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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The Crusades 십자군 운동
2013-07-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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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들이 성지순례를 하지 못하게 한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분노, 야만적 행위 때문에, 동서방 교회가 연합을 위한 교황청의 계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을 구해 준다는 서구의 강한 지원책 때문에, 영혼을 구원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지를 탈환한다는 것이다.
성지 순례자들이 성지에 가서 예수님의 무덤을 성묘하고 예배하는 것이 엄청난 서구 기독교의 전통적 소망이었는데 그것을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낭만적으로 일어났다.
엄청난 구라파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십자가 전쟁은 감정이라는 태풍의 눈이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 신앙심이 유발되어서 열기를 쏘아올려서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동참하도록 하였다. 성지 순례 자체가 죄가 사해지고, 모슬람의 사람들이 베카를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기의 성지 순례의 개념은 실제적인 의미로 와 닿았고 그 신앙이 그 근저에 흐르고 있었다. 성지 순례에 대한 우상화가 이루어졌다. 성지순례는 기독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우르반 2세가 종교회의를 했다.
<동방의 형제들이 여러분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늘 약속을 해 왔던 도움을 즉시 주어야 한다. 여러분들이 들어온 바와 같이 터키, 사라센, 모하멧 족들이 쳐들어와서 동방 제국을 점령하고 서방으로 와서 지중해 연안까지 침범해 왔고 그들은 기독교 제국을 정복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7전쟁에서 그들을 정복했다. 그들은 죽이고 많은 사람을 사로 잡고 교회를 파괴하고, 로마 제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 사람들을 무방비 상태에서 쳐들어 오게 해 온다면 하나님의 제국이 파괴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보다 우리 주님이 당신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전령자로서 온 세상에 전하도록 원하고 계신다. 온 세상에 이것을 알려서 기사든 가난한 사람이든 동방의 가난한 형제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친구의 땅으로부터 나쁜 종족들을 몰아 내어야 한다. 나는 여기에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에게 전한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은, 이방인을 대항해서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은 (Remission of sins) 누구나 죄사함 받는다고 하였다. (이슬람 테러분자들도 암살하는 것이 하나의 순교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죽는 그들에게 보장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장한다. 나한테 주어진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들의 죄가 사해 짐을 보장한다. 아! 얼마나 은혜스럽지 못하고 불미스러운 일인가? 마귀를 섬기는 종족들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정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만들어진 성도들이 그들에게 죽는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 있는 형제들을 우리가 도우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비난할 것이다."
여기에 모인 군중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Deus vult. God wills it.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쳤다. 수도원장, 감독들이 이 사실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십자군 운동 중에 가장 감동을 준 사람은 St. Bernard는 열정적 웅변가로서 그가 한 말을 보면,
"나는 정말로 작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적은 사람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형제들이여.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 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자기의 땅을 하나님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땅이 지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지는 하나님의 땅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가르치신 땅입니다. 거기에서 그 분이 30년 이상 사셨습니다. 그는 기적으로 그 땅을 밝게 비춘 그곳입니다. 자기의 피로 거룩하게 만든 곳입니다. 바로 그곳에 그의 부활의 첫 열매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의 원수들이 모독스런 기치를 들고, 약속의 땅을 검의 칼날로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들을 대항해서 일어서지 않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를 완전히 불태워 버릴 위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죄되는 그 성소가 완전히 오염될 위경에 있습니다. 점없는 양이 있었던 그 지역을 오염시키고 피로서 더럽힐 지경입니다. 십자가의 종들이여, 지금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들이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져 주며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 주겠느냐?" 많은 사람들은 이 설교를 듣고 십자가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의 감동을 받아 참여했던 십자군 운동은 베이통은 이렇게 묘사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묘사했다.
