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신학(Old Testament Theology)
침례신학대학
“구약신학”(엄원식교수 강의)
구약신학이란 무엇인가?
구약성서는 어느 한 개념이나 사상으로 묶어서 말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내용이 아니다. 구약 39권의 책들을 총망라해서 그 신학사상의 중심이나 통일성을 밝혀내어 이것을 구약신학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1. 구약신학의 주제
1) 필립 가블러(J. Phillipp Gabler)는 1787에 교의학과 다른 성서신학이 필요하다고 보고 성서신학을 교의학에서 처음으로 분리시켰다. 가블러에 있어서 “구약신학의 과제”는 한 저자가 아닌 여러 저자에 의해 쓰여진 구약의 생각과 개념들을 조심스럽게 모아서 잘 정리하고 비교하는 것이다.
# 구약신학은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전해주는 역사적인 성격을 가졌다. 그러나 조직신학은 특별한 신학자가 자신의 능력과 전통과 교육과 철학적인 전제 등에 따라 하나님에 대해 연구한 것을 가르치는 교육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하였다.
2) G. 웰레(G. Oehler)는 1873년에 “구약신학”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종교사로서 저술하였다.
3) C. 슈토이엘나겔(C. Steuernagel)은 “구약신학”을 구약종교사에서 풀어놓아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4) 아이스펠트(Eissfeldt)는 1926년에 구약의 종교연구는 다른 종교들처럼 역사적인 연구 방법만으로는 불가능하므로 구약의 “계시성”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5) O. 프록취(Otto Procksch)는 구약에는 영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영의 세계를 깨달은 것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역사를 고찰하려면 “믿음이라는 기관” 이 있어야 한다.
6) E. 젤린(E. Sellin)은 1933년 “구약신학”을 저술하였는데, 종교사의 기초 위에서 구약신학을 논하였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종교가 형성되고 성장해 온 과정을 기술하였다.
7) W. 아이히롯트(W. Eischrodt)는 1933년에 “구약신학”을 저술하였는데, “하나님과 민족, 세계, 사람”의 세 주제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계약사상”을 구약신학의 중심으로 보았으며 이 의견에 찬동하는 사람은 R. 스멘트(Rudolf Smend), J. B. 페인(J. B. Payne)등이 있다.
카톨릭 신학자 A. 쇠켈(Alonso Schockel)은 아이히롯트의 신학이 계약을 강조하는 것 때문에 다른 모든 구약신학보다 월등한 자리를 차지했다고 하면서도, 계약이 구약 신학을 통일하는 힘을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구약에서 죄는 계약을 깨뜨리는 일이요, 용서는 하나님 편에서 보증해 주신 계약의 갱신인데, 죄와 용서는 결국 계약과는 유리되어 있다고 하였다(1962).
8) C. 프리젠(Th. C. Vriezen)은 1956년에 “구약신학 개요”를 냈는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교제”를 구약신학의 중심으로 보았다.
9) G. A. F. 나이트(G. A. F Knight)와 앞에서 언급한 O. 프록취(Otto Procksch)는 “기독론적 입장”에서, R. 스멘트(Rudolf Smend)는 “계약형식”에, 그리고 A. B. 데이비드슨 (Davidson)과 존 브라이트(John Bright)는 “하나님의 나라”에 W. G. 라이트(Wright)와 폰 라드(G. von Rad)는 “신앙고백”에, G. 포러(G. Fohrer)는 “하나님의 통치와 신인 사이의 교제”에 J. 벨하우젠(J. Wellhausen)은 “이스라엘의 종교사”에, 딜만(Dillmann)은 “구약의 종교학”에 그 중심을 두었으며, S. 헤르만(S. Hermann)은 “구약신학은 신명기가 보여주는 표준”에서 자체를 방향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구약신학”은 성서신학의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속성(屬性) 및 그의 구속적 활동과 이에 응답하던 사람들의 일들을 성서에 기록된 대로 밝혀내는데 있다. “역사신학”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땅 위에 선 이후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계속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응답을 밝혀주는 것이다. “조직신학”은 성서신학과 역사신학이 밝혀주는 내용에 비추어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일하시는 원리를 밝히고 이를 논리 정연하게 풀어놓음으로써 복잡한 세대 속에 사는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주는데 있다. “실천신학”은 이렇게 이해된 하나님의 뜻이 현대인의 생활에 옮겨지도록 돕는 학문분야이다.
구약신학의 기능은 구약의 종교를 이해하게 하고 인간의 생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말씀들을 발견하게 한다. ①구약신학은 구약학을 위한 기초이다. 구약신학의 최대 기능 중 하나는 신약이 자라난 “思想의 世界”(the thougth-world)를 설명하는 것이다. 신약이 전제하고 있는 구약사상 형식들(thougth-forms)에 대한 지식 없이는 신약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의 교리는 구약의 사상과 신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구약신학은 역사신학의 출발점이다. 역사의 의미 즉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들의 의미에 대한 관심은 구약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중의 하나이다. ③성서신학(구약, 신약신학)은 조직신학의 기초자료와 표준을 제공한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항상 성서신학의 비판을 받아야 한다. ④성서신학은 목회자의 신앙수련을 위한 수단이 되며 그의 설교자료를 제공해준다.
