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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3. 주님의 탄생과 우리의 새출생 [구속의 심리학] / 오스왈드 챔버스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920
 
3.주님의 탄생과 우리의 새출생
역사 속에 나신 주님의 탄생 (눅 1:35)
지극히 높으신 분, 지극히 거룩하신 분, 가장 낮으신 분
내 안에 나신 주님의 탄생 (갈 4:19)
지극히 낮음, 지극히 거룩함, 지극히 높아짐.
내가 예수님께 가는 것이 그들의 말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보았기 때문인가? (요 1:12-13)
나는 하나님 나라의 징후를 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를 보는가? (요 3:3)
죄를 멈추기를 구하는가? 아니면 죄를 멈추었는가? (요일 3:9)
기독교 심리학의 바탕은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영혼의 특징을 연구하려면 우리는 아담이나 우리 자신의 체험이 아닌 토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기독교 심리학은 구속에 의해 인간의 삶 속에서 자연적인 것이 된 초자연적인 생명을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현대의 오류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7). 만일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자 하면 우리에게는 그분들의 속성이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 속성없이 태어난다. 새출생의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에 의해 하나님을 안다는 뜻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새로 태어난 생명의 특징은 우리의 자연적 생명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생명의 초자연적인 특성과 같다. 우리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생명의 특징이 우리의 육의 삶 가운데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의 기준을 두셨다. 우리는 선한 사람들이 체험한 것들을 물을 필요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가 하나님의 표준적인 사람의 품성이 무엇인지를 나타내신 주님을 연구해야 한다.
역사 속에 나신 주님의 탄생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눅 1:35).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이 세상 속으로 태어나셨다. 주님은 역사의 외부로부터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주는 역사로부터 발생하지 않으셨다. 우리 주님의 탄생은 강림이었다. 주님은 인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었다. 주님은 위로부터 인류 안으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인간이 아니시다. 주님은 인류로는 전혀 설명될 수 없는 그런 분이시다.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외부로부터 인간의 육체로 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다. 지극히 높고 가장 거룩하신 주의 생명이 가장 낮은 문으로 들어오셨다. 우리 주님은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 역사 속으로 임하셨다.
내 안에 나신 주님의 탄생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
우리 주님께서 외부에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처럼, 주님은 외부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인격적 삶이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를 위한 ‘베들레헴’이 되도록 허락하겠는가? 현대의 동향은 위로부터의 출생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출생을 말하고 있다. 즉, 위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무의식적인 생명에서부터 의식의 생명으로 올라오는 뭔가를 말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날의 사람들의 관점에 깊게 침투되어 있으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많은 사람들 및 나아가 주의 복음을 외치는 사람들까지 이 관점을 외침으로서 자신들의 믿음의 바탕마저 스스로 허물고 있다.
우리는 자연적인 출생과는 전혀 다른 위로부터의 출생으로 다시 나지 않는 한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다 (요 3:5). 사람들 중에는 인간의 속성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인간의 속성 안에는 많은 선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영이 모든 사람들의 본성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맘대로 하시도록 두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이 관점을 원한다면 취하라. 그러나 결코 그것을 성경의 관점이라고는 말하지 말라. 이는 분명이 우리 주님의 관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그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요 3:7). 즉, 외부로부터 당신 안에 뭔가가 들어와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새출생의 의미를 단지 저변으로부터 일어서는 것으로 의미함으로써 구원의 필요를 경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폐위시키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새출생의 개념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어떤 것이지 우리 안에서부터 솓아오르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주께서 제시하신대로 새 출생을 다룬다. 영광을 얻으신 예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성령은 새출생의 체험에 있어서 다양한 단계들을 설명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주님은 결코 체험의 단계들을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사람들이 우리 주님께서 니그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여러 단계로 나누는 이유는 서신서로부터 그러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금 체험의 단계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 새 출생의 사실을 다루었다. 즉, 내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된 사실이다. 이는 복음적으로 알려진 구원을 받은 사건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라 감리교 교리인 “전적 성결(Entire Sanctification)”(일반적인 한글 해석은 “완전 성화”지만 오스왈드의 의미 전달에 문제가 있기에 역자는 “전적 성결”로 해석하겠다 – 역주)에 해당하며 이는 기독교 삶의 목적의 시작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새출생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이해하기 원한다면 서신서들을 보아야 한다. 바울은 새로 태어난 생명의 활동에 대해 언급하길,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라고 하였다.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사람은 이미 위로부터 거듭난 사람이다. 우리 중에 성령에 의해 실제로 다시 살아난 사람을 위해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 것에 대해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복음적으로 묘사되는 구원 받은 영혼의 숫자로 즐거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소개 받아 들어가지만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나라를 ‘제자화시키라’고 제자들을 파송하셨다. 영혼의 중생은 하나님의 일이다. 구원 받은 영혼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구속의 바탕 위에서 주의 명령에 따라 일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19절은 그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마 9:38). 일군이 할 일은 기도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단순한 믿음 가운데 우리 주님의 구속에 입각하여 수고한다.
내가 예수님께 가는 것이 그들의 말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보았기 때문인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새 출생 이후의 삶은 매우 단순한 특성을 지닌다.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났는지를 알기 원한다면 우리 주님이 주신 계시에 의해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새출생의 가장 큰 특징은 주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인데 그 이유가 주님에 대해 들었기 때문 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주께서 제자들을 위해 해 놓으신 일들을 근거로 해서 제자들을 파송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들이 주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주님을 보고 그들이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았기 때문에 파송하셨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라” (요 20:17). 막달라 마리아는 주의 첫번째 사도였다. 주께서는 그녀에게서 일곱 귀신을 내어좇은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이 마리아가 파송되는 근거가 되지는 못했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 그녀는 그녀의 주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은 후 주님 앞에서 변화된 관계를 갖게 된다. 그 후에야 주께서는 “가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형성되면 가장 큰 특징은 우리가 친히 주를 알고 인식하는 점이다. 우리는 이제 주님에 대해 말해 줄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그분은 나의 주요 나의 주인이시다.