"어떤 사람들은 원수들의 머리를 잘라 버리고(이것은 자비로운 것이었다) 화살로 쏘아 죽이고, 어떤 사람들은 더 오래 고통을 받도록 불에 던졌다. 머리와 손과 발이 쌓여서 예루살렘 도시 거리에 많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예루살렘의 거리를 지나가려면 말과 사람의 시체를 치우며 지나가야 했다. 이것은 솔로몬 성전에서 일어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솔로몬 성전에서 일어난 것을 상세히 이야기하면, 그 성전문에 사람이 무릎까지 피가 올라와서 피 속으로 걸어다닐 정도로 비참한 죽음이 있었다. 정말 이것은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이었다. 바로 이 적들을 쳐부수어서 원수들의 피가 채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이었다. 하나님의 신성모독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심판은 당연하다. 이제는 우리 시가 탈환되었고, 우리의 노력과 열심으로 전쟁을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Holy Sepulchare)을 빼앗을 가치가 있습니다. 이제 그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주님을 향하여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9번째 찬가를 부를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 날은 유명한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고뇌와 슬픔을 즐겁게 바꾼 날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독교의 정의를 표시하는 날입니다. 이교도는 멸망하고 기독교의 정의가 표시되는 날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었고, 주님께서 이 날을 회복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당시 십자군 운동에 동참한 자들 가운데 죄인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약탈과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래서 사라센 제국에 있던 기독교인들 4만 명이 환영 나왔음에도 그들이 적인 줄 알고 다 죽여버렸다. 나중에는 소년을 데리고 갔으나 참패하고 만 것이었다.
왜 이렇게 강행했던가? 이것을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이 전쟁을 Holy War,즉 정당한 전쟁, 거룩한 전쟁이라고 인식했다. 거룩한 전쟁의 개념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도대체 엄청난 손해를 감내 하고서라도 거룩한 전쟁에 대한 개념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성전의 개념에서 왔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전쟁을 모세를 통해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가나안 거민들을 죽이는 방법까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정복해서 전쟁의 방법까지 설명해 주셔서 정복하는 것은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모세의 사상이 사무엘, 사사까지 이어지면서 거룩한 전쟁으로 행해졌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전쟁이 승리했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전쟁을 경험했고 이것은 성전holy war개념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개념은 신약시대에 오면서 소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전쟁을 반대하면서 (Pacifism 평화주의)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경우에 전쟁을 언급한다. 세상에 전쟁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만 전쟁을 옹호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였다. 산상보훈에는 전쟁에 관한 윤리가 없다. 도덕과 사랑만이 강조되어 있다. 바울서신에도 보면 혹시 기독교를 십자가의 군대라고 표현을 하지만 군사적 내용은 은유적으로 사용하지 실제적인 군대의 전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예수님과 바울의 사상을 받아 들여, 대부분의 초대교부들은 평화주의를 옹호하였다. 군대에 봉사하는 것조차도
싫어했다. 그러다가 2세기 말부터 기독교 신앙양심으로 군대의 복무에 대해서 양심의 갈등을 느꼈다. 그야말로 평화주의자였다. 터툴리안을 예로들어 보면,
"검을 두들겨 쟁기를 만들고 창을 두들겨 호미를 만들 것이다. 옛날에는 복수하라고 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히려 빵을 만드는 쟁기를 만들 것이라"는 표현으로 평화주의적 사상이 팽배하였다. 이것이 오리겐에 오면서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 당시 셀수스(기독교를 가장 공박했던 초대교회 철학자)에 대한 반박으로 contra celsus라는 글을 썼다. 그는 변호를 통해서 기독교의 전쟁참여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평화주의, 반 무력주의를 주장했다. 로마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군대의 힘이 아니라 기도의 힘으로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무기를 가지고 대항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의 홍해사건도 기도로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평화주의적인 교회의 입장이 십자군 운동으로 가게 되느냐? 콘스탄대제와 어거스틴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기독교가 공인된 콘스탄틴대제 시대에는 군대에 대해 긍정적이 되었다. 콘스탄틴대제에 들어와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군대를 지키는 것이 사명으로 생각했다. 국가의 세속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던 것이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함으로 말미암아 달라지게 되었다.