2. 구약의 창조신학
“창조”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기존의 물질을 사용함이 없이 만드신 것을 의미한다. 고대 철학이나 이방 종교에서도 우주의 기원을 말하지만 그것은 창조론이 아니다. 그들은 ①신과 물질을 모두 영원한 것으로 보는 이원론이거나 ②물질이 신에게서 유출되었다거나 또는 ③물질의 진화론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기사는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이다. 창조란 히브리어 동사 바라(ארב-창조하다)로 가만히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관련된 것”이다. 창조하시는 주체인 하나님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히브리어로 야훼(הוהי-YHWH)란 단어 자체가 “쉴새없이 무엇이 되어가는자”라는 동사에 온 명사이다.
1)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던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사상은 신구약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가 있다(창1:1-2:25, 요1:3, 시33편; 104편, 욥30장, 마19: 4-6, 눅11:50, 행17:24-26, 엡1:4, 골1:16, 딤전2:13, 히1:2; 4:3-4, 벧전1:2).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이 창조되었다(창세기1:26-28). 인간은 ①하나님의 대화 상대자로 ②실존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③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④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 신학은 인간학을 잘해야 한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정말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본분을 깨닫고 사명을 알고 자기 한계를 알고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구약의 인간: ①그 어떤 인간이라도 다 부족함과 약점이 있다(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솔로몬). ②인간이 경건하게 살아도 뜻하지 않은 재난이 찾아온다(욥기). 인간은 다 남모르는 슬픔이 있다. 욥의 눈물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목회는 인간을 알고 인간(성도)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사랑하면 성공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해서 이 세상을 인간에게 주셨다. 인간이 없으면 이 세상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목회란 말씀을 가지고 창조해 내는 것이다. 매시간 설교하는 것은 창조하기 위해서이다. 설교를 통해 죄용서 받고, 구원받고, 은혜받고, 성숙되고, 변화된다(고후5:17).목회자의 말은 힘있는 말이다. 구속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하라.
2) 창조는 움직이는 것이다: 창세기 1장과 2장 비교
1-4째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창조(히브리어 낱말 207개)
5-안식: 움직이는 것을 창조(히브리어 낱말 206개)
창세기의 창조신학은 움직이는 것이다. 창조는 물위에서 하나님의 신이 움직여 나갔다(창1:2).
①빛 ④해, 달, 별
②궁창 ⑤새, 물고기
③바다, 땅, 식물 ⑥짐승, 사람
⑦안식
# 목회란 장소, 위치, 빈 공간을 만들고 그 장소에 필요한 자를 채워넣어야 한다.
1-3째날: 공간, 자리를 만들었다.
4-6째날: 채워서 제자리로 넣었다.
목회자는 누구든지 일할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집사, 성도들을 정확한 제자리, 적절한 자리에 놓아야 한다. 이 세상 만사가 다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왜 문제가 생기는가? 제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다. 목회는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 왜 움직입니까? 안식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쉬기 위해서다. 편하다고 행복과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하면서 땀을 흘려야 의미가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할머니가 등에 돌을 지고 다니면 무겁다. 그러나 손자를 업고 다니면 무겁지 않고 즐겁다.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의미를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1장: 식물-동물-인간 2장: 아담-식물-동물-여자
하나님 중심으로 묘사 인간 중심으로 묘사
엘로힘: 34회 엘로힘: 10회
아 담: 2회 아 담: 16회
여 자: 1회 여 자: 2회
남 자: 2회
# 창조의 목표는 인간이었다. 인간을 위해 이 세상을 주셨다. 하나님은 인간 삶의 장소로서 아름다운 동산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다(창1:28). 하나님은 아담의 뼈를 취하여 아내 하와를 창조하셨다. 왜냐하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였기(창2:18)”때문이다.
3) 창조의 절정은 안식이다.
안식일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부록이 아니다. 안식일은 육신이 쉬고 영혼이 복받는 날이다. 주일날 기쁨을 찾으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열심히 일한자는 주일이 귀하다. 주일은 축제의 날로 만들어야 한다. 교회가 주일날 예배를 축제의 날로 만들지 못하면 실패하는 것이다.
3. 히브리 민족의 기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었지만 히브리인과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에돔족속(에서)도 히브리인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다 히브리인이 아니다. 히브리인이라도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1) 근동세계의 주어진 사회체제의 밖에 있던 Habiru(하비루)들이다.
Habiru(하비루), Hapiru(하피루), Apiru(아피루)는 Hebrews(히브리)와 같은 이름의 뜻이다. 단지 지역에 따라 이름이 다르게 불려졌다.
