교 봉사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친히 우리의 사명을 받아야 한다. 그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못박히심을 위해 하기로 결단하였다 (고전 2:2). “외적인 상황을 가지고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내게 행할 수 있으나 나로 하여금 나의 사명을 포기하도록 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단 한가지 목표가 있다. 바로 주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다.”우리 주님께서 주의 소명을 받으신 후 사탄이 그 소명을 막지 못한 것처럼, 주의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우리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그 소명을 이루지 못하도록 사탄이 맹공격을 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같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단 일초라도 우리를 곁길로 빠지도록 하는 애착들, 생각, 성공, 실질적인 사역, 조직, 주변 사람들과 일들 등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주의해야 한다. 이 뜻이 바로 “예수님의 능욕을 지고”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서 명령하고 싶어하는 “영문 밖으로”나아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히 13:13).
예수님의 역할 담당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3-15).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았다. 즉, 주님을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으로 바르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님은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요한에게 나아오셨다. 요한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시길 거절하였다. 이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그러자 요한은 주께 세례를 베풀었다. 메시야의 전령관인 요한은 메시야에게 합당한 것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자기 생각을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메시야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만 하면 됐다. 우리 주님의 소명은 죄와 일치가 되는 것이었다. 주님은 완벽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죄와 일치되었다. 주님의 세례는 주께서 자신의 소명을 온 세상 앞에서 받아들인 증거였다. “이를 위하여 내가 이곳에 있노라.”예수님께서는 능력이나 통치권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죄와의 일치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다. 예를 들어, 죄의 성향, 즉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권리 주장은 한 사람 아담에 의해 인류에게로 들어왔다 (롬 5:12). 성령은 또 다른 한 사람이신 인자에 의해 인류에게로 들어오셨다.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롬 5:20)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에 의하여 세상의 죄를 담당하셨고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일치됨으로써 죄의 유전으로부터 구원을 얻고 또한 새로운 성향, 곧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거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성향은 우리가 흉내를 낸다고 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에 대한 권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양도하고 주님과 일치될 때 새로운 성향이 우리에게 부여된다 (갈 2:20).
예수님 안에서의 성도의 역할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인식하는 것과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분의 역할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 죄를 지시는 역할을 받을 수 없다. 그 일은 주님의 일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십자가를 지라고 부탁하신다. 무엇이 나의 십자가인가? 나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권리를 주님께 영원히 양도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유익, 자기 연민, 자기 동정 등, 전적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삶이 아닌 것들은 나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당신은 인생을 헛되게 살아왔는가? 빌립보서 3:10절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바울은 이 구절에서 시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하며 과감하고 확실한 영적인 삶을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알려 하여”라고 말한다. 바울은 주께서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또는 주꼐서 바울을 위해 어떠한 일들을 이루셨는지를 선포하겠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대신 바울은 “주님과 부활의 권능을 알려 한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함으로 주님으로부터 계속 생명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내 자연적인 본성과는 상반되는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주님과 함꼐 하겠다는 결단이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자신의 자연적인 고상함이나 덕을 다 포기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는 사람들은 지극히 적다. 음식에 있어서 금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자연적인 수단들을 삼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게 맡기시는 역할을 수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적인 표현을 잘하고 웅변을 잘하는 설교자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설교자는 그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임명을 받기 위하여 한동안 자연적인 재능들을 삼갈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전쟁(1차 세계 대전 –역주)에서 가장 큰 아픔을 당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아 와중에 주님의 고난을 함께 나누며 금식을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여전히 ‘고상한 자연적인’것들에 마음이 가 있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주 앞에서 칼을 치우는 대신에 그분을 칼로 찔렀으며 그 일로 칭찬을 받았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나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관심에 내 자신을 일치시켜야 한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즉, 나는 예수님처럼 부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영혼의 부활 뿐만 아니라 주의 구속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 영역은 마음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가 되어 살아가는 삶의 영역이다. 주님의 임명이 있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또한 시간이 걸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다려서 자신의 개인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들이는 영혼에게는 그 기다림의 기간이 결코 낭비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