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주님의 기록되지 않은 기간들과 우리의 숨겨진 생명
기록되지 않은 기간들
신체적 발달
정신적 발달 (눅 2:40)
인격적 발달
우리의 무의식의 형태
잠재 의식 (골 3:3)
의식하는자아
공개된 기간 (눅 2:40-52)
주님의 환경과 우리의 환경 (마 2:13-14, 19-21)
주님과 친밀한 사람들과 우리가 친밀한 사람들 (마 13:55-56; 막 3:21; 눅 2:51; 요 7:5)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 (눅 2:49; 골 3:1-3)
주의 영원한 청춘
(요 8:58; 마 18:3-5)
새출생(중생 및 거듭남과 같은 사건을 말한다 – 역주)은 어린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는 출생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초자연적인 강림에 의해 설명된다. 우리 주님께서 외부로부터 역사로 들어오신 것같이 주님은 외부로부터 우리 인간의 속성으로 들어오신다. 우리의 새출생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인간의 속성 안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인간적 속성은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의하여 승화되어야 한다. 우리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우리의 자연적 생명의 모형이다. 우리의 자연적 생명은 중대한 순간들마다 하나님의 아들의 목표와 목적을 오해한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 계실 때 그러한 일이 발생했다. 우리 자신의 인격적 체험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위로부터 거듭나면 사실 거듭나기 전보다 훨씬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인데 그럼에도 자신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의 인간적 속성은 항상 함꼐 한다. 기록되지 않은 우리 주님의 삶의 기간 동안에 주님은 가장 평범한 인생을 사셨다. 그 기간에 예수님에 대해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실제로 기록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난 후 우리 안에 있게 된 하나님의 생명 또한 우리 생명의 깊은 무의식 영역에 있으면서 아무 것도 기록할 것이 없는 기간을 가질 때가 있다.
새출생은 자연의 법칙 하에서 활동하지 않는다. 위로부터 거듭나야 할 필요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의 커다란 비극을 암시한다. 죄 때문에 새출생은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다. 죄는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없었던 것이었다. 새출생은 한 사람의 영원한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고 지금의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께 가치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한다.
기록되지 않은 기간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 2:40).
어린 시절을 지나 청소년이 되면 정신적으로 큰 변화가 있다. 그 변화 중에는 문학, 시, 종교 등에 관심을 갖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영적인 거듭남은 아니며 성령의 역사와는 무관하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 생명의 일반 성장 과정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 위대한 헌신을 할 수도 있고 기독교 봉사에 관여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종종 이러한 모습들을 성령의 역사로 간주하는 때도 많지만 사실은 단지 자연 생명의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과다. 자연적 생명의 변화는 언제나 신체적 성장과 정신적, 도덕적 성장이 함께 한다. 청소년들은 어른들보다 더 순수하고 분명하게 본다. 청소년 시절처럼 모든 것이 신나고 또한 분명하게 생각하는 때가 없다. 일반적으로 30세를 성숙의 나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보통 30세 전후가 되면 신체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가장 성숙한 때가 된다. 이 나이까지는 일반적으로 사람은 소망과 비전들, 불확실과 기대 속에 있게 된다. 30세가 지나면 더 이상의 약속이나 비전이 없고 단지 전에 가졌던 모든 비전들에 맞게 살아갈 뿐이다. 평범한 자연 생명에게는 이러한 성숙의 단계가 있다. 만일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영역은 반드시 그러하다.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시간이 흐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날 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서 형성된다. 우리 안에 있는 주의 생명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성숙하는 것은 아니라 우리의 순종을 통해 성숙한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눅 1:35). 이 구절은 또한 성령께서 우리를 덮으실 때 발생하게 될 일을 상징하고 있다. 즉 우리의 자연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을 태어나 성장하는 곳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님께 어떻게 대하였는가? 주께서 내 안에서 자라나시고 성장하시도록 하였는가?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 영양분을 공급하며 돌보았는가? 아니면 우리 안에서 주의 생명이 묻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대신에 죽은 생명을 보시게 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게 영양분을 공급하여야 한다. 영양분을 공급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자연 생명이 주의 생명에 합당하게 순복함으로 영적인 삶으로 승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새생명에 관하여 종종 간과되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새생명의 성장은 의식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속의 새생명을 염두에 두시고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28)고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을 자연적인 생명에만 적용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어리석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 주께 순종하면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무의식적인 생명이 우리 안에 형성된다. 하나님께서는 백합이 자라나도록 하기 위해 백합을 어느 곳에 심으셔야 하는지 정확하게 아신다. 그러면 백합은 자라나면서 무의식적으로 백합의 형태를 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것이 무엇인가? 과다한 경작이다. 영적인 세계에서의 아름다움을 무너뜨리는 것도 지나친 교단적 가르침이다. 우리의 위험은 새생명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을 우리가 가로채는데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이름으로 제자를 삼으라” (참조, 마 28:19). 즉 예수님의 속성을 따르는 제자를 만들라는 뜻이다. 새생명은 예수님 안에 있다. 우리는 새생명은 들의 백합처럼 자라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새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은 정확하게 우리의 자연 생명이 처해지는 곳이다. 주어지는 상황은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어지는 상황에 불평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들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연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맺어진 가족 관계보다 자신이 선택하는 친구들을 더 좋아한다. 우리의 친구들은 나의 과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우리는 고상한 척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들 앞에서는 고상한 척 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의 못난 행동들을 다 보았으며 우리의 여러 가지 연약함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가족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 앞에서 위선을 떨 수 없다. 우리의 위선이 가족들에게는 먹혀 들지 않는다.
