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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해방신학(Befreiungstheologie)
2013-07-10 00:00:00
관리자 조회수 1018
 
해방신학 혹은 해방의 신학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생한 기독교 신학의 한 유파(流波)이다. 이 신학은 스스로를 “빈자(貧者,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로 이해하고 있고, 착취와 인권유린과 억압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기를 꾀한다. 이 신학은, 사회의 하층민 계층의 상황에서, 성서적 전통을 포괄적 사회비판의 자극제로 여긴다. 동시에 이 해방신학은 정치경제적 종속(종속론)에 대한 독자적 분석을 하고, 기초민주적이고도 사회주의편향적인 사회체계를 세우려 한다.

이로부터 특히 카톨릭에서 불가피하게 현저한, 교권(敎權, 종교권력, 성직계급)과의 갈등이 초래된다. 이 갈등은 자주 개별 성직자에 대한 징계절차로 이어졌다. 또한 자신들의 신념에 충실한 나머지 해방신학자들이 남미(南美)에 만연한 과두정치 권력과 독재 권력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고, 이로 인해 많은 성직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희생자는 1980년에 살해된 엘살바도르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다.

해방신학의 기본개념은 1960년경부터 브라질의 카톨릭 기초공동체라는 자치단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 기조(基調)는 1968년 2차 메델린 범(汎)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가 빈자들을 편든 것에서 유래한다. 이 신학의 명칭은 1971년에 나온 구티에레스의 책 Teologia de la liberacion이 부여했다.

대체로 카톨릭의 해방신학은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주장들을 받아들였고, 전(全)세계 교회와 사회비판적 개신교 안으로까지 영향을 끼쳤다. 비슷한 개념의 신학이 남(南) 아프리카와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서 생겨났다. 또한 미국에서 시민권운동과 관련되어 나온 “흑인신학”도 스스로를 해방신학으로 이해하고 있다.

Entstehung
발생

1964년 브라질 군사쿠데타를 시작으로 거의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는 군사독재국가들이 등장했고, 이 독재국가들은 다수의 국민들에게 재앙이 되는 국내정치를 했다. 그리하여 1965년 이후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에서 끊임없이 반란, 전복(顚覆), 혁명 시도들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점점 기독교 공동체와 교회대표들 중에서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 편에 서는 자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교회의 역할에 관해서는 내부적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교회 책임자들의 일부는 정권을 잡은 자들과 항상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다른 자들은 억압, 고문, 경찰국가, 무법(無法), 빈곤의 경험으로부터 가난한 다수의 국민들과의 새롭고도 포괄적 연대(連帶)를 발전시켰다.

1968년 메델린에서 제2차 범(汎)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가 개최되었다. 여기에 참석한 주교들은 새로 등장한 사회운동과 대결하려 했다. 브라질 대주교 카메라의 지도하에 “라틴아메리카의 폭력적 사회적 불법행위”가 공개적으로 비판되었다. 자유자본주의 사회체제와 맑스주의 사회체제가 비판되었다. 그 대신 비폭력적 개혁적인, 이른바 제 3의 해방의 길이 제안되었다. 교황 바울 6세의 교서(Populorum progressio?)에 부응하여 전체 라틴아메리카 카톨릭 주교단은 교황의 입회와 승인 가운데 ‘빈자(貧者)들을 위한 선택’을 교회 입장의 준선(準線)으로 승격시켰다.

유사한 일들이 미국에서도 있었다. 여기서는 1960년대의 시민권 운동과 저항 운동으로부터 일상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항한 “흑인신학”이 생겨났다. 이것이 다시 기독교적 동기에서 나온 남아프리카의 반(反)인종차별주의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의 예가 바로 ‘카이로스(καιρος, 시대) 문서’다. 또한 1968년 이후 필리핀, 스리랑카, 인도에서는 “투쟁신학”이 나타났다. 이러한 운동들은, 그것들이 각각 독자적이었고 유럽이나 북아메리카 지지자들에게 영향을 주긴 했지만, 자주 “3세계 신학”으로 분류된다.