나아가 어거스틴은 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었다.(Just war) 할수만 있으면 사랑이 우선되고, 전쟁은 명예스러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초대교부와 달리 군대는 폭력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를 섬기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다. 완전히 신학적으로 이념적으로 그 틀을 만들었다. 이러한 긍정적 평가와 더불어서 종교와 국가가 병합되었던 중세기에 들어오면서 그것이 정당화되었다. 따지고 보면 중세기는 '군사문화'였다. 중세기에는 전쟁을 한 경우가 많았다. 프랑크 왕국도 전쟁의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전쟁의 개념이 초대교회와 관계없이 전승되어 왔다가 어거스틴이 이념적으로 신학적으로 틀을 세웠고, 어거스틴으로 말미암아 그 정서가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레미야서를 인용하여 <그들의 손에 피가 없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
십자가 운동이 일어나면서 수도승들도 그 때까지 지켜 온 신앙을 버리고 전쟁에 참여한다. 명상, 기도의 전통을 버리고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성전기사단 (Templars)와 수도기사단(The Hospitalers)가 일어났다. 이러한 성전의 개념이 현대까지 미치고 있다.
이 십자가 운동의 거룩한 전쟁의 개념은 종교개혁시대에도 도입되어서 근대종교개념에 도입된다. 유럽의 30년 전쟁을 보더라도 정당화된다. 휘그너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독립과 신앙양심을 위한 전쟁이었다. 파리 시내에도 1만명이 죽어야 했다. 농민전쟁도 폭력을 통해서 일어난 것을 알 수 잇다. 30년 전쟁이야말로 근대 종교전쟁의 개념에 새로운 시각을 주었고, 신교와 구교가 대립된 원인이었다. 국토와 곡창지대가 황폐하였다. 30년 전쟁을 하고 난 뒤, 많은 지성인들은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30년 전쟁 이후 과학문명과 더불어서 유럽에서는 기독교를 떠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천년동안의 기독교 문화는 전쟁의 문화였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은 전쟁을 직접 일으키기도 하였다. 중세와 근세에 오면서 종교전쟁은 가속화되었고 그래서 식민지 시대가 도래했다. 미국은 원주민들을 죽이고 그곳에 교회를 세우며, 오스트리아, 남아공도 마찬가지로 교회를 세웠다. 전쟁을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주의자였다. 평화를 위한 전쟁을 옹호하지 않았다. 현대에는 정치와 종교가 다른 기능을 하고 있는 이 시대에 전쟁이 종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방어를 위한 수단을 제외하고는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 필요한 악으로 전쟁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Poverty Movement ( 청빈운동 )
십자가 운동을 전후에서 일어났던 가장 큰 운동은 사도시대로 돌아가서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그 삶은 단순한 삶, 청빈한 삶이었다. 그것과 맞물려서 대학 운동이 일어나고 대학이 일어나다 보니까 지성인들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① 지난번 십자가운동을 보면서 제대로 조직되지 않는 군인을 동원해서 200년동안 전쟁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공동체 의식이 강화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정교일치 시대가 되었지만, 이슬람 교도를 향하여 싸웠던 것은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를 형성하였던 것이 사실이다.(유럽의 EU 같은 것은 이러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② 유럽에 있는 야만족으로 구성되어 신성로마제국을 이루었던 자들의 시야를 넓혔다.
③ 회교 문화권의 접촉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도입하고 그리하여 스콜라 철학을 수용하게 되었다.
④그외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도시가 발달되고, 교육이 일어나고, 자각운동이 일어나고, 상업운동이 일어나 화폐가 개혁됨으로 근대국가로의 기초를 놓았다.
⑤서구의 봉건제도의 체제하에서 봉건제도가 붕괴할 수 있는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영주들도 수도원장의 권고로 해서 자기의 농토를 버리고, 봉신들도 농토를 버리고 십자가 운동에 참여 했을 때, 그들은 죽어버리고 농부들도 죽어버리니까 옛날처럼 봉건제도가 유지 될 수 없었다. 봉건제도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자 지중해를 중심으로 상업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14,5세기에 자본주의를 형성하게 된다. 인류문화를 교류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⑥청빈운동에 대한 시각이 열렸다는 것이다. 순례자들이 순례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십자가 운동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신앙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그 당시 예수님에 대한 시야가 떠졌다. 예수님이야말로 가난한 분이였다. 중세의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지은 교회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였다. 하위 성직자들이 엄청난 재산을 모았는데, 십자가 운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이 가난하고 청빈하였던 시각이 열려지자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 시자하였다. 이 때, 일어나는 동기는
(1) 이단적인 경우와
(2) 중세교회의 제도적 모습에 대해서 반대하는 경우, 혹은
(3)수도원 안에서 자기들의 성찰에 대해서 반성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Pattern I {봉건제도하의 교회} -
재산 권력, 명예를 위해서 투쟁한 시기였다. 주교가 영주 행세를 하면서 봉토를 내려주어서 봉신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거이 중세기의 하나의 패턴이었는데 중세기 전에 이런 현상이 강하게 나타났다. 여기에 물론 교황과 황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의 싸움이 있었다.
