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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실 박넝쿨과 니느웨 백성
2013-07-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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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박넝쿨과 니느웨 백성

배정훈/대전신학대학교
1. 본문의 범위와 문학적 구조
1) 본문의 범위
요나서 3:10-4:11은 요나서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니느웨를 향하여 심판을 선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다시스로 향하던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다가 큰 물고기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니느웨에서 심판을 선언했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였다. 3장 10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를 하고, 다시금 하나님도 더 이상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결심하는 모습이 담겨 있고 이후에 4:1-11은 이 결과에 대한 하나님과 요나의 서로 다른 반응을 보여주면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보여준다. 요나서의 마지막은 반응은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2) 문학적 구조
A. 니느웨 백성의 돌이킴과 하나님의 돌이키심 (3:10)
B. 요나의 반응과 하나님의 질문 (4:1-4)
1) 요나가 싫어하고 성냄 (4:1)
2) 요나의 기도 (4:2)
a.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한 이유 (4:2a)
b. 하나님의 속성 (4:2b)
3) 요나의 간청: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4:3)
4) 하나님의 대답: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4:4)
C. 박넝쿨에 대한 요나의 반응과 하나님의 질문 (4:5-9)
1) 요나가 초막을 짓고 그늘에 앉음 (4:5)
2) 하나님이 박넝쿨을 준비하심 (4:6a)
3) 요나가 박넝쿨을 기뻐함 (4:6b)
4) 하나님이 박넝쿨을 시들게 함 (4:7)
5)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심 (4:8a)
6) 요나가 죽기를 구함: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라 (4:8b).
7) 하나님의 질문: 네가 성냄이 합당하냐? (4:9a)
8) 요나의 대답: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라 (4:9b).
D.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 (4:10-11)
1) 요나가 박넝쿨을 아낌 (4:10)
2)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을 아낌 (4:11).

2. 본문의 분석적 관찰
A. 니느웨 백성의 돌이킴과 하나님의 돌이키심 (3:10)
요나서 1장부터 3장까지는 전형적인 예언자의 사역이 언급된다. 1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요나가 저항하다가, 바닷속에 던져지고, 2장에서 구원받고 감사기도를 드린다. 3장에서는 이제 회심한 요나가 니느웨를 향하고, 심판설교를 행한다. 요나가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니느웨 백성들은 회개한다. 왕은 사람이고 짐승이고 모두 금식하게 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린다. 전형적인 신명기 신학의 어조로 왕은 말한다: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요나서 3:8-9). 베옷을 입고 회개를 하며,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이 진노를 그치시기를 간구한다.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리려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리라고 기대한다.

3장 10절은 3장에 나타난 회개운동의 결과이다. 요나의 선포에 따른 백성들의 반응은 그들이 행한 악(하라아)으로부터 돌이켜 떠난 것인데 이것은 회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도 내리려던 재앙 (하라아)에 대하여 돌이키신다 (나캄). 이 본문에서는 전통적인 예언자의 사역과 회개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장 심판하지 않고 백성들이 예언자의 경고를 듣고 회개할 수 있는 기간을 주신다. 기간 안에 인간들이 자신들이 범한 악을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하나님도 계획 하였던 재앙으로부터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 반대로 말한다면 인간이 악으로부터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계획하였던 재앙을 내리신다는 의미이다.

B. 요나의 반응과 하나님의 질문 (4:1-4)
3장 10절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요나가 받은 사명은 완수하였으며, 니느웨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목표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의 구원이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 니느웨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돌리고 그들을 열방을 위한 중보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배표하는 요나와 하나님의 대결이 벌어진다. 니느웨 백성들에게 재앙이 내려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요나는 싫어하고 성을 낸다. 그가 처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도망한 이유가 비로소 드러난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요나서 4:2). 요나는 역사적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예언자로서 요나가 심판을 선포한 것은 니느웨 백성들이 듣지 않고 심판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할 때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을 수도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요나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침략을 일삼고 약탈해 온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여 재앙을 받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의 사역이 멸망을 위한 형식적인 선포라면 요나는 기꺼이 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선포로 인하여 잔혹한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에 이른다면 자신의 사역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니느웨로 가기를 거부하고 다시스를 향하여 달려 간 것이다.