구약에서 히브리(하비루)라는 말이 쓰여졌을 때는 아주 딱한 상황이었으며, 나쁜 형편에서 낮추어서 부를 때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이 위협을 받을 때(창14:13), 요셉이 감옥에 갈 때(창39:14), 모세가 강에 버려졌을 때(출2:6), 애굽 종살이 때 매맞은 일꾼(출2:11),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갈 때(욘1:9) 히브리인이라고 쓰여졌다.
일반적으로 ①이스라엘 나라 전: 히브리인 ②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민족 ③나라 후: 이스라엘로 불렀다. 하비루는 종족의 이름이 아니라 최하위 계층의 이름이다. 히브리인(하비루)으로 쓰여진 것은 범법자, 배반자, 음모자, 습격자, 약탈자, 이주자, 용병, 농노, 지배적인 질서밖에 사는 자들, 체제 밖의 사람들, 체제를 위협하는 사람들, 강도, 역적, 부랑배들, 술주정꾼, 사기꾼 등이다. 삼무엘상 22:2-다윗이 아둘람굴로 도망할 때 다윗에게 몰려온 자들(하비루)이 다 문제 있고 나쁜 자들이었다. 다윗 자신도 그런 문제가 있는 자였다.
# 그러나 유명하게 될 사람에게는 사람이 몰려든다.
2) 신명기 26:5-히브리인은 유리하는 아람인(정착지가 없었던 이주민)이었다.
# 당시 아람어는 국제어로 쓰였고 히브리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예수님도 아람어를 사용했다.
3) 히브리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보통 교회에서는 히브리인의 족장은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은 “무리들의 아버지”란 뜻이다.
4) 창세기 10:21 에벨이 히브리인의 조상이다. 에벨은 셈의 자손으로 셀라의 아들이다. 에벨과 히브리는 단어가 거의 같다. 역대상 1:17-27의 족보는 에벨을 히브리인의 조상으로 말하고 있다.
5) 출애굽사건을 통해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4. 가나안의 바알신앙
가나안의 족속들은 다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엘(EL)은 그들의 “아버지 황소” 혹은 창조주로 호칭하는 가장 높은 신이었다. 그 신의 아내가 바로 아세라며 그 자녀들 가운데 장자가 “주”라 뜻을 가진 바알(Baal)신이다(왕상18:19). 바알은 전쟁을 승리를 이끌며 하늘과 땅, 그리고 생식력을 관장하는 신들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이 바알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패와 타락으로 이끌어간 장본인이었다.
1) 가나안의 바알종교
①바알의 기원: 가나안 종교의 본질과 바알종교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실마리는 고대 애굽의 문서, 페니키아 기록 및 헬라의 문학으로부터 수집된 자료 등이다. 바알종교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된 것은 1992년 이후 발굴된 우가릿문서를 통해서이다. 고고학자들이 우가릿에서 B. C 15~14세기의 토판과 당시의 신전을 발굴해 내었는데 그 신전들이 바알신을 위해 건축된 것이었고 그곳에서 바알신의 작은 동상들을 몇 개 찾아내었다.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바알신앙의 기원 살펴볼 수 있다. 우가릿 문서에 의하면 가나안의 신들 중에 최고의 신은 엘(EL)로서 우가릿 본문에서 “왕,” “만물의 창조자”등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신화에서는 별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비실제적인 통치자이었으며 막연한 숭배의 대상인 반면 우가릿 문서에 나타난 실제적인 왕은 바알이었다. 그는 “땅의 주인,” “구름을 타는 자”등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엘신과 엘신의 배우자 아세라(바다의 여신이라는 뜻)사이에서 난잡한 성생활을 통해 태어난 70명의 엘림(Elim)으로 된 가정의 신들 중에 장자의 신으로 나타난다.
②바알의 위치: 바알은 비록 엘신의 아들 중 장자요 그의 후계자로서 소개되고 있지만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에서 모든 가나안의 신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군림해 있었다. 그러므로 가나안 인들은 바알은 하늘의 주라고 섬겼고 하늘의 비와 땅의 폭풍을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했다. 가나안생활은 폭풍과 비와 가뭄과 풍요를 중요시했기에 이러한 기후를 직접 관장하는 신으로 섬겨졌던 바알의 위치는 그 당시 가나안의 어떠한 신들보다 우선적으로 중요시되어 섬겨졌던 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③바알의 종교제의: 바알신화에서는 비는 남자의 정액이며 이로 인해 여신인 땅은 성장과 발육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았다. 가나안 바알종교는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서 자연이 순환하는 것을 두 신의 교접으로 이해하였고 하늘과 땅의 상징인 두 신의 교접은 구체적으로 왕이 신전 창녀와 함께 관계를 가짐으로 신의 행동에 교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2) 바알종교가 이스라엘에 끼친 영향
①종교적인 타협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리하던 유목민족이었다. 이들은 한 곳에서 오랜 역사를 걸치면서 정착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들의 하나님은 전쟁을 주도하시는 전쟁의 하나님이고, 동시에 광야의 하나님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가나안땅에 정착하자 농사를 짓게 되었고, 이미 거주하던 원주민의 농사방법을 보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바알종교를 통해 자연의 세력을 지배하여 풍성한 수확을 보장받고자 했다. 이와 같이 바알종교는 농부들에게 실용적인 종교였다. 이러한 것을 목격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군사적인 위기가 있을 때는 자신들이 섬기던 군대의 하나님이신 야훼를 의지하고, 농사를 지을 때는 바알을 의지하려 했다. 즉, 야훼와 바알을 번갈아 가며 섬긴 것이다.