Programm
강령(綱領)

Von Lebenserfahrung der Armen geleitete Bibelauslegung
빈자(貧者)들의 삶의 체험으로부터 나온 성경해석

원래 해방신학은 빈자들 자신들의 신학이었다. 처음 해방신학자들이 세계 책 시장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을 때에는 이미 성직자에게 인도함 받지 않은 공동체 예배형식을 갖고 있던 기초공동체가 꽤 성장해 있었다. 해방신학자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신학의 “창시자”라기보다는 억압받는 자들의 대변자로 이해했다. 이들 스스로는, 성경에서 전적으로 저들 자신들의 문제 곧 모든 형태의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을 재발견하고, 이것으로부터 저들의 삶의 개선을 위한 정치적 추론을 이끌어 내는 자들이었다.

해방신학은 이 발견을 뒷받침하고 실천적 영향력이 있게 하려 한다. 이는 성경을 관통하는 첫째 주제가 해방이고, 이 해방의 수취인들이 바로 빈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때 출애굽 전승에 열쇠 역할이 주어진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의 참혹함을 보시고 그들의 억압자들로 인한 원성을 들으시는 분으로(출3:7)” 등장하신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황은 신약성서 바로 시작 부분, 마리아가 자신에게 약속된 메시야 출산(出産)에 대한 감사찬송을 부를 때, 강화된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位)에서 내리치셨으며 미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1:52, 53).”

그리하여 성경의 구원복음의 핵심 개념인 구원을 전통적 신학처럼 오로지 영적(靈的) 차원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사회정치적, 경제적, 혁명적 변화로 이해했다. 복음이 선포하는 구원은 더 이상 피안(저 세상)에만 관계되어있지 않고, 이 세상의 사회적 현실과 관계되어 있다. 해방신학은 이 해석을 자의적으로 한 게 아니라 성경 본래의 의미를 좇아 얻은 것이라 강조한다. 이것으로부터 해방신학은 교회의 빈자들에로의 근본적 방향전환을 말한다: 그들의 나라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 교회와 세계 교회를 향한 촉구로서.

 
방법론으로는 해방신학은 상황적(문맥적) 성경해석을 받아들인다. 이때 먼저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현실적 사회정치적 분석을 한다. 이는 이것으로부터 본문해석을 위한 준선(準線)을 얻기 위함이다. 이제 본문해석은 원래 자신의 상황으로 되돌아 왔다(해석학적 순환).

Sozialistische und basisdemokratische Gesellschaftsreformen
사회주의적 또한 기초민주주의적 사회개혁

 
정치적 측면으로는 해방신학적 구상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적 사회모델을 선호한다. 이때 해방신학은 소비에트식 정당과 새로운 독재자들의 우위와는 분명히 선을 긋고 기초민주적 협동적 요소를 강조했다. 해방신학의 사회비판은 이른바 종속론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종속론은 착취의 메커니즘을 이중(二重)의 동일이해관계로 설명한다. 첫째로 한 국가 내의 엘리트집단과 공업부국(工業富國)들의 엘리트집단 간의 긴밀한 유착으로부터 설명(계급 대립), 둘째로 다수의 임금 노동자들을 부국(富國)들의 차등적 생활수준 체제에 소속시키는 것으로부터 설명.
Verhältnis zu Gesellschaftswissenschaften
사회학들과의 관계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은 출현 때부터 종속론에 영향을 받은 1960년대의 라틴아메리카 사회학을 향했다. 이것은 당시의 수입대체 발전모델의 위기에 대처하려 했다. 그 모델은 좀 더 강력한 산업화를 통해 수입과 선진국 시장으로부터의 좀 더 약화된 의존을 기대했었다. 이 개념을 당시에 ‘진보를 위한 연합’, (1965년 까지의) ‘칠레 기독교민주주의’, 라울 프레비쉬와 같은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 담당 UN 경제위원회(CEPAL) 경제학자들이 주장했다. 이들도 해방신학자들처럼 신(新)자유주의와 신(新)보수주의와는 선을 그었으나 종속이론가들로부터는 “Desarrollist(발육주의자(發育主義者), 스페인어 desarrollar는 ‘발육, 진보, 발달시키다’의 뜻이 있음)”들이라는 비판의 소리를 들었다.