새출생의 또 다른 특징은 어렵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로 여긴다는 점이다. 우리는 위기를 맞이할 때 어디로 가는가? 만일 우라기 위로부터 거듭났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요 주인이시기 때문에 곧바로 주님께로 돌아간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이유는 성령의 살리시는 역사만을 알고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형성되는 체험까지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옥으로부터 구원받는 복음적 교리에 대해 자세히 안다. 하지만 갈라디이서 1:15-16절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갈 1:15-16). 사도행전 1:8절에서 우리 주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 내 증인이 되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형성될 때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어디에 두시던 우리 주와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만족이 된다. 중요한 점은 우리는 정확하게 주께서 조장하신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님께 ‘이상한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먼 나라로 선교의 부르심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을 우리 안에 들여놓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라는 구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속성이 어떠한지를 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형성되는 즉시 주의 속성은 우리의 마음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하며 우리의 개념들을 바꾸기 시작한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징후를 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를 보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새출생의 또 다른 증거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는 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연히 발생하는 일이나 숙명을 믿지 않는다. 새출생의 체험으로 인해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의 통치를 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 53:1).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누가 하나님의 팔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라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일상 생활 가운데 평범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보지만 우리 중에 누가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팔을 인식할 수 있는가? 성도는 자신의 삶의 모든 일상적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하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처음에 우리는 친구 관계나 결혼의 위기, 또는 죽음 등의 예사로운 일들의 속에서만 하나님의 통치를 분별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별은 기초 단계이다. 계속 나아가다 보면 우리는 평범한 삶의 모든 우연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보는 것을 배우게 된다. 결국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하늘 아버지께서 절대로 잊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염려하겠는가?” 당신은 초조하며 염려를 느끼는가? 그렇다면 위로부터 거듭났다고 말하지 말라. 만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참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염려할 수 있겠는가? 염려는 둘 중에 하나다. 개인적 죄거나 아니면 새출생을 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우연하게 보이는 상황이라도 성도에게는 우연이란 없다. 우연도 하나님의 정하심이다. 새 출생의 체험은 우리가 하나님의 정하심을 분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함이 없이는 순종될 수 없는 실천 원칙들이다. 산상수훈은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실 때 우리가 살게 될 삶을 언급해 놓은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우리의 상황에 예수님의 원칙들을 적용하신다.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 생명이 활동할 수 있도록 살펴야 한다. 톨스토이는 새출생의 필요를 무시하고 주님의 원칙을 현실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는 큰 실수를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산상 수훈의 말씀을 원칙으로 주시며 “이제 이대로 살아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시다. 주님의 관점에서 볼 때 새생명의 활동이 어떠한 할지를 서술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성령은 우리의 기억 속에 말씀을 기억나게 하신다. 그떄 당신은 그 특별한 상황에서 주님께 순종하겠는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실 때 절대로 따지지 말라. 광신자는 새출생을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필요를 무시한 채 예수님의 말씀을 취하여 그 기준대로 살아보려는 자들이다. 우리는 원칙에 따라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시는 새 생명에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다.
죄를 멈추기를 구하는가? 아니면 죄를 멈추었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일 3:9).
당신은 죄를 멈추기를 구하는가, 아니면 죄를 멈추었는가?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님께서 실천하라고 주신 것을 이론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신학을 배운 사람들 및 여러 사람들이 죄의 문제를 따지면 논쟁거리가 될 교리 문제로 만든다. 그러나 성경 내에는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전혀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한다. 실천적이며 경험적인 교리가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된 철학적 교리가 될 때 혼동이 야기된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교리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실천적 체험이다. 우리 속에 있는 새 생명이 효과적으로 활동하면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즉,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차원에서 실제적으로 죄를 멈추었다.
우리에게 죄를 멈추도록 하는 것은 새출생의 체험, 즉 완전 성결이다. 우리가 새로운 영역으로 태어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태어난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죄를 지을 수 없다 (요일 3:9). 이 의미는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의미는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순종할 때, 우리는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서 불순종할 능력을 제거하지 않으신다. 만일 제거하신다면 우리의 순종은 가치가 없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더이상 우리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우리 안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넣어 주신다. 새출생 이후의 우리의 인간적 속성은 새출생 전과 똑같다. 그러나 근원이 달라졌다. 새출생 전에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다. 그러나 새출생 이후에는 우리는 죄를 지을 필요가 없게 된다. 죄와 죄악은 다른 것이다. 죄는 성향으로서 결코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죄의 성향은 정화되어야 한다. 죄악은 우리가 책임져야 할 행위들이다. 죄는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며 우리가 건드릴 수 없다. 하나님은 구속 안에서 죄를 다루신다. 만일 우리가 거룩하여지려고 노력한다면 이는 우리가 거룩하지 않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그리스도인인 태어나는 것이지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방, 기도, 맹세 등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새출생에 의해 만들어진다 (요 3:7).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 15:10).
새출생의 특징은 우리가 온 맘을 다해 주의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양도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형성된다. 주께서 우리 안에 형성되신 후 주의 생명은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주의 놀라운 초자연적인 생명에 의해 우리는 친히 주를 뵈며, 하나님의 통치를 보게 되고, 죄를 멈추게 된다. 이것이 새출생의 전반적 활동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