②이스라엘 문화가 가나안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가나안은 높은 수준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할 때 가나안 문화에 매료되어 그들의 생활 양식을 대거 채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증거로는 이스라엘의 부족동맹이 가나안 문화의 중심지인 세겜에서 결성되었고, 모세 이전부터 “이방의 신들”을 섬기던 개종자들을 맞아들였다는 사실이다.
③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의 원주민을 모두 쫓아 낼 것을 명령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죄의 잔재를 남기고 결국 거기에 빠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호세아서에 보면 바알이라는 죄가 묻어 버린 이스라엘과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음란한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있었다. 첫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로 그 의미는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이라”는 뜻이다(호1:4). 그 다음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로 의미는 “이스라엘을 사하지 않겠다”는 뜻이고(호1:6), 둘째 아들의 이름을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하리라”라는 의미의 로암미라고 지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사랑의 손을 내밀으시고 사사,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에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끝까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은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파국적인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④종교적인 타락과 삶으로의 바알 종교의 침투이다. 매춘, 성적 타락, 동성애 등의 난잡한 음란이 야기된다. 바알 종교는 신들의 성적인 관계를 통해 절정에 이른다. 바로 이러한 신의 결합을 본받아 이스라엘도 난잡한 음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호세아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들의 이름에 바알이라는 단어를 첨가하므로 복을 얻고자 한 것이다. 예를 들면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삿7:1). 이것의 의미는 “바알이여! 싸우소서”이다. 또한 역대기상 8장 33, 34절에서 보듯이 사울의 아들 이름이 “에스바알”이고, 요나단의 아들인 “므립바알”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생활에 얼마나 바알종교가 깊숙이 침투했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기복신앙은 형식과 물질우선주의, 그리고 제사 중심적인 이스라엘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나안의 바알종교, 바알신앙은 물질적인 풍요를 바라는 가나안인들에게 폭넓게 숭배되었고 절대시되었다. 바알신앙은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가나안 주민의 소망이었고, 신앙이었기에 자연히 물질이 우선된 신앙이었고 그 이상 더 바람이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였다. 고상한 인격형성을 바라는 것도 없고 현실생활에서 고차원적인 윤리생활로 내세의 소망도 연관되지 않은 오로지 물질적 풍요와 다산에만 얽매인 종교였음을 알 수 있다.
5. 야훼신앙의 기원
6. 출애굽 사건이해
출애굽은 하나님이 이루신 해방과 구속의 역사로서 개인의 깨달음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원경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체험은 가나안 주변 종족과는 달리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 체험을 통해 야훼신앙은 역사종교 또는 계시종교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의 한 복판에 있으며 명확한 구속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신앙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역사적 체험에 근거한 “고백된 역사”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1, 신5:6; 6:21; 26:7-8, 삼상12:8, 시81:10).
1) 애굽의 사회상황과 출애굽
이집트는 전제 군주를 중심으로 종교, 사법, 군사를 포함하는 모든 것을 군주가 장악하고 현실적인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농민은 단순한 점유자로 노예가 되었다. 이와 같은 전제 군주제에 의한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로는 스스로를 신격화(神格化)하였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사회에서 최하위의 위치에 속하였다. 그들은 학대를 받으며 흙이기와 벽돌 굽기, 그리고 농사의 고역을 하였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조건이 출애굽의 동기를 형성했다. 즉 불의와 압제를 유발하는 사회 경제 구조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셔서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오시고 불의한 사회경제 체제에서 인간을 해방시켰다.
사회의 압박 상황보다도 본질적인 악은 곧 백성들이 왕에게 속해 있다는 것이다. 야훼께서 친히 신의 아들로 불리는 파라오와 대결함으로써 애굽 신들의 무력함과 이 세상이 야훼의 권능 속에 있음과 야훼만이 참 신인 것을 나타내셨다.