새생명은 계속 자라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형태를 잡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새생명을 돌보신다. 하나님은 새생명이 자라나기 위해 정확하게 어떠한 영양분이 필요한지 그리고 무엇이 새생명을 붕괴시키는지 잘 아신다. 새생명을 묻어버리거나 새생명이 자라날 수 없는 환경에 거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백합은 백합이 자라날 수 있는 환경에서만 자랄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자라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최상의 환경을 조성하신다. 신약 성경에서 끊임없이 언급하는 무의식적인 형성은 바로 새생명의 성장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성장시키시도록 하나님께 충분한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전혀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데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는 이유가 뭡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뭔가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데 관심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우리 안의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성장을 추구하지 않고 단지 “내가 이것 저것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작은 변화’를 추구한다. 이러한 삶 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시들게 된다.
사람의 마음의 세계는 의식적인 영역과 무의식적인 영역의 두개의 층이 있다. 우리가 듣는 대부분의 것들은 의식적인 영역에서 무의식적인 영역으로 넘어간다. 이때 우리는 들은 것들을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아무 것도 잊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원할 때마다 들은 것을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다른 문제다. 아무튼 우리는 아무 것도 잊지 않는다. 분명히 그 기억들은 의식적인 영역에 있지 않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따라서 어떤 상황을 겪게 되면 우리가 망각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갑자기 되살아 나서 우리를 깜짝놀라게 한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정확하게 성령께서 하실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요 16:4).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의 무의식적인 세계를 빚어가신다. 성령의 가르침을 수학을 공부하듯 따지지 말고 단순하게 받아들이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가르침을 우리 안에 있는 주의 생명이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신경써야 할 한가지 일은 좋은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어느 곳에 처하는지는 내가 정할 일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정하실 일이다. “백합화를 생각하라” (마 6:28). 우리 주님은 주의 백합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계시다. 만일 우리가 주의 백합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면 그 백합들은 죽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조급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가장 많이 성장하는 때는 우리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그러한 기록할 만한 것이 없는 기간이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을 공개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의 삶을 공개시킬 때가 오고 있다. 그 때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속의 새생명이 지난 날의 평범한 기간 가운데 얼마나 자라났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공개된 기간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40, 52).
어린 예수님은 성전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의아해 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마리아” 생명, 즉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이다.
하나님은 때가 차면 우리의 삶을 공개시키신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영적으로 성장하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이 놀랍도록 변해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어떤 큰 개인적 위기를 지난다. 이때 우리는 온갖 종류의 어려움들을 상상하면서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미칠 영향으로 한없이 고민한다. 그러나 그 상황들을 닥쳐보면 외적인 위기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엄청난 내적 변화가 발생한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 이후로 다가오는 위기는 우리 안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놀랄만한 일이 있다면 우리를 이해한 줄로 생각했던 주변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기는 언제나 사람의 성품을 드러낸다. 위기에 관련된 가장 큰 덫은 위기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즉, 어떤 큰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멋지게 변화시켰는지를 알게 되면 계속 또다른 위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 가운데 살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대부분의 인생은 위기가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살도록 되어 있다. 사람이 잠깐 동안의 긴장 가운데 사는 것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사람은 긴장 가운데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루한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예를 들어, 지금 긴장이 감도는 이 무서운 전쟁도 때가 되면 끝나고 곧 이어 지루한 인생이 뒤따를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사람들, 신경 쇠약, 망가진 삶들을 돌보아야 하는 일들이 남을 것이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빛과 깨달음의 순간들을 지난다. 그러나 곧 아무 위기가 없는 때가 오고 오직 평범한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서서히 우리의 삶을 공개하실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우리 안에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는지를 드러내실 것이다.
주님의 환경과 우리의 환경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마 2:13-14, 19-21).
사람은 본성적으로 각각 자기 자신의 환경을 조성한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실 때는 폭군 헤롯이 집권하던 때였으며 주님은 그 집권 하에서 고통을 당하셨다. 주님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과 따돌림과 위협을 당하였다. 주께서 우리 몸 안으로 나실 때에도 마찬가지 상황이 닥친다. “오, 좀 더 나은 상황이라면…” 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하라. 우리 주님이 처한 상황은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려움과 난관으로 가득찼었다. 아마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내 목표와 내 뜻을 이루려 하기 보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충성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자신의 뜻과 목표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뜻과 목표로 만들려는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큰 주제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속성에 따른 부르심이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어떤 순간의 부르심이라기 보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섭리하신 상황 속에서 주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문제는 내 자신의 분별에 따른 이상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끼워 맞추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나를 부르셨어.” 만일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고 밀고 나가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전혀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생각한 후에 그 생각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끼워 맞춘다.
