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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1. 이 연구를 시작한 위치 [구속의 심리학] / 오스왈드 챔버스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985
 
1. 이 연구를 시작한 위치
고전 2:11-15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5:45-50
첫째 사람- 아담
둘째 사람 그리스도
새 사람 성도
산 영혼 (45)
살리는 영(45)
땅과 하늘에 속한 형상 (48)
본성적 (46)
영적 (46)
하늘에 속한 형상에 의해 땅에 속한 형상이 지워짐(49)
땅에 속함(47)
하늘에 속함(47)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음 (50)
기독교 심리학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기초한다. 기독교 심리학은 인간의 속성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연구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구속을 통해 우리 안에 태어난 새생명에 대한 연구이다. 새생명의 유일한 표준은 우리 주님 자신이시다. 주님은 우리의 중생에 의해 우리 안에 형성되신다 (갈 1:15-16). 우리는 자연인을 연구함으로 시작하여 자연인에 해당하는 논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주님을 이해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기독교 심리학은 자연 심리학에서 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를 받아들여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지원을 인간적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취해야 한다. 기독교 심리학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인자)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나타남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오직 두 사람이 있다. 그 두사람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개인이 아니라 인류의 대표로 대하신다. 모든 인류는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그룹을 만든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고 불리고 둘째 아담은 “하나님의 영원한 그 아들(the Son of God)”이라고 불린다. 우리는 마지막 아담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아담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도 아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 첫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으로써 이 둘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이 세상에 왔다.
첫째 사람
산 영혼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고전 15:45).
사람을 몸과 혼과 영으로 나누지 않도록 주의하라. 사람은 몸과 혼과 영, 전부이다. 혼은 사람의 인격적 영이 몸으로 나타나는 표현이다. 영은 내 자신으로서 ‘나’라는 헤아릴 수 없는 존재를 말한다. 영은 혼 안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불멸하는 부분은 혼이 아니라 영이다. 사람의 영은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파괴될 수 없다. 혼 안에서 영의 표현이 되려면 몸이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혼은 언제나 몸과 연결되어 언급된다. 혼은 몸과 영을 함께 붙든다. 몸이 사라지면 혼도 사라진다. 그러나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인격성(personality: 오스왈드 챔버스의 신학에서 매우 독특한 개념을 가진 용어다. 동물이나 다른 모든 피조물로부터 인간을 구별짓는 속성으로서 인간의 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역주)은 남아 있다. 부활 때에 다른 몸이 주어지면 그 즉시 혼의 생명은 다시 나타난다 (요 5:28-29). 부활은 결코 멸하지 않는 인격성, 즉 영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산 영혼(a living soul)”은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그대로 사람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뛰어난 도덕적 존재로 창조하셔서 땅과 하늘과 바다를 다스리기에 적합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다스려서는 안되고 하나님이 그의 주인이셔야 했다. 첫 사람은 순종에 의해 그의 자연적 생명을 영적인 생명으로 바꾸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아담이 그렇게 했다면 인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만큼 승화될 때까지 계속 발달하였을 것이다. 또한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이란 비정상적임을 계시한다. 아담은 자연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통치권을 스스로 취함으로써 죄의 유전을 인류에 끌어들인 장본인이 되었다 (롬 5:12). 그러자 그는 그 즉시 땅과 하늘과 바다의 통치권을 잃게 되었다. 죄의 유입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아-실현의 성향이 그 자리에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골 1:1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하셨는가? 죄는 피조물이 아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결코 의도하지 않으신 관계로부터 왔다. 즉, 피조물 인간과 피조물 마귀와의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죄의 가능성에 대해 책임을 지셨으니 바로 그 증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갈보리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감당하시기 위해 계획하시고 구속을 통해 그 책임을 지신 사건이다. 죄의 근본적 속성은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권리 주장이다. 죄가 들어오자 그 즉시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연결은 끊어졌다. 하나님과의 하나됨은 더 이상 가능할 수 없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고전 15:46).