야훼 이름이 갖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초월성과 내재성이다. 즉 야훼라는 이름은 하나님 자신 일부를 가리우신다는 면이 있고, 하나님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는 측면이 있다. 하나님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셨다는 것은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며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출애굽 사건의 의의
①출애굽기 14:6-15:21에 나타나고 있는 전쟁 용사로서의 야훼 신앙은 유일한 왕으로서 야훼의 절대 주권 선포와 그의 주권에 대한 이스라엘의 절대적 신뢰와 신앙을 요구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분명 야훼는 역사적 구원을 창조해 가는 역사의 신이고 동시에 죄악된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시는(incarnate) 신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억압자로부터 피 억압자를 지키고 건져내기 위하여 전쟁하려고 일어서는 용사다. 거룩한 전쟁은 거룩한 평화에 이르기 위하여 거기서부터 발전해나가는 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②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억눌리고 소외 받은 그 고난 경험의 공통성이 이스라엘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가인이 흘린 아벨의 피의 “부르짖음”에 대한 야훼의 응답으로부터 가장 후대 역사 신조인 느헤미야 9:6-38의 신앙고백에 이르기까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스라엘 해방사의 전 역사는 “부르짖음-해방”이라는 역사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러므로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본질상 지배개념과 대결하려는 해방 이념적 동기를 갖고 있다. 출애굽기 15:11, 13은 야훼의 유일한 역사적 주권과 야훼의 해방의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 목회자는 사람들의 고난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말해주어야 한다. 고난을 통한 삶의 의미를 말해주어야 한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목회자는 설교에서 껍질로 나아온 사람들에게 생명과 의미를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③출애굽 사건은 야훼만이 유일한 신이며,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宣布)하는 행위였다. 우상의 땅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그들과 밀접한 교제(交際), 즉 야훼의 통치를 경험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세상을 구원(해방)하시려는 하나님의 계시였다. 후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고통과 감격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 조상의 체험(體驗)을 물려받으면서 그것을 자신들의 체험으로 동일화시킨 것이다. 때문에 출애굽 사건은 구약성서 전체를 지렛대로 쳐들 수 있는 받침대로서 중요한 주제이다.
# 모세(물에서 건져낸 자)- 애굽(이집트)에서 출생- 미디안 광야(이드로를 만남)- 다시 애굽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 홍해- 광야 사막- 시내산
모세는 민족의 수난 절정기에 태어났다. 모세가 위대한 것은 사명이 컸기 때문이다. 인간은 옷이 날개가 아니라 사명이 진짜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의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모세의 생애: a. 40년- 나는 누구인가를 깨달았다. 호위 호식, 최고의 학문을 배움(행7:22). 자기자신은 동족과 신분이 다른 줄로 알았다. 자기 동족의 학대, 고통, 울분을 보고 애굽사람을 죽임(출 2:12).
b. 40년-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이전의 자기 지식, 신분, 지위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c. 40년- 자기 동족을 위한 삶을 살았다. 목회자는 죽어 있는 영혼들을 살리는 자들이다.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는 자들이다. 많이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은 준비한 만큼 우리를 사용하신다.
7. 시내산 계약사상
시내산계약은 구약의 중심계약으로서 쌍무계약(If-Them), 또는 조건부계약이라고도 한다. 시내산 계약의 체결기사는 출애굽기 19-24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는데 19장 5-6절은 그 특징이 잘 요약되어 있다. 시내산 계약의 표는 십계명이다. 그리고 시내산계약의 근본정신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1)는 말씀 위에서 자유, 평등, 정의의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있다.
시내산 계약의 특징은 ①모세를 통하여 체결된 계약에는 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②이 계약관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알게 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무엇을 약속하는가를 알게 하고 있다. ③사람으로 하여금 이 계약을 지킴으로 그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알게 했다. ④개인과 공동체의 의무는 다만 야훼 하나님에 대한 부동의 신앙을 가지는 것이다. ⑤이 계약은 종교적 신앙과 민족관을 밀착시킨 것이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애굽근성, 노예근성을 싫어하셨다(출14: 10-12; 16: 2-3; 17:3). 왜냐하면 하나님이 해방하셨기 때문이다. 조금만 어려워도 참지 못하고 애굽으로 과거로 돌아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시내산 계약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샬롬왕국(평화의 나라)을 이룩하기 위해서이다. 샬롬의 나라는 전쟁, 병든 자, 억눌린 자, 소외된 자, 억울한 자가 없는 모든 것이 완전하고 완벽한 나라이다. 바로 자유, 평등, 정의가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이스라엘 국가의 이상은 바로 자유, 평등, 정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평등, 인간평등, 경제평등을 이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샬롬의 나라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해방사회와 평등사회를 이루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종이 되는 것을 싫어하신다. 안식년과 희년제도는 백성들이 종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제도이다. 이스라엘의 땅은 팔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다. 빚을 지고 갚지 못했을 경우에 주인은 다음 안식년까지 그 사람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으며, 다음 안식년이 되면 다시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 모세의 법은 철저히 노예가 되는 것을 막고 있다.
# 샬롬국가는 인간 우상이 없는 하나님이 주인으로 왕노릇하는 나라이다. 사람은 신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짐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교회는 제일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의 말을 듣을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의 뜻이 받아들여지는 곳이 되어야 한다.
# 우리의 목회는 자유, 평등, 정의를 중심으로 해야한다. 하나님을 무기 삼아 성도들을 위협하면 안 된다. 그들의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가정에서도 왕으로 군림하려고 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 목회자는 교회에서 왕이나 주인이 아니다. 섬기는 자요 종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공의, 심판)이다.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예수그리스도)이다. 대조가 되지만 똑같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분리하면 안 된다.