Pattern II {시민계급 형성} -
도시가 번영하고 평신도들의 자각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평신도들의 각성이 일어나자 자기 주위의 환경을 보게 되는데, 고급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세력들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1)네덜란드의 Tanhelm은 이렇게 말했다.
"성직자의 재산 소유를 전면적으로 반대해야 한다. 성직자들의 모든 재산 소유를 반대하고, 세속성화를 청산하고 거듭나야 한다. 성사적이고, 제도적이고, 의례적인 신앙에서 신령화를 추구해야 한다."
성만찬 할 때에 빵이나 피가 전부다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거부하다 어떤 신부에게 피살되었다. 물론 이들은 청빈이라고 해서 물질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2) Arnold of Brescia는 교회는 재산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교황에 대해서 거부하였다.
3)피터 왈도에 대한 개혁운동(Waldensis / Peter Waldo (이에 대해서 연구필요)
W. Cartos Martyn 의 서술.
(1)그는 프랑스 리용 출신으로서 상인의 아들이었다. 한 친구가 천국으로 가는 길을 제시할 때, 가진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 특히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을 듣고 변화를 받았다. 그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정신과 유사한 것들을 주장하였는데, 왈도가 주장한 것은 신앙과 원천은 전통이나 교부의 권위와 관계없이 성경이다. 특히 그는 신약을 강조했고 구약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반대파들에게 내몰림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구약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2)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기둥은 사도신경이라고 하였다. 중세기의 신앙을 보면 "council of Father"(교황 훈령집)이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피터 왈도는 그것이 아니라 '사도신경'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3)세례와 성만찬을 제외하고는 교회의식을 반대했다. 7성례 중에서 세례와 성만찬을 거부하였다. 그는 중세 시대에 수많은 의식들을 반대했다. 그는 제복에 대한 반대와 성상반대, 십자가의 의미부여 반대, 성지순례의 미신적 사상도 반대, 거룩한 성유물에 대한 반대, 여러가지 종류의 불필요한 성례의식을 반대하고, "모든 외형적인 의식은 사타의 발명품, 육체의 발명품, 미신의 발명품"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쯔빙글리가 가지고 있었던 사상과 유사하다.
(4) 중세기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Pugatory(연옥)의 교리를 반대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 미사를 드리는 것을 반대하였다. 오직 Heaven & earth만 있다고 주장하였다. (연옥설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초대교회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는 Embrio의 문제였다. 어리 아이들이 태어나자 마자 죽었을 때,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던 중에 연옥에 간다는 사상이 나왔다.)
(5) 면죄부, 고해성사를 반대했다. 그래서 믿는 사람끼리 서로 고해성사하면서 위로하고 교훈을 하였다.(오늘날 Para-church운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6)성만찬에 있어서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에 실제로 피와 몸으로 임재한다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미 종교개혁자들이 있기 전에 이러한 소동을 통해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7)성직계급의 질서는 감독과 사제, 집사(deacon)로 제한하였다. 그 외의 여러가지 종류의 모든 계급은 부정하였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결혼하는 것은 합법적이다. 교황정책에 대해서 반대한 것이다.
(8)로마 교회야 말로 '바벨론의 창녀(Whore)'라고 하였다.
지역교회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반대한 영향으로 이노센트 3세가 반대하게 되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칙령이 내려지자 재산을 몰수하고 화형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의 정신적 기초의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Pattern III
after the crusade before
신학적 이단들이 많이 일어났다.
①Paulician, Bogomils 이단들이 일어났다.
(1)그들의 사상은 초대교회의 전반적인 사상인 이원론적(Dualism) 사상에 근거하였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영지주의,메니키안, 말시온과 같은 이단들과 연관을 시킬 수 있다.