요나가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기만 한다면 심판을 면하게 하는가? 그것은 역사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 때문이다. 요나서 4장 2절에 표현된 하나님의 속성은 출애굽기 34:6-7 과 요엘서 2:13에도 나오는데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약간씩 다르다. 세 구절에서 유사한 것은 모두 하나님을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라고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사용된 문맥은 서로 다르다.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대까지 용서하지만, 또한 죄를 멀리 하지 않는 자에게는 삼사대까지 보응하는 하나님임을 강조한다. 즉, 용서만이 아니라 죄를 견지하는 자를 향한 응보의 경고도 담고 있는 본문이다. 요엘서 2장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서술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요엘 2:13- 14 ). 요엘서의 문맥은 죄에 대한 회개의 촉구이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회개할 것을 요구한다. 회개를 전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은 회개한 자를 향하여 은혜를 베풀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요엘서 저자의 메시지는 하나님은 회개한 자를 향하여 재앙을 내리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러한 보편적인 속성이 자신들을 향하여 실현되기를 간구한다. 그러나 이 간구가 명령이나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형식으로서, 혹시 하나님이 마음과 뜻을 돌이켜서 그들을 회복시킬 것을 기대하고 있다.

요나서 4장 2절은 요엘서의 문맥을 따르고 있다. 앞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보편적인 속성을 서술한 후에 마지막으로 재앙을 내리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서술한다. 요엘서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이 회중들의 회개를 듣고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기쁨이었지만, 요나서에서는 기쁨이 아니라 죽기를 간구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속성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적용되어 그들이 회개하면 재앙을 내리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이 이방인을 향하여 같은 은혜를 베풀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요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가능하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죄를 지으면 멸망당하지만, 회개하고 돌이키면 자비하신 하나님이 재앙으로부터 돌이키신다.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역사 속에서 입증된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회개한다 할지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들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나의 생각과 다르시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요나의 질문은 하나님이 왜 악한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다루는가 하는 것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 이전부터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있었고 강권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회개하라고 선포까지 했지만, 그가 기다렸던 것은 이방인들의 구원이 아니라 그들의 멸망이었던 것이다. 요나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들을 향하여 재앙을 내리지 않고 그들을 구원하시자 요나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서 4:3).

왜 그가 죽기를 간구하였을까? 정말 죽기를 간구하였을까? 성경에는 죽기를 간구하였던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세벨을 피하여 달아나는 몸이 되었다. 그는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간구하였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왕상 19:4). 죽기를 구하는 그의 말은 실상 죽기를 원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취하려는 이세벨의 시도 앞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나님에게 자신의 생명을 취하라는 엘리야의 말은 오히려 그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사투를 벌이며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 싸움이 한 번의 승리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에너지가 고갈될 상황에 이르자, 한편으로는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발로였다. 죽기를 간구하는 마음은 오히려 살기를 간구하면서 자기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요 자기 연민이다.

죽기를 간구하는 요나의 반응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자신의 뜻을 그분의 뜻 앞에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꺾으려는 마지막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하여 화를 내는 요나에 대하여 하나님은 친히 대화를 시작한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4:4). 악한 인간을 단번에 처벌하지 않으시고,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요나를 설득하기 위하여 요나에게 작은 경험을 허락하신다.

C. 박넝쿨에 대한 요나의 반응과 하나님의 질문 (4:5-9)
4장 5절은 문맥적으로 3장 4절 다음에 위치하는 것이 어울린다는 견해가 있다. 3장 4절에서 요나는 성을 돌면서 심판을 선언한다. 3장 5절부터 10절까지는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결심하신다. 4장 1절에서 요나는 니느웨에 심판이 임하지 않기로 결정된 것을 알고 반응을 보인다. 그러므로 4장 5절에서 다시금 요나가 성읍이 어떻게 되는지 알기 위하여 초막의 그늘 아래 있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나가 3장 4절에서 심판을 선언한 직후에 4장 5절의 내용처럼 니느웨의 운명을 지켜보기 위하여 초막을 지었고, 그 초막에서 3장 5절부터 10절에 이르는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4장 5절에서 초막을 짓는 것은 3장 4절 이하에 어울리므로, 4장 5절의 내용은 대과거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4장 5절을 반드시 대과거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4장 6절부터 11절까지는 박넝쿨이라는 주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4장 5절도 이 위치가 합리적이다. 3장 10절에서 요나가 생각하기에 재앙이 내려야 할 때가 되도록 재앙이 내리지 않기 때문에, 4장 1-2절에서 요나는 불평한다. 하나님이 너의 성냄이 합당하냐고 묻자 요나는 대답하지 않고 니느웨의 멸망을 기다린다. 4장 5절은 하나님의 결정이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니느웨의 멸망을 기다리는 요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하나님과 대결하는 요나의 이기심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어서 하나님은 당신이 어째서 악한 이방인들을 구원하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요나에게 경험을 하게 하신다.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박넝쿨을 준비하셨다. 박넝쿨은 빨리 자라서 더운 곳에서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줄 정도로 잎이 큰 식물을 말한다. 햇빛 때문에 괴로워하는 요나가 경험한 것은 박 넝쿨이 그늘이 되어 괴로움을 멈추게 한 것이다. 요나는 뜨거운 가운데 박넝쿨이 얼마나 소중한 도움을 주는가를 실감했다. 박넝쿨로 인하여 심히 기뻐한 직후에 하나님은 벌레를 준비하셔서, 다음날 새벽에 박넝쿨을 씹어서 시들게 하셨다. 그리고 다시 해가 뜰 때에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신다.