Steffen Flechsig에 따르면 그 자체로는 옳았던 CEPAL의 발전 모델이 1964년 브라질 쿠데타 이후,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1973년 이후 우익(右翼) 정권의 정치체제하에서는 실패했다. 이들은 1960년대의 개혁성공에 역행하려 남미대륙을 폭력지향적 신(新)자유주의 엘리트들의 폭력정치 훈련장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인 경제학자 빅토르는 신(新)자유주의에로의 이행(移行)을 라틴아메리카에 국한 된 과정이 아니라 전세계적 현상으로 보았다. 이 전세계적인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사회학자요 종교 사회주의자인 칼 폴라니가 이미 1930년대에 ‘세계 시스템 평가’ 구축(構築)에 힘을 더했다. 한편 종속론은 너무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에만 맞춰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이론이 무슬림 세계와 아시아의 상황과, 유럽과 북미(北美)에서 증대되고 있는 불평등과 빈곤화를 너무 적게 다뤘다는 것이다. 종속론은 다시금 세계시스템론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그 비판에 대응했다.

이반 페트렐라에 의하면 해방신학은, 다른 사회운동들과 연합하기 위해, 성차별주의나 환경오염과 같은 문제들과 더 강력히 대결해야 한다.

Verhältnis zum Judentum
유대교와의 관계

 
1945년 이후의 유럽 신학의 경우와 달리 1990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해방신학자들에게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가 논제가 되지 못했다. 역사비평적 성경연구와, 유대교 신학자들과의 대화에서 획득한 해석학적 통찰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뒤늦게 받아들여졌다. 성경 본문을 실제로 억압당하는 자들의 눈으로 읽고 그들의 삶의 세계에 직접적으로 관련시키는 해석학적 원칙에 근거하여, 한편으론 성경 전승이 창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한편으론 이때 사람들이 본문생성의 상황을, 그리고 그것과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자주 무시했다. 동시에 옛 유럽 신학으로부터 나온 경솔한 반(反)유대주의적 고정관념도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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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인(人) 칼로스 메스터스는 1973년에 신약성경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예수님의 공동 대적자들이고 또한 빈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종교체제 지지자들이라 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억압적 지배권을 종교적으로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율법해석으로 “생명을 교살(絞殺)했다”. 그들이 토라(하나님 말씀)의 문자적(글자 뜻 그대로의) 준수를 가르쳤고, 인간이 만든 착취체제를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1970년부터 메스터스는 유대교 주요 구성원들을, 교권을 차지한 자들을 지원하고 정당화한 라틴아메리카 군사독재국가들의 “국가안보” 지지자들에 비유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60년대까지의 독일 신학에서 만들어낸 바리새인 희화(戱畵)를 그렸다: 사실 이 민중에 친근한 평신도운동은 이미 예수님 이전에 유연한 상황적응적 토라해석을 했다.

1986년 메스터스는 십계명과 토라의 사회규범을, 빈자들을 법(法)과 정의로 현재의 억압에서 확고히 해방하시기를 원하시는 편애적 하나님과의 연대(連帶) 가운데, “노예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길로 평가했다. 결의론적, 문자주의적 토라해석은 역사적으로 실패했고, 예수께서는 빈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고, 이로써 그들에게 미래의 세계를 열어주셨다고 그는 말한다. 메스터스는 이것을 당시 브라질에서 있었던, 국민의 참여 가운데 새로운 법치국가 헌법을 만들려는 시도와 관련시킨다.

1992년 헤르만 브란트는 이 성경해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기초공동체가 십계명과 율법규정들을 횡령한 대가(代價)는 바로 이스라엘의 사실상의 상속권 박탈이다.”

이에 비해 (ÖRK?) 아프리카계 미국 흑인(黑人)인 해방신학 옹호자 필립 포터는 시오니즘을 유태인들의 억압과 인종차별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시오니즘을 인종주의와 동일시했던, 1975년 11월 10일의 UN 총회 결의 3379에 반대했다. 요즘 해방신학자들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신학자들과 사회학자들과 대화를 한다.

Vertreter
해방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