(2)바울파들은 완전히 이단들이었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 구약의 신에 의해서 이 세상의 창조는 완전히 악하다. 그래서 신관에 있어서 완전히 이원론이었다.
(3)기독론에 있어서도, 어머니 마리아의 피는 전혀 이어 받지 않았다. 그 결과 예수의 탄생과 죽음은 전혀 비현실적이었다.(Docetism)
(4)구약성경을 배척하였다. 신약은 대부분 채택하였다. 그들은 베드로 서신은 버리고 바울서신을 최고로 보았다. 그들은 성경을 전체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상만을 주장하는데 근거가 되는 것만 채택하였다. 성경 중에 성경이 있다고 보고, 말씀 중에 말씀이 있다고 보는 차별화를 두었다.
(5)영아세례를 거절했고, 예수님을 표준으로 삼아서 30세가 되면, 강에서 세례를 주었다.
(6)성찬식은 밤에 하였다. 이 때 포도주를 사용하지 않고 물을 사용하였다. 애찬식은 포도주를 사용하였다.
(우리 기독교에서 잃어버렸던 것은 문화의식이었다. 종교란 생활 속에 있는 역사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문화를 통해서 역사가 풍성해 진다. 서구사회는 기독교 문화가 몸에 배어 있다.)
(7) 그들 가운데 성도의 등급을 나누어서 ⓐ단순히 듣는 평신도들(the Hearers), ⓑ귀의자들(금욕주의적 생활로 세례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신앙인들)The Adherents, ⓒ진짜 믿는 사람들(The Perfect) 이렇게 3단계로 구분하였다. (워치만 니가 위험한 것은 성도들을 구분한 것이었다. 구원체험 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8)바울파들은 로마 카톨릭을 완전히 배격하였다. 명예를 용납지 않았고, 성자를 불러서 기도하는 것, 성상을 사용하는 것, 분향과 초불과 같은 상징물을 배격하였다. 이단들이 중세의 보편적인 의식을 배격한 것은 큰 반동이 아닐 수 없었다.
②보고밀 이단은
(1)신론과 창조론에 있어서 영지주의였다.
(2)가현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십자가를 하나의 혐오의 대상으로 보았다. 나무 자체가 하나의 물질로서 죄인데, 그것을 예수님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면서 십자군 전쟁의 중하반기에 카타린을 중심으로 강한 이단이 일어났다. 신학 이단 가운데, 특히 카타린과 같이 중세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과 보고밀, 바울파, 탄셀숨, 아놀드, 왈도를 싸잡아 메니키안으로(?) 보고 종교재판(Mgeuisitian)을 시작하였다. 초대교회에 로마황제가 기독교를 핍박할 때 하지도 않은 것을 교황이 하기 시작하였다.
이노센트 3세는 십자가 운동에 호소해서 이단 멸절을 위해서 카타리파와 전투하면서 20년동안 운동하였다. 지방이 황폐화되고 마을 사람들이 다 죽어 버렸다. 이 이단들의 멸절을 위해서 종교재판을 열고 이단을 색출하였다.
(이단 규정에 있어서 중시해야 할 것은, 가만히 있는 사람까지 색출해서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이 때 일어났던 것이 <마녀 사냥 Witch Hunting>이 나온 것이다. 분명히 이단을 색출하는데 있어서 광신자가 되었다. 그 이유는 광대 파장을 일으키는데, 중세에서는 이 이단들을 정치적 적으로 보고, 교회를 흔들고 국가의 기초를 흔드는 것으로 규정하고 강한 핍박을 하였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반대하였다. 분명히 객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만, 객관적 진리를 가지고 거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때, 가혹하게 할 것이냐, 설득력으로 유도할 것이냐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후자를 택했다. 루터나 칼빈 등은 그와 같은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가혹하였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에 의해서 드디어 마녀사냥이 폐지되었다. 신앙 양심이 주장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교단도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의 것을 답습한다고 볼 수 있다.
②또한 Carthaki이단이 나타났는데 나중에 Ablgonis가 되었다. 이 이단들은 신학적으로 나타났다.


