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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2. 연구를 시작한 방법 [구속의 심리학] / 오스왈드 챔버스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993
 
2. 연구를 시작한 방법
1) 기억해야 할 것들
그리스도의 계시 (마태복음 16:16-17)
그리스도의 기록들 (요한복음 5:39).
그리스도를 깨달음 (고린도전서 1:30)
2) 깨달아야 할 것들
복음적인 체험 (공관복음과 사도 요한)
검토된 체험 (서신들)
행사되는 (exercised) 체험 (현재의 순종)
기독교 심리학의 기본은 사람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다. 우리 주님을 본으로 삼기는 쉽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주님은 훨씬 그 이상이다. 주님은 구속주로서 우리 안에 주님 자신의 생명을 재생하신다. 위로부터 거듭났다는 뜻은 회심 이상을 의미한다. 거듭남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되신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사셨던 그리스도와 정확하게 같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생애 가운데 보이셨던 특징들이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 기독교 심리학은 주 예수 그리스도 누구신지에 대한 깨달음과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생명에 대한 체험적인 이해에 그 기초를 둔다.
시력과 시각 기관에는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력이 있으면 만족할 뿐 시각 기관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시각 기관이 잘못되면 시력만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고칠 수 없다. 시각 기관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알아야 그 사람을 고칠 수 있다.
기독교 사역자는 “오, 그래.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해.” 당신에게는 충분할지 몰라도 만일 당신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역자”가 되려 한다면 당신은 구원 받은 것에서 멈춰서는 안된다. 당신은 성경이 구원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내는 수고를 해야 한다. 우리들 대부분이 마치 볼 수 있다는 사실로만 만족하는 사람들같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시각 기관에 문제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모른다. 기껏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간증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기독교 심리학에 대한 연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해하게 할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1) 기억해야 할 것들
그리스도의 계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6-17)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상식적인 사실이 아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상식을 수단으로 하여 그분을 이해하지 않는다. 상식의 단계에 있었던 제자들은 그들의 상식적 수단, 즉 그들의 눈과 귀와 인간의 모든 상식적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누구신지 절대로 알 지 못했다. 우리 주님은 계시적 사실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그 계시를 그의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인정하셨다.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인가 아니면 단지 역사적인 인물일 뿐인가?
성경은 계시 사실들의 세계다. 자연적 세상은 상식적 사실들의 세계다. 이 두 세계와 통하는 우리의 수단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우리의 상식으로 자연적 세계를 접한다. 우리의 지성은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체계적 상식인 과학적 지식은 강력한 지적 호기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적 세계에서의 호기심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적으로 호기심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를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게으름을 장려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에 대한 계시 사실들인 성경의 세계에서는 지적 호기심이 전혀 쓸모없다. 이곳에서 우리의 감각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탐색으로 알아낼 수 없다. 우리는 상식적 생각으로부터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추론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은 단지 추상적 개념들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만 성경에 계시된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다. 믿음은 잘 속아넘어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믿음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나의 인격적 영이다. 성경은 상식의 사실들을 다루지 않는다. 자연의 영역은 상식적 사실들을 다루며 우리는 우리의 감각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한다. 성경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계시 사실들을 다룬다. 사람들은 계시 사실들을 자신들의 상식으로 가볍게 다루기를 좋아한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 죄, 마귀, 성령 등은 계시 사실들이다. 이 중 어느 것도 상식적 사실이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상식으로만 산다면 그는 하나님 없이도 잘 지낸다.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상식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루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실들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사실들이 우리에게 계시되도록 해야 한다. 당신이 주께서 거하시는 영역에 접하려면 그 전에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요 3:7).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영역은 성경 사실들의 영역이다. 어떻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취할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매우 간단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우리는 구함으로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눅 11:13). 성령을 받은 후에야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부류에 속하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다. 우리는 성령을 받음으로 그분의 계시를 깨달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가복음 11:13절과 같이 계속 상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을 말씀하셨다. 당신은 성령을 받았는가? 우리가 어떤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그 길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기록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요 5:39).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들이다. 성경의 맥락은 주님 자신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까지는 성경은 우리에게 단지 일반 책과 다를 바가 없다. 상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다. 주님은 상식에게는 단지 2000년 전에 사셨던 나사렛 목수일 뿐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마 11:27). 소위 고등 비평은 상식적인 선상에서 일을 한다. 따라서 고등 비평이 우리 주님을 다룰 때는 (주님의 가장 높은 감각은 상식이 아니라 신성이다) 주님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주님의 위격(Person)을 분석하여 분해한다 (참조, 요일 4:1-3).