8. 구약의 제사와 절기
고대 메소포타미아 세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회였다. 제사는 국가를 이루고 있는 이 세계가 유지되기 위하여 신들을 지지하는 행위이며 신과 세계와 인간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이 국가적인 제사 외에 각 구성원이 각각 자기의 개인적인 신에게 바치는 제사가 있었다. 이 신에게 바치는 제사는 특히 비탄에 빠지고 질병으로 고통 당할 때, 신들의 분노가 나타났을 때, 신의 호감을 사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약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사 제도란 그 사회의 온전함의 정도와 그 사회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제사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유지하고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제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계약에서 제도화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를 통합하는 수단으로 존재하며, 속죄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제사가 야훼를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며, 죄악을 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구약의 제사
성전에서 행해지던 제사는 초기의 삭막이나 정식 성전 이전의 성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대개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즉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예물이 있었고,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기 위해 드려졌던 것이 있었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해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 셋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기보다는 모든 제사에 이 세 가지 측면이 다 들어있었다.
①번제(레1:4)
번제는 구약 제사의 전형적인 표본으로, 증여적(贈與的)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무엇인가가 예배자를 위하여 그리고 예배자를 대신해서 여호와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사는 특히 야훼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드려지는 것이다. 이것은 경외심을 표하는 제사였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감사의 표시로 혹은 개인적인 경건의 표시로 드리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제사 형태가 경건의 한 표현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제사를 기쁘게 열납하시며 이 제사들은 하나님과 신실한 인간 사이에 놓여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새롭게 해준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은 아무나 아무 때나 번제를 위하여 제사장들에게 제물을 가져올 수 있었고(1:3-17), 성전과 성막에서는 아침저녁 각각 한 마리씩 매일 두 마리의 어린양이 이렇게 번제로 드려졌다. 또한 매년 열리는 세 종류의 순례 축제의 특별 행사이기도 했다.
②화목제(레7:11-18)
화목제는 공동의 교제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였다. 동물은 소나 양이나 염소의 암컷이나 수컷이나 다 되었고 제사의 과정도 어느 정도는 번제와 같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동물의 몸 중에서 일부, 주로 기름만이 불에 태워졌다. 동물의 두 부분은 제사장들에게 돌려졌고 나머지는 받치는 자와 그 가족들과 친구들이 연회에 함께 먹었다. 그러므로 화목제는 축제와 기쁨의 시간이었다(삼상11:15; 삼하6:18-19).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들 서로간의 교제를 표현하는 제사였다.
③속죄제와 속건제(레4:1-6:7)
하나님과의 화해나 속죄의 본질이 담겨있는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이다. 이 둘의 구분은 확실하지 않다. 양자에 공통적으로 중요한 특징은 동물의 피가 사용된다는 것이다. 번제와 화목제에서는 제사장들이 피를 그냥 단 사면에 뿌리기만 했었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에서는 대제사장이나 혹은 온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피가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일부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 앞에 뿌려졌고, 일부는 분향단의 “뿔”에 발라졌으며,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도록 되어 있었다. 죄를 대속함에 있어서 피가 갖는 독특한 역할에 대해서는 레위기17:11에 잘 설명되어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속죄제는 매년 한번씩 있는 속죄일에도 행해졌다(레16장). 이것은 칠월 십일에 해당되는 날로써 대제사장이 온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절기였다. 대제사장은 먼저 자신과 제사장들을 위해 수소 한 마리를 잡아 제물로 드린 뒤에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언약궤의 덮개(속죄소 혹은 시은좌)위에 뿌렸다. 그리고 두 마리의 염소 가운데 한 마리를 잡아 똑같은 방식으로 그 피를 뿌렸다. 이 날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년 중 유일한 날이었다. 나머지 한 마리 염소는 그 위에 모든 죄를 고한 다음에 광야로 데리고 가 거기에 놓았다. 이것이 바로 “속죄 염소”였는데 그것의 상징적인 역할은 모든 불의를 지고 죽음으로 가는 것이었다(16:22).