이와 같이 요나서에서는 요나를 위하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일관성 있게 “준비한다.”는 동사로서 "마나"라는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바다에 빠진 요나를 구원하여 육지에 토하게 하셨다. 요나에게 이방인을 구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연달아 박넝쿨, 벌레,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요나는 뜨거운 동풍을 원망하며 죽기를 간구하는 상태에 이른다. 4장 3절에서와 같이 요나는 말한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요나서 4:8). 앞에서는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악한 이방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며 죽기를 간구하였다면, 이제는 박넝쿨이 죽음으로 자신이 뜨거운 동풍에 방치되자, 단지 자신의 불편함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가는 박넝쿨을 아쉬워하며 죽기를 간구한다. 박넝쿨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반응을 기억나게 한다. 그는 다시금 죽기를 구한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요나서 4:8).

하나님은 다시금 4절과 같이 요나에게 너의 성냄이 합당하냐고 묻는다 (4:9). 3절과 8절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요나의 불평이 담겨 있다. 3절에서는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불평이다. 8절은 박넝쿨이 사라진 것에 대한 불평으로 박넝쿨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표현되어 있다. 이제 4절 다음에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질문이 이어진다: “네가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마땅하냐?” 요나는 니느웨 백성의 구원에 대한 반응과는 상관없이 박넝쿨이 시들어 죽은 것에 대한 자신의 불평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요나서 4:9). 요나가 박넝쿨에 대하여 보여준 반응이야 말로, 자신의 문제점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로 알고 하나님은 마지막 발언을 하신다.

D.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 (4:10-11)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질문할 차례가 되었다. 하나님의 마지막 대답은 박넝쿨과 니느웨를 비교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요나에게 박넝쿨은 무엇인가? 박넝쿨은 요나가 아끼는 대상이다. 여기에서 아낀다 (sWx)는 단어는 신명기에서 멸망 받아야 마땅한 존재, 살인자 (신19:13), 위증하는자 (신 19:21), 우상숭배하는자 (신 13:8), 그리고 이방민족(7:16)에 대하여 아끼지 말라고 명령한다. 신명기만이 아니라 에스겔서에서 심판을 행하는 본문에서 이 단어가 나타난다. 심판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끼지 않으신다 (겔 24:14; 5:11). 전체적으로 아낀다 (sWx)는 단어는 멸망시킬 수도 있고 보존시킬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자가, 대상을 멸할 수도 있고 보존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대상을 멸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맞서서 대적하는 존재들에 대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없애기를 요청한다. 우상숭배하는 자, 위증하는 자,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는 이방 민족을 아껴서는 안된다.

요나와 하나님의 경우에 아끼는 행위의 기준은 어떻게 다른가? 요나가 박넝쿨을 아끼는 이유는 그늘을 통해 자신의 괴로움을 면하려는 의도였다. 뜨거운 태양을 참지 못하여 박넝쿨이 죽지 않기를 원하고 아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의 아낌은 어떠한 것인가? 죄를 범한 자를 아끼지 않고 죽여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지은 자들을 단번에 정의에 따라 심판하지 않는다. 죄지은 자들에게 아직도 기회는 있다. 그들이 회개하고 악으로부터 돌아 선다면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의에 따라 심판하기 전에 마지막까지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요나는 자신의 편안함을 위하여 박넝쿨을 아꼈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인들인 니느웨의 많은 백성들과 가축을 불쌍히 여기셨기에 그들을 아끼셨다. 그들을 아낀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백성들을 심판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아낀다 할지라도 그들이 마지막까지 회개하지 않고, 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낀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돌아보면 그들이 회개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정의에 따라 심판하는 것을 마지막까지 유보하고 심판을 선포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낌은 인간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어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 후에 요나의 응답이 없는 것은 문학적인 장치이다. 10절과 11절이전에 요나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성내어 죽기까지 합당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낌과 요나의 아낌을 비교하면서 니느웨의 백성들과 가축들을 아끼는 것이 합당함을 보여주면서 요나가 돌아서기를 간구하고 있다. 요나의 생각은 요나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고백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는 공동체를 직면할 수도 있다. 요나서를 읽는 사람들은 요나가 마지막까지 변화되지 않음을 보고 도전을 받아야 한다. 독자들에게 요나가 이루지 못한 열방을 향한 선교의 과업에 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3. 설교를 위한 적용
1) 요나서 가운데 특히나 이 본문 (3:10-4:11)은 구약의 복음서에 해당한다. 이 본문은 전체적으로 3장 10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반응이다. 3장 10절에서 요나가 경험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의 구원이다. 만약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요나는 하나님께 구원을 감사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구원받은 이방인들을 옹호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요나와 논쟁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특히나 이 본문은 누가복음에서 잃었던 자가 돌아오는 사건에 대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과 유사하다.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 앞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원망에 대답하기 위하여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돌아온 탕자를 옹호하며 맏아들을 책망한다 (눅 15:1-32). 이 본문에는 예언서에서 강조하는대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누구나 용서하는 하나님의 자비가 전제되어 있다. 본문의 초점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져야 하는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주어지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다. 본문을 설교하고자 할 때는 박넝쿨로 표현된 요나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과 니느웨 백성으로 표현되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비시키는 것이 좋겠다.