고등 비평이 발견한 내용들은 논리적으로는 입증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삶에서 가장 큰 사실들은 논리적이지 않다. 만일 논리적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계산하여 알아낼 수 있으며 또한 이성적 논리적 선상에서 미리 확신하며 대처할 수 있다. 논리적 진리는 단지 상식이 모아 놓은 사실들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 일들이 내 논리에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논리에 맞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과연 얼마나 영적인 유익을 보겠는가?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논리적 과정들은 중요하지 않다. 호기심, 논쟁, 이치 등은 아무런 역할을 못하며 영적인 분별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으려면 오직 한가지 길이 있는데 바로 순종이다. 우리는 10년의 연구보다 단 5분의 순종을 통해 더 많이 배운다. 논리과 이성은 실체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지성에 의해 실체에 닿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실체는 오직 우리의 양심에 의해 닿을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기록들을 대할 때 우리는 지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근본적인 실체들을 대하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근본적인 실체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믿음은 전혀 논리와 상관없다. 믿음은 생명의 속성에 속한다.
우리가 거듭나면 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책이 된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알기 위해 성경을 살핀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5:39-40). 그리스도인이 성경과 관련해서 가져야 할 관계는 문자를 숭배하는 관계가 성령께서 성경의 말씀들을 그 그리스도인에게 영과 생명으로 만드시는 관계여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경은 단지 일반 책이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에게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공급하는 계시의 세계가 된다.
그리스도를 깨달음
“너희는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 1:30).
잠언 8장에서 우리는 성육신하기 전의 지혜를 대하게 된다. 요한의 복음에 그 지혜는 로고스 또는 말씀으로 언급된다. 말씀은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가 피와 육체를 지난 인자(Man) 안에서 우리의 삶의 기슭까지 오셨다. 요한은 말하길, 우리가 그를 보았고 우리가 그를 안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있는가? 주님은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언어 중 이보다 더 심오한 단어는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단 한가지인데 바로 고집이다. 우리는 주님께 가는 것만은 끝까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이 구원을 얻기 전에 부서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고집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겪는 많은 고통들과 괴로움 중에는 그들이 주님께 오지 않기 때문에 지나는 불필요한 아픔들도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기를 원한다면 주께서는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주께 가면, 하나님은 주님을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고전 1:30)이 되도록 하신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으신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기 떄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물을 그 관점에 맞춘다. 그리스도를 깨달으려면 우리는 주님께로 가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이를 위해 온 맘을 다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한다. 우리는 주님 대신에 자기 자신의 헌신 자체에 헌신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종종 헌신과 경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큰 원수가 되곤 한다. 하나님께 내맡긴다는 뜻은 그분께 내 자신을 맡겼다는 ‘사실’에 충성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께 가는 것’이 전혀 아니다. 주께 간다는 뜻은 완전히 내려 놓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가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 우리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고 주의 손에 우리를 내어 맡기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모든 것을 양도해야 할 그분이시다. 우리는 우리가 양도하는 대상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확신해야 한다. 이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은 고집이 세고 양보심이 없다고 해도 미안해 하지 말라. 그러나 만일 당신이 주께로 가지 않기 때문에 주께서 당신에게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실 때는 죄송함을 느끼라. 주께 갈 때의 자세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주님께 온 맘을 다해 그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깨달아야 할 것들
복음적인 체험
공관복음이란 처음 세개의 복음서를 말하다. 요한의 글들은 그의 복음과 서신들, 그리고 계시록이 있다. 우리 주님은 회심과 중생과 성결을 단계 별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다. 체험의 단계를 알리는 책을 읽은 후 그러한 단계를 구분하지 않은 복음서를 대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기 쉽다. 복음서들은 언제나 ‘덩어리’ 형태로 진리를 제시한다. 만일 우리가 복음적인 체험의 단계를 알기 원한다면 우리 주님에 의해 제시된 덩어리 진리를 알기 쉽게 풀어 놓은 서신들을 읽어야 한다. 요한복음 3장에서 우리 주님은 회심의 단계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주께서 무엇을 하시러 오셨는지 위대한 용어로 말씀하고 계시다. 즉, 구속을 인간의 삶의 바탕으로 만드시기 위해 오셨음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하신 말씀에 맞는 다른 것들을 소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 주님은 복음적인 체험들을 말씀하시지만 자세히 검토하지는 않으신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요 3:7)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해 진술이다.