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자연인’일 뿐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우리 주님은 죄와 지옥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 않다. 주님은 깨끗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고상한 삶을 살고 있는 자연인인 어떤 종교 지도자에게 말씀을 나누시고 계시다. 그 사람에게 주께서는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일반적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에게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시면 그는 죄덩어리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복음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을 들어보면 주로 극적인 사건들이나 특이한 체험을 겪은 사람들을 다룬다. 그러나 초대 제자들 중에 그 누구도 이러한 예외적인 체험을 한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는데, 바로 외부 영역에서 온 ‘사람(Man)’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이 나타내는 바를 갈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 마치 그들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죄인들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들은 아무런 아쉬움이 없이 좋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으며 만일 우리가 거듭남에 대해 언급하면 우리를 딴 세상에서 온 것처럼 생각한다. 자연인들은 거듭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땅에 속한 사람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고전 15:47).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은 영광이지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어진 피조물 안에서 주의 영광을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흙으로 지어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중세 시대 때는 사람들의 몸 안에 죄가 거하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몸은 삶을 얽어매는 짐이나 방해였다. 그러나 성경은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가르침으로써 몸을 멸시하지 못하도록 한다. 몸을 가지는 것이 죄가 아니다. 죄는 깨끗하게 되어야 할 속성이다. 죄는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희생하는 것을 거절하는데 있다. 죄는 몸을 다스리는 어떤 성향이다. 한편 중생은 우리가 죄의 성향에 순종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죄의 성향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하게 구원한다 (롬 6:6).
둘째 사람
살리는 영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5).
예수 그리스도는 외부로부터 인류에게로 들어오셨다. 우리가 거듭날 때 주의 생명은 외부로부터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표준의 사람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과 마귀와 죄와 사람들을 대하시는 관계 속에서 주께서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인간의 속성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본다. 사람들은 그릇된 방법으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들어가려고 애쓴다. 우리는 모방에 의해 주의 생명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주님께서 죽음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주의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생명, 곧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성령을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인 성령을 받는다. 우리는 마지막 아담으로부터 생명의 선물을 위로부터 받아 거듭나게 되며 중생한다. 그후 우리는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신 성령께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복음의 기록들은 우리가 세상적 관점에서 우리 주님의 위격(Person)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날 때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교훈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주권을 찬양하면서 반면에 우리 인간의 속성 안에서 주의 구원을 나타내기를 거절하려는 위험이 있다.
신령한 사람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고전 15:46).
영의 속성은 땅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 영성들이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은 거룩한 영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인 관점으로부터 일하셨다. 하나님의 성령이 주 안에 온전히 거하셨기 때문에 주의 영성은 그분의 일반적인 삶에서 나타났다.
하늘에 속한 자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7).
둘째 사람은 “하나님의 그 아들(The Son of God)”이 역사 속에 나타나신 분이시며 인류의 궁극적 모양이 어떠할지를 보여준다. 둘째 사람 안에어 우리는 사람이신 하나님, 즉 신-인(God-Man)을 대하게 된다. 그분은 그분의 위격 안에서 온 인류를 대표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개의 인격체를 지닌 존재가 아니시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정확하게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사람의 표준을 제시하는 사람의 아들(인자)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계시하신다 (요 14:9). 사람의 아들 인자로서 주님은 구속에 서 있는 인류가 장차 어떠할지를 반영한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완전한 연합의 모습을 보여준다 (엡 4:13).
새 사람
땅과 하늘에 속한 형상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고전 15:48).