Pattern IV
3 가지 패턴이 십자가 운동 이후에 나타났다. 특별히 2와 3의 패턴과 Pattern IV 대학과 스콜라주의가 합해지면서 중세 수도원의 큰 개혁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탁발수도원>이었다. 지금까지는 공동체로서 봉신, 봉주체제로서 완전히 부패되었던 것이다. 베네딕 수도원의 청빈사상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재산을 거부하면서 신학사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생활모범을 통해서 영향을 주려고 세웠던 것이 탁발 수도원(머리를 깎고 얻어 먹는 수도원)이었다.
The Medicant Orders
이 탁발 수도원은 13세기에 들어와서 수도원의 부와 부패가 심화될 때 일어난 것이다. 수도사들은 귀족들이 되어 버렸고, 수도원 주변은 공원화 되었고, 수녀들의 정절이 망각되고 창녀의 집으로 돌아가 버린 곳이 되었다.
성베나드의 말
" 교회는 사람들이 없고 사람들은 사제들이 없이 남겨져 있고, 사제들은 그들의 잘못 때문에 존경심을 잃어 버리고 교회는 회당으로 간주되고, 교회는 더이상 성소로서 거룩한 곳이 못되었고, 성례식은 없어졌고, 종교적 행사는 권위적이 못되었다. 사람들은 죄사함 없이 죽어갔고, 환난에 빠졌다. 성사고백에 의해서 혹은 성만찬을 통해서도 그들의 영혼이 회복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떤 수도원은 부랑자들이 들끓었고, 부패해갔다. 성직자들은 세속화되었고 부를 축적하였다. 고급 성직자들은 부를 축적하고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하급 성직자들은 거지 취급을 받았다. 이때 바로 이단들이 번져나갔다. "
이 때, 도미니칸과 프란시스칸이 생겼다. 교회가 청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프란시스칸은 재산을 전혀 가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고, 도미니칸은 재산을 어느 정도 필요한 정도로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쨌던 청빈운동이 주장되었고, 교회 안에서 주장하기 위해서 온건적인 신앙운동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려고 하였고, 교황의 허가 아래서 설교하였다.
특별히 이들은 선교에 관심을 가졌고, 이론보다는 실제에 관심을 가졌고, 도미니칸들은 대학의 지성인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중세 대학의 대부분이 도미니칸과 도미니칸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여기서 보나벤튜라, 옥캄 등과 같은 인물이 나왔는데, 이 두파는 각각 실념론과 유명론(옥캄)을 주장하였다. 이것들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교회가 새로운 운동으로 들어가면서 여기에 합세해서 이노센트 3세가 중세 교황의 권위를 피크로 세웠다. 이러한 것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져 나갔다. 근대 국가의 생성으로 말미암아 근대국가의 주권을 찾으면서 교황청이 70년동안 바벨론에서 유수하는 것을 알수 있다. 교황의 세력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안되니까 인문주의가 나타나고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면서 중세기가 문을 닫아 버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중세기에 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스콜라 철학을 주도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바벨론의 유수를 통해서 교황들이 아비뇽에서 통치를 하는데, 불란스 국가기관에 시녀역할을 하였다. 교황청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종교회의가 일어났다. 이것을 통한 민중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대학의 교수들과 지성인들이었다. 중세기의 중반에 들어가서 대학을 통해서 의식이 개혁되면서 인문주의가 나타나고, 거기서 에라스무스가 나타났다. 루터와 캘빈등이 나타나서 서구 문명과 근대문명을 이루어내는 것인데, 그 뿌리가 대학이었다. 당시 대학은 그 배경을 보면 십작군 운동의 영향을 미쳤다. 상업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달했고, 길드가 발달했다. 길드(어떤 한 감독 아래서 형성되어 있는 기술을 배우는 공장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예술 분야, 학문세계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 Universitas라는 말이 생겼을 때, 집합이라는 말이 있다. 여러 칼리지들을 모아 놓은 것들이다. 특히 당시의 집합의 형성은 공통된 목표를 위해서 모였다. 상업,공장, 예술, 학문을 목표로 모였다. 주로 학문을 목표로 해서 모인 길드가 유니버시타스가 되어서 교수와 학자들의 집단이 되었고, 학자 집단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교수들의 명성이 학교의 명성을 좌우하였다. 이것들이 중세기의 대학들의 전통이었다. 대학들은 지식조합식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교수들은 직업 길드를 형성하였다. 북유럽의 파리, 옥스포드, 캠브리지 대학은 대학 교수들의 길드였고 대학교수들이 개업하여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남부지역에서는 (볼로냐 대학 같은 경우) 학생들이 길드를 조합하여 교수를 초빙하였다. 12세기에 대학들이 세워졌고 그 후에 계속 대학들이 일어났다.