2) 박넝쿨을 중요시 여기는 요나의 행동에서 요나의 이기적인 신앙이 담겨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죄에서 벗어나 회개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이방인들에게, 특히나 자신들에게 피해를 준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기심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회개와 회복의 길이 아직도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빨리 멸망하기를 구하던 그 자리에서, 요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만난 박넝쿨의 달콤한 이익에 눈이 먼다. 한나절동안 자신에게 그늘이 되어 도움을 준 박넝쿨이 시들어 사라지자 그것을 아까와 하고 성을 내기까지 하는 것이다. 자기의에 가득 차서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하고 정죄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또는 죽었다가 돌아온 동생인 탕자에게 새로운 기회를 인정하지 않는 맏아들과 같은 사람이다. 박넝쿨을 중요시 여기는 요나는 자기만 생각하며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3)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박넝쿨과 대비되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 백성이고 이방인이고 차별이 없다. 죄지은 어떤 사람들에게도 기회는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팔을 벌려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박넝쿨에 어찌 비교하랴?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인간들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기다리셨다. 니느웨 백성들이 알지 못하고 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위협할 때도 하나님은 기다리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를 갈면서 증오할 때에도,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이 돌아올 기회를 박탈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저들이 알지 못해서 악을 행하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을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 (4:11)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들이 깨닫기만 하면 돌아올 수 있기에, 아직은 심판을 행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서서히 심판의 때가 다가온다 할지라도, 할 수 있는 한 심판의 시기를 늦추시고 당신의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백성들을 마지막까지 아끼고 기다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고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이다. 하나님의 선민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은 차별없이 온 인간을 마지막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4) 본문의 절정은 이방인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명제에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자신들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오해하는 하나님의 선민들을 변화시켜 열방을 구원하는 도구로 만드는 하나님의 계획으로까지 나아간다. 하나님이 요나와 마지막까지 대결을 벌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열방을 구원하는 사역에 동참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얼마나 집요하신지, 다시스를 향하여 달아나 배 밑창에 숨어있는 요나를 이방인을 통하여 불러 세우고 바다에 던져 버린다. 돌아온 요나가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하자,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취하신 방법은 요나에게 박넝쿨과 니느웨 백성을 대조시키는 것이었다. 이방인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그렇게 요나에게 보여준 이유는 무엇인가? 이방인들을 향한 편견과 아집에 가득 찬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요나가 니느웨를 향한 선교를 거부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내버려 두고 다른 방법으로 니느웨를 구하실 수도 있었다. 그런데 유독 요나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백성을 위하여 심판과 회개를 외치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니느웨의 구원을 이방인 구원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의 신호탄으로 삼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선민으로 택한 자들이 자신의 구원에 만족하지 않고,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태초부터 보여주신 열방을 위한 중보자로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얻고 (창 12:3), 이스라엘 나라가 제사장 나라가 됨으로 열방을 위해 중보자가 되기를 원하신 하나님이 (출 19:5-6), 이제는 요나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열방을 위한 중보자로 서기를 간구하시는 것이다. 이제는 매순간마다 요나를 바닷속에 던짐으로 힘겹게 이방인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이해하고 이방의 빛으로 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열방의 중보자로 서기 위하여 요나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먼저 자신도 바닷속에 빠져서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고, 이제는 자신과 같이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자들의 구원을 외치는 존재가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열방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어떤 곳이든지 주님 오실 때까지 복음의 소식을 정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