2) 구약의 절기
하나님께서는 일 년 중의 몇몇 기간은 축제와 종교적인 기쁨의 날로 제정하였다. 절기는 야훼와 백성의 교제 및 거룩한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도화된 것이다. 또한 모든 일상의 일들로부터 벗어나 안식을 누리는 시간이었으며, “성회”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일이 함께 어우러지던 시간이었다(레23:36, 40). 모든 사람들이 다 참여하였고 또 모든 가족들이 중앙 성소에 다 나아갔기 때문에 이런 절기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소속감을 강화시켜 주었으며, 추수를 주시는 하나님의 후하니 축복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하신 행사들을 함께 연결시켜서 기념케 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는 몇 가지 두드러지는 절기들이 있었다. 매주 지키는 안식일이 있었고(출20:11, 23:12; 신5:15), 매월 지키는 “월삭”이라는 절기가 있었다(민10:10; 28:11-15). 칠월(농경 월력에서 한 해가 시작되는 달)은 나팔절로 시작되어(민29:1-6) 십일의 속죄일로 이어졌다(29:7-11; 레16:29-34). 그로부터 5일후에는 다시 초막절이 있었다. 이 모든 절기들에는 안식일만 제외하고는 따로 특별한 제사를 드렸으며, 안식일에는 매일 성전에서 드리는 번제를 두 배로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일년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시기는 세 가지의 거대한 순례 절기였다(출23:14-17; 신16:16-17). 이 때에는 모든 남자들은 다 중앙 성소까지 순례를 떠나도록 되어 있었다. 규정에는 이 거대한 순례 절기들에 모든, 남자만 “여호와께 보이되”라고 되어 있지만, 아이들, 종들, 과부들, 고아들, 심지어는 영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까지 모든 사람들이 다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다(신16:11,14)
①유월절과 무교절(출12:1-20; 레23:4-14; 민28:16-25; 신16:1-6)
이 두 절기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유목민으로서의 측면과 농경민으로서의 측면이 둘다 반영되어 있다. 이 절기는 봄의 아빕월 14일에 시작되어 1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유월절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출애굽 사건에서 출발된 관계를 기념하는 특별한 형태의 친교 예물 행사였다. 백성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입었던 것과 똑같은 모습의 복장을 하고 마치 긴 여행을 떠날 듯이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유월절 식사를 하였다.”
구약시기의 초기에 지켜진 유월절은 양은 가정에서 잡았고 그 피는 문설주에 발랐다. 그 당시의 희생동물은 친교식사를 위해서 구운 어린양이었다. 유월절은 나중에 국가행사로 전진되어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거행되었으며 화려한 대규모의 예배 절차가 수반되었다. 이 의식은 환경에 맞도록 조정되었다. 그래서 양과 다른 가축들을 희생동물로 사용할 수 있었고 굽지 않고 끓여서 먹을 수 있었다. 또한 의식상 부정케 되어 유월절을 당일에 못 지키는 자들은 한달 이후에 별도 축제를 열 수 있게 하는 사후조치도 마련되었다.
한편, 신약 시대에 와서 유월절은 가정의 요소와 국가행사의 요소가 결합된 하나의 연합축제로 발전되었다. 그래서 희생동물은 성전에서 잡고 친교식사는 가정에서 가졌다.
무교절은 보리수확과 첫 열매의 예물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축제는 유월절과 같은 시기에 지켜졌고 이 두 축제가 밀착되어 출애굽을 기념했다.
②칠칠절(민28:26-31, 신16:9-12)
이것은 무교절 동안 보리 이삭 단을 드린 지(레23:10) 오십일 후에 지키던 절기였는데 그래서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행2:1). 오순절의 특징은 동물제사 뿐 아니라 곡물과 떡을 같이 드리는데 있었으며 이 절기는 곡물추수에 대한 감사절이었다(출23:16, 맥추절).
③초막절(민29;12-38, 신16:13-15)
이것은 때로 수장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출23:16). 이 절기는 열매의 추수를 다 바치는 것을 기념하는 가을 절기였으며, 속죄일로부터 5일후에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일주일동안을 나뭇가지로 지은 움막 안에서 살았다. 추수 때면 들판에 장막을 치고 거기서 지내던 것이 흔히 있는 일 이였는데 이 절기는 바로 그러한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절기에는 열매의 추수를 기념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한때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했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의미도 있었다(레23:43). 그러므로 이 절기의 목적은 추수의 축복뿐 아니라 영주할 수 있는 땅과 집을 주신 축복에 대해서도 더욱 깊은 감사를 느끼도록 해 주는데 있었다(신6:10-12).
④속죄일(레16장)
속죄일은 엄숙한 안식의 날이었다. 그날의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괴롭혀야”만 했고 모든 백성의 죄를 위해 속죄의 제사가 드려져야 했다. 이날은 회개와 희생제물이 있는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이날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 때문에” 그들과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속죄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갔던 것이다(레16:34).
⑤안식일(신5:12-15, 출23;12)
구약의 생활에서는 초기부터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안식일의 주된 강조점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기념하고 언약신앙에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국가의 뿌리를 확인하고 회상하는데 있었다. 이 때문에 안식일 준수가 십계명에 명시되었을 것은 당연하다. 안식일은 창조와 역사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기억케 하기 때문에 이날 전체를 특별히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쳤다. 이날은 또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있다는 점도 상기시켜 주었다. 안식일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회당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많은 금지사항들로 엄격히 규제된 날로 바뀌었지만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기쁨에 찬 기념일이었다.