학위의 초기 형태는 학부에서는 7학을 가르쳤고, 거기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이 신약이나, 의학이나, 법학 중에 하나를 전공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학위는 정말 학위였다. 그 방면에 권위가 있었다. 교수가 만족할 만해야 졸업을 시켰다. Master라고 하면 모든 분야에서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중세기의 학위는 정말 학위의 권위가 있었다. (칼빈의 경우, 그 해박한 지식을 기본 지식으로 알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중세기에 이루어 놓은 신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신학이 학문의 꽃이었다. 중세기의 특징이 신학을 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볼로냐 대학은 법학이 유명하였다. 유럽에서 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볼로냐 대학에 모여들었다. 이 대학은 학생들의 입김에 세어서 학생장을 선택하였다.(Rectors) 그리고 학생들이 제정한 법을 교수들이 지키는지를 학생들이 감독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학위를 주는 것은 교수들이 관장하였다. 교수가 학생장에게 복종 맹세를 하고, 강의를 빠질 경우 벌금을 내었다. 무능할 교수들을 학생들이 쫓아내었다.
그러나 북쪽의 대학들은 교수가 중심이 되어서 학생들을 관장했다. 결국 교수가 미성숙한 학생들을 관장하는 것이 정착되었다.
중세를 뒤엎었던 사상이 신학을 중심한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루터와 칼빈이 그 경우이다. 신학이야말로 도덕과 양심을 외치면서 하나님의 법을 외쳤고, 정의를 외쳤다.
서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은 파리대학이었다. 파리 대학은 노틀담 성당학교의 명성에 끌려서 그 전에 노틀담 성당학교에 있던 교수들에 의해서 강의하였다. 교수들이 방을 세 내어서 학생들이 듣고 강의료를 내었다. 학위 수여는 학무관에게 주어졌고, 때로는 교수들과 학무관들이 갈등이 있었다. 필립 2세가 학생들에게 권위를 주었다.
이 파리에서는 총장을 선출하였다. 그 총장이 교양학부의 우두머리였다. 교양학부가 커가니까, 오랜 투쟁 끝에 신학부에 그런 갈등을 느끼면서 인문주의 계통에서 관리하는 현상이 있었다.
철학과 신학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은 13세기 3000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배움을 갈구하는 지성인들이 모여 들어 공부하였다. 이 후에 옥스포드에서 교수들이 나와서 캠브리지 대학을 세웠다.
이 각 대학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성속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투쟁을 많이 했다. 특히 교황권의 권력을 벗어나기 위해서 투쟁을 많이 하였다.(총회의 경우 상명하달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학교의 발달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중세기에도 없었던 것이다. 공립학교가 정부에 시녀노릇을 할 때, 부패하게 된다. 교육현장에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들어와서 학교를 간섭하게 되면 학교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게 된다. 인간 교육, 신학교육을 위해서 공부시키는 곳이 신학교인데, 한국교회는 그러한 자유가 없는 곳이다.)
대학이 부패한 사회와 교회를 진단해서 고쳐나가는 역할을 중세시대에 일어났다.
대학생들은 대부분 미혼이었고, 주민들의 생활방식과 달랐다. 그래서 많은 마찰이 일어났다. 대학안에서는 도둑, 폭행, 강간, 살인도 있었다.