많은 현대 종교가 사람들에게 저주가 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처절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며, 이에 사람들은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는데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만 관심이 있으셨다. 성도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소박하고 진실한 사람이다. 만일 성도가 원천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면 그가 어디에 있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로부터 생수의 강이 흐르기 시작한다 (참조, 요 7:37-39). 사람들은 이러한 성도 때문에 더 열악하여지던지 아니면 더욱 나아진다.
주님께 가까웠던 사람들과 우리에게 가까운 사람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마 13:55-56; 참조, 막 3:21; 눅 2:51; 요 7:5).
이들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실 때 주님과 함께 살았던 가까운 사람들이다. 우리는 “오, 주님께서는 매우 행복하고 유쾌한 가족이 있었을텐데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주님은 너무나 힘든 가정 생활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 가장 가까웠던 형제들과 누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참조, 눅 6:40).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 사셨지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셨던 분이셨다. 주님께서는 거듭난 주의 백성들인 우리가 주께서 사셨던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나사렛으로 내려가셔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순종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겸손인가! 당신이 혹시 다음 번에 까다롭고 악한 사람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면, 마귀의 종인 가롯유다와 3년 동안이나 함께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우리 주님께서는 공식적인 첫째 설교를 주꼐서 자라나신 고향에서 하셨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설교를 듣고 분노하더니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우리 중에는 “내가 구원받고 거룩하여지면 나는 나의 가족들과의 관계가 다 잘될 줄 알았어요. 그러나 오히려 그들과 더욱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주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오해하였고, 또한 주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생명에게도 똑같은 일들이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해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발생하였던 일들은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실 때에도 발생하게 되어 있다. 그분께 실제로 발생했던 일들은 우리 안에 계시는 주의 생명에게도 실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주님을 오해한 사람들은 주님과 친했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들도 주님을 종종 오해한다. 우리의 인간의 자연적 속성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다. 따라서 주님의 어머니가 말한 것처럼 우리도 주께 같은 말을 하게 된다. “이제 주께서 기적을 행하실 차례입니다.” 우리 안의 자연적인 속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 내 방식대로 일해줄 것을 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꾸지람을 받아들였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속한 여러 일들은 자연인들에게 정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주님의 중생하게 하시는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될 때 우리의 자연적인 삶은 마리아가 경험한 것을 체험하게 된다. 즉, 만일 우리가 거듭나지 않았으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는”(눅 2:35)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전혀 알 수 없었을 종류의 고난을 겪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 떄문에 마리아는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 때문에 우리의 자연 생명 또한 칼로 찌르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이 고통은 죄악된 삶을 찌르는 고통과는 다른 것이다.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 2:49; 참조, 골 3:1-3).
우리 주님의 내면의 마음 세계는 아버지께 완전히 사로 잡혀 있었다. 예수님께는 이 세상이 아버지의 집이었으며 아버지의 관심이 주님의 생각을 사로 잡았다. 주님의 산상 수훈은 이러한 선상에서 나온 교훈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네 옛사람의 속성에 따라 삶의 야망을 만들지 말라. 대신, 가장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되라. 하나님의 일들에 네 마음을 집중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멋진 성품과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을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목표와 목적은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참조, 마 5:48).
당신의 생각은 어디 곳에 있는가? 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서 우리의 애착을 하늘의 것들에 두라고 말한다. 이 뜻은 하늘의 것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집중이란 하나님의 일들에 내 마음을 고정하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오, 그래요. 그러나 비록 내가 거듭났다고 하여도… 그것만은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지만, 그러나 …” 라고 말하지 말라. 조만간 당신의 마음은 염려로 가득차서 과거의 불신앙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주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네 마음을 내게 고정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과의 관계 외에 다른 것을 염려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러한 단계까지 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공사역이 시작되자 주의 사역은 우리 주의 마음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드러냈다. 한편 주님은 주의 어머니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에 있는 곳에 함께 있지 아니한 사실에 놀랐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 2:49). 이 질문은 어린이가 어머니가 알 줄 알았는데 알지 못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묻게 되는 아쉬운 질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추구하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날 때 우리는 왜 주의 생명이 우리에게로 태어났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주의 영원한 청춘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 8:58; 참조, 마 18:3-5).
영적으로는 늙는다는 것이 없다. 세월이 지날 수록 젊어진다. 영적인 생명의 특징은 영원한 청춘이다. 이점에서 영적인 생명은 자연적인 생명과 정반대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계 22:13). 예수님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The Ancient of Days)”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 가장 연약한 존재로 오셨다. 바로 갓난 아기로 오신 것이다. 주께서 새출생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우리 안의 계신 주님의 생명을 쉽게 죽이던지 아니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의 생명에게 좋은 영양분을 섭취시킴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날 수 있다. 성숙한 성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절대적으로 단순하고 기쁨이 가득차며 생동력이 넘친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살게 하신 삶을 계속 살아가라. 그러면 당신은 늙는 대신에 더욱 젊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주관하시기만 하면 당신의 삶에는 놀랄만한 젊음이 있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매우 늙었다는 느낌이 든다면 다시 거듭나 자라나도록 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