구약의 제사와 절기들 속에는 이스라엘 종교의 중요한 성격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에 대한 강한 인식과 하나님이 거룩한 계약의 신이라는 인식, 그리고 개인과 백성 모두 죄에 사로잡혀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릴 위험에 계속해서 처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이스라엘 종교의 이러한 성격은 국가와 개인이 끊임없이 거룩한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의 교제를 유지하고 회복시키도록 하였던 것이다. 구약의 제사와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감사와 섬김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상기시켜 주었다는 것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
9. 오경의 저작권과 문서가설 비판
1) 문서가설의 이유
①신의 명칭이 다르다(엘로힘, 야훼, 엘벧엘, 엘베맅). 신의 이름이 다른 것은 문서가 다르다.
②왜 반복시키느냐(3,4번씩 중복되는 이야기)③왜 내용이 서로 상반(모순)되느냐(창 1장, 2장의 차이) 문서가설 학자들은 좀 설명이 어려운 것은 문서가 다르다고 피해간다.
2) 문서가설의 영향
①“종의 기원”을 쓴 챨스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았다. 진화론은 생물,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인문과학, 사회과학, 그리고 종교의 경전을 이해하는데 까지 영향을 미쳤다.
# 구전을 통해 이야기가 내려옴
②헤겔의 역사철학인 정, 반, 합에 영향을 받았다.
③르네상스 이후 이성주의,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모든 것은 머리로 이해되어야 받아들였다. 영적인 부분과 기적을 인정하지 않으며, 초자연적 계시를 부정한다.
# 신앙은 우리의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이끌어 가기 때문에 꼭 합리적이지는 않다.
3) 문서가설 비판
①신의 이름이 다른 것은 그 본문의 목적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모든 우주와 관련
여호와-계약백성
# 고대 근동 문학에는 신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등장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②반복과 중복은 강조의 의미가 있다.
# 근동문학은 독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청자를 위한 것이다. 듣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장로가 말씀을 전하다가 사람들이 오면 다시 하고 또오면 다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후에 올 때 간략하게 정리해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올 때 뒤집어서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정반대로 뒤집어서 이야기 할 때가 많이 있다.
③서로 내용이 모순되고 상이한 것은 삶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 썼기 때문이다.
④이야기의 절정에서는 고대 근동문학의 하나의 방법인 교차대구법을 썼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도 절정에서는 이 방법을 썼다. 이 방법은 흥분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며, 강조와 메시지를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이다. 메시지가 틀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틀릴 염려가 없다.
4) 모세가 오경의 저자라는 증거
①내적증거
②외적증거
10. 구약의 사사들
1) 사사의 명칭과 이름들
백성의 방백들이나 사사들은 학대하는 강한 족속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명을 가진 자들이었다(삿2:16). 그들은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신의 감동을 받은 “구원자들”(삿3:9)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보살피도록 권능을 받았다. 이들은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들이었다. 사사는 대개 대사사와 소사사로 나뉘는데, 소사사는 평상시에 종교적 제의 문제나 공동체의 법적 질서 유지 등을 관장하였고, 대사사는 일단 전쟁의 위험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야훼공동체를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막아 보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사의 이름으로는 웃니엘(3:7-11), 애훗(3:12-30), 삼갈(3:31), 드보라(4:1-5:31), 기드온(6:1-8:32), 돌라(10:1-2), 야일(10:3-5), 입다(10:6-12:15), 입산(12:8-10), 엘론(12:11-12), 압돈(12:13-15), 삼손(13:1-16:31)으로 12명이다.
2) 사사시대의 특징
이 시대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나안의 자연신을 숭배했다. 바알은 가나안 신들에 있어서 주도적인 신이었다. 아스다롯은 풍요의 신중의 하나였다. 가나안족속들은 바알신과 아스다롯 등이 인간과 짐승 및 농업에 있어서 풍요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이 시대의 특징은 전반적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배신, 그에 대한 진노로 일어나는 노예상태,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사사를 통한 구원의 순환적 과정이 그려져 있다(삿2:16-3:6).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의 원주민을 몰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대는 사사기 21:25에 기록된 대로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각 그 소견이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함과 같이 백성들이 다 자기 좋은 대로 움직이는 말하자면 무법시대요, 암흑시대인데 있다. 이때는 또 종교적으로도 위기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생활에 적응하면서 가나안 종교에 깊이 감염되기 시작한 때였다. 광야에서 유리하던 유목민이었던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와 농경민으로 정착하게 되자 농경 신이요, 소위 풍요의 신이라고 하는 바알과 아스다롯에게 유혹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상 숭배뿐만 아니라 가나안의 이방족속과의 잡혼도 성행되었던 때이다(삿3:5,6).
# 이들이 이렇게 타락한 이유가 무엇일까? 삿 2:7이하에 보면 그들은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고 했다. 그러나 “그 세대 사람도 다 열조에게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신 일도 알지 못하더라”고 기록이 있다. 가나안에 정착한 그들은 장로들이 살았을 때까지는 그래도 여호와의 종교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후 새 세대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 또 그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까지 들어왔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기적적으로 인도하셨는가 하는 그 일조차 몰랐다고 했다. 분명히 이것은 그들의 책임만이 아니라 전 세대의 장로들의 책임도 컸다고 본다. 말하자면 후대의 교육(신앙의 전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