13세기 후반에는 대학 등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서로 도와주는 현상이 일어났고, 하숙비와 집 값이 오르자 학생들이 데모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요와 공급이 균형이 맞지 않아 어려운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자선가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도와주었다.(칼빈의 경우에도 아버지의 친구의 집에서 공부하였다) 중세 대학의 이러한 개괄적인 모습에서, 대학은 학문의 도움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식이 바꾸어지고 학문이 발달하고, 종교개혁으로 나아갔던 제3의 영향이었다. 나아가 근대의 문명을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만약 길드와 조합의 영향을 받아 대학이 형성되지 않았다면,(인도나 동양처럼 되었다면)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식발달과 학문이 발달하자 신비주의(Mysticism)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묵상, 고행 등을 통해서 신비체험을 주장하였다. 그 대표자가 聖버나드나 엑카르트이다. 성버나드의 경우, 그리스도와의(with Christ) 연합(Union)을 이야기하였다. 일반 사먀니즘에서는 하나의 결합을 이야기할 때, 하나의 융합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비주의는 자기의 의지가 있음에도, 자기의 의지는 말살되지 않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것이었다. 신인합일, 신과 합일되어 지면서도 자기의 개체는 살아 있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해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스콜라식이 아니고 '믿게 때문에 이해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엑카르트는 도미니칸의 사제로 공부를 많이 했는데, 인간의 심층부의 영혼에서 신성의 탄생이 있다고 보았다. 결정적으로 신과 융합할 수 있는 것을 해석할 때는 Divine spark(하늘의 불씨)가 남아 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신성의 불씨로 말미암아 신과 합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유한성을 벗어나 신성으로 충만케 됨으로 말미암아 신과 합일하게 되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감동, 슬픔, 존경, 악에도 움직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순수성을 신인합일의 특징으로 보았다.
그의 제자였던 Tauler, Suso 등 독일 중심의 신비주의가 라인강의 줄기를 따라 네덜란드로 올라간다. 그 중에서도 구르트(Grute)라는 사람이 '공동생활의 형제단(The common life of Brother)을 창설한다.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 루터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근대 경건주의로서 종교개혁의 뿌리에 영향을 미쳤다.
칼빈주의의 경건주의는 중세기에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중세기에 이러한 여러 가지 교회 정치적인 전통(Ecclesiopolitical Tradition)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캠브리지 대학의 Ullmann 교수가 이에 대해 2가지를 이야기했다.
권력의 구조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결국은 국민으로부터 올라가는 형태가 있고, 하나는 위에서 내려오는 형태가 있다고 보았다.
울만은 여기서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의 구조는 이방문화에서 근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나와 있는 세속정치의 형태로 보았다.
위에서 내려오는 하향식의 권력구조는 성직자들의 의식과 구조는 기독교의 원천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셨고, 하나님이 세운 왕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신정적 전통(Theocratic)
중세기는 대학교수들이 교황청을 회복하기 위해서 연 종교회의 같은 것은 권력이 상향식이었다고 보았고, 교황청들의 법들을 연구한 교회 법학자들(
그러나 옥클리는 교회정치야말로 신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중세기에도 밑에서 올라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그레고리 1세와 7세는 모든 민중들이 원해서 올라간 경우이다.
(egalitarian)
세속적인 정부도 일률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올라간 경우만이 아니었고 독재하는 황제의 경우 하향식이었다고 하였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에 기독교 공동구역의 이념을 가지고 기독교가 발전하고 붕괴하는 과정에서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행사하였다. 기독교가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대리권자라는 Pre-eminent에 기초하였다.
종교적 권위가 힘의 체제로 발달되었다.
종교체제에서 권력 소스를
① Bible로 보았다. 그리고
② Church tradition이다. 그리고
③역사적 사례들이었다.
이 3가지가 교회의 권위를 지탱해 주었다.
믿음이 이성을 짓누르는 상황 가운데서 모든 사회를 이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기에서 반기를 든 현상을 볼 수 있는데, 그 사람이 파리의 쟌과 마르실리우스이다. 파이의 쟌 같은 경우에는 지금까지 중세의 두개의 구조를 가지고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는 식으로 믿음이 이성을 짓누르는 것에 대한 이론을 반대하면서 "국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통치자로 여기지 않고, 국가가 최고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국가는 실제적이고 완벽한 정의가 있다. 왜냐하면 국가는 도덕적인 덕이 있기 때문에 국가 자체는 교황이나 신적 서임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가가 교회의 권위 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평화의 수호라는 글을 통해서 "교회가 세속 권한에 너무 침투해 있기 때문에 국가가 불안하고 사회가 부패한다"고 하였다. 그 권력과 힘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사람, 민중에게 있다고 하였다. 민중이야말로 세상의 권한의 소스, 원천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