“자연에 속한 것”은 그 자체 내에 영생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부터 거듭나야 한다.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뜻은 성령께서 우리의 인격적 영으로 임하셔서 우리를 전부 새롭게 살림으로써 우리가 하늘로 들어올려지는 것을 말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을 우리 안에 이루신다. 성령은 본질적으로 신이시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신성이 나타나셨던 것처럼 성령은 신성으로 우리이게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성령은 결단코 우리의 영이 되시지는 않으시며, 우리의 영을 살리신다. 우리의 영이 살면 그 즉시 우리는 새로운 마음(혼)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인격안으로 들어오시면 우리의 마음은 요동하기 시작하고 신체적인 생명도 종종 불규칙하여진다. 건강이란 단지 우리의 신체적 생명이 외부 환경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내면의 평정을 흔드는 것은 외적인 신체적 평정까지 흔들어 놓는다. 따라서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면 그의 “아름다움은 좀먹음 같이 사라진다” (참조, 시 39:11). 아름다움이란 사람의 속성이 전부 완벽하게 정연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그는 한 동안 부자연스러워진다. 하나님의 영꼐서 어두운 것 위에 빛을 던지시니 그는 당혹스러움과 책망을 느끼는 것이다. 성령은 인간의 성향의 가장 깊은 부분을 살피신다. 따라서 복음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에 강렬한 열망을 일깨우지만 동시에 강한 분개도 똑같이 일으킨다. 죄의 책망은 우리의 자연적인 삶이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성향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령을 순종하면 거룩의 새로운 균형이 선다. 즉, 그의 성향이 하나님의 법과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후 그는 그의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한다. 이는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음을 의미한다 (갈 5:24)
하늘에 속한 형상에 의해 땅에 속한 형상이 지워짐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49)
당신은 이 땅에 것이 하늘의 것에 의해 사라지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가? 거듭난 후에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얼굴을 주시해 보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변화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부 새롭게 하실 때 우리의 몸은 내면에 계신 새로우신 성령에 의해 빚어지며 성령을 나타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고후 5:17). 우리가 성령을 받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영역으로 옮기신다. 그러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선상에서 평가할 수 없다. 그분은 이 세상 차원에 속한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차원에 속하기 원한다면 위로부터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요 3:3, 7). 톨스토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르쳤지만 그는 거듭나야 할 필요를 무시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을 받게 하라.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주님께 기대하는 모든 것을 그 사람 안에서 행하실 것이다. 그는 성령께서 언제나 역사하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고통 없이는 그 무엇도 태어날 수 없다. 사람은 고통없이 하나님의 나라로 태어날 수 없다. 그는 그의 양심과 마음이 다시 조정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고통을 의미한다. 구속은 사람을 하늘 나라에 들어가도록 만든다. 하지만 구속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새 출생은 지금 이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께 가치 있는 존재로 나타나는 일과 관련된다.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음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50).
죄와는 별개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의 특징은 독자성과 개별성이다. 개별성은 인격적 생명을 덮고 있는 딱딱하고 두드러지고 다소간 추한 껍질이다. 개별성은 어린이에게는 어울리는 특징이지만, 어른들에게 있어서의 개별성은 추할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 이유는 개별성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할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독립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이 바로 죄의 속성이다. 우리가 우리로부터 개별성의 교만을 제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위로부터 거듭나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속성 안에 거한다. 그러나 성경은 죄는 비정상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한다. 죄는 그 곳에 거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속성을 디자인하실 때 죄는 인간의 속성에 속하지 않았다. 죄는 인간의 속성에 들어와 그 속성을 타락시키고 기형이 되게 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은 죄로 부터 인간의 속성을 구원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유한한 육체를 통해 나타날 가능성이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도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의 역사를 맞이해야 한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 받으면 우리의 자연적 생명의 특성들은 희생되어야 한다. 그것들을 말살하거나 무시함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자연적인 것들은 순종에 의해 하늘에 속한 것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엡 4:23).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 재조정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하신 일들을 우리의 현실 가운데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주의 자녀들로 삼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수고할 것을 기대하신다. 우리는 시작할 때는 잘한다. 그러나 가다가 멈추기는 쉽다. 만일 우리가 끊임없이 바른 위치에서 살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육에 속한 “아담”과 같아진다. 현재 우리의 기독교 사역 중 많은 부분이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서 있지 못하고 “아담”의 마음에 서 있다. 우리 주님을 향한 사탄의 유혹은 첫째 아담의 육에 속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필요를 제일 먼저 두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의 명령을 먼저 생각하라.” (막 12:29-31).
자연적인 개별성은 자연적 관계를 강하게 붙든다. 개별성이 서 있는 자연적 관계는 부모, 형제, 부부, 자녀, 자기 유익 등이다. 주께서는 자연적 관계들이 우리가 주의 제자가 되려고 할 때 가장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제자가 되려할 때 만일 이러한 자연적 관계가 방해가 된다면 즉각적으로 주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눅 14:2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아픔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또는 그들의 조롱이나 아픔이 싫어서 순종을 피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들의 삶에 임하는 것을 막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면 이러한 자연적인 모든 관계들은 결국 우리에게 영적 유익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