‘복음적 체험’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가 주의 생명에 이르는 문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둔 체험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 대해 듣기를 즐거워한다.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 살자는 설교를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은 사로 잡힌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선생이었다.” 그렇다. 주님은 놀라운 선생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주께서 말씀하신 교훈을 어디서부터 수행할 수 있겠는가? 산산 수훈은 더없이 아름다운 교훈이다. 그 교훈을 지식적으로만 받을 때는 너무 매력적인 교훈이다. 하지만 우리의 거친 현실 가운데 그 교훈을 매일의 실제로 살려고 해 보면 우리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는 산상수훈에 마음으로는 동의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현실적인 삶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님의 교훈은 우리에게 절망을 자아낸다.
만일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진정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 교훈을 이룰 수 있을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가르치기 위해 오신 것이 주 목적이 아니라 주께서 가르치신대로 우리가 되도록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오신 것이 주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교훈은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통해 역사하도록 할 때 그 능력이 그 사람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서술이 된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 자신의 성향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는 의미다. 주께서 주신 모든 기준들을 바로 그 성향을 바탕으로 주어진 것이다. 즉, 주님의 가르침은 주께서 우리 안에 넣으신 생명을 위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문인 주님의 죽음을 수단으로 하여 예수님의 생명에 들어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생명에 들어가려고 예수님의 교훈을 지키려 하거나 또는 베들레헴과 같은 자신이 원하는 다른 길로 노력하여 들어가려고 하지만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한 길들은 오히려 위선자들과 허풍선이들을 만들어낸다. 만일 교사나 목사 자신이 복음적 체험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의 가르침과 설교는 단지 지적 상식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 설교는 예수님의 교훈이 젖어 아름답게 들릴지 몰라도 그 안에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우리는 바른 것을 행하려는 흉내로 예수님의 생명에 이를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바르게 행할 수 없도록 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주님과의 죽음에 일치됨으로써 주님의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순교자의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를 향해 여신 문이다. 누구든지 그 문을 통해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십자가는 구속이라는 한가지 실체가 역사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실체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며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왕국 안으로 인도함 받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과거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으며 과거에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주의 십자가를 수단으로 하여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향을 우리의 몸된 삶을 통해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즉, 우리는 주께서 사셨던 똑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검토된 체험
복음적 체험은 공관복음과 요한의 글에 위대하고 멋진 계시의 형태로 언급되어 있지만 검토된 단계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검토된 체험을 겪고 그 체험들을 진술함으로써 그 단계들을 알아보고 이해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서신서들을 읽어야 한다. 서신서들은 주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글들이다. 주께서는 성령을 보내셨고 “펜”으로 사용된 사람들은 사도들이었으며 성령은 그들을 통해 설명하셨다. 우리 주님의 교훈과 서신서에서 주어진 설명은 서로 긴밀하게 엮여있다. 서신서들은 체험의 단계를 발견하도록 돕는 안내서다. 그곳에서 우리는 회심, 중생, 성결에 대한 모든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진술된 모든 단계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단계들을 검토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사도행전 26:18절은 신약의 그 어떤 구절들보다 가장 알맞는 축소된 형태로 검토된 체험을 말한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8). 우리는 종종 성령의 인도하심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간파해 보려고 고생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검토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 만일 누군가가 거짓 교훈에 미혹되면 그 전문가는 무엇이 잘못인지 보여줄 수 있다.
행사되는 체험
만일 우리가 중생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그 체험에 대해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신 일을 실행해 내어야 한다 (빌 2:12-1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접하는 우리의 손가락과 혀와 몸을 통해 그 체험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 강한 능력이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반으로 하여 습관을 형성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덫에 빠지는 것과 같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과 구속을 입으로는 칭송하지만 매일의 현실의 삶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실행하기를 거부한다면 위기가 올 때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속성이다. 위기가 오면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속성이 협조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수 없게 된다. 실행은 하나님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몫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하나님의 모든 신적 자원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도록 하실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성령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넣으신 모든 것을 우리의 몸된 삶을 통해 실행한다면 위기가 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할 뿐만 아리라 우리 자신의 속성도 우리를 돕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위기는 아무런 불행을 만들지 못하고 지나갈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일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즉 그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더욱 강력히 순종할 수 있는